여인형
동국대 화학과 명예교수
‘여인형의 화학 공부’ 저자
개봉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최고의 SF 작품이라 손꼽히는 영화 ‘매트릭스’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불행히도 아무도 매트릭스가 무엇인지 말해줄 수 없다. 너 자신이 직접 알아내야 한다.” 현실인 줄 알고 살았던 매트릭스가 실은 0과 1 두 가지 숫자로 프로그래밍 된 가상 세계라는 것. 삶의 의미를 뒤바꿀 이 놀라운 사실을 직접 경험해야 안다는 뜻이다. 여인형 동국대 명예교수를 인터뷰하는 내내 그가 매트릭스를 깰 수 있게 도와주는 멘토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 모든 것이 화학물질로 이뤄져 있음을 깨닫게 함으로써, 세상을 보는 눈을 180도 바꿔주는 멘토 말이다. 최근 지난 20년간의 멘토 활동을 집대성한 책 ‘여인형의 화학 공부’를 출간한 그를 인터뷰했다.
“14K 귀금속의 금 함량이 얼마나 되는지 아세요?”
“”
2월 27일 서울 용산구 동아사이언스 사옥. 인터뷰 전 가볍게 대화를 나누던 중, 여인형 동국대 명예교수는 결혼을 앞둔 기자에게 깜짝 질문을 던졌다. 결혼반지를 끼고 있는 손가락이 무색하게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여 교수는 “생활 속에서 자주 듣고 꽤 간단한 개념인데 의외로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금 함량이 100%인 순금을 24K로 정하고, 금 함량이 75%(24분의 18)일 때 18K, 금 함량이 약 58.3~58.5%(24분의 14)일 때 14K라 부른다는 것이다. 금 함량이 높을수록 반지의 노란색이 진하고, 무겁고, 비싸다. 그는 “과거 결혼 예물로 주문한 18K 금반지의 금 함량이 궁금해 공인기관에 분석을 의뢰한 적도 있다”며 웃었다.
‘전 국민의 화학 선생님’ 자청한 이유
반지 얘기 하나로도 10분을 귀 기울이게 만드는 그의 능력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더욱 놀라웠다. 여 교수는 2009년부터 네이버 지식백과 연재 ‘화학 산책’에 일상생활 속 마주할 수 있는 화학과 관련한 글을 올려 지금까지 누적 조회수 1400만 회 이상을 기록한 노련한 화학 전도사(포교사)다. 그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화제를 귀신같이 찾아낸다. 미용을 위한 보톡스에 관심이 높아질 땐 ‘잔주름을 없애는 강력한 독성 물질 보톡스’라는 글을 쓰고, 최근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로 대중들이 혼란에 빠졌을 땐 ‘삼중수소 이야기’라는 글을 써 과학적 사실로 혼란을 잠재우려 노력했다.
그 밖에 플라스틱, 보석, 파마 약품 등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하는 물질을 흥미롭게 소개하는 데도 탁월하다. 과학을 잘 안다고 해서 대중의 눈높이에 맞춘 글을 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여 교수는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주제를 택하는 것뿐만 아니라, 직관적이고 쉬운 예를 사용하기 위해 많이 고민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번에 출간한 책 ‘여인형의 화학 공부’에선 원자와 원자핵의 크기를 서울시와 농구공의 크기에 빗대 원자핵이 얼마나 작은지, 전자의 운동영역이 얼마나 넓은지를 쉽게 설명했다. 그는 “선정한 주제를 더 쉽고 직관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많은 고민의 시간을 갖는다”며 “화학을 잘 모르는 지인에게 글을 읽어보게 한 뒤 피드백을 듣기도 하고, 다른 대학에서 화학 교수로 같은 길을 걸어온 부인에게 자문을 구하기도 한다”고 ‘영업 비밀’을 털어놨다.
그가 처음부터 화학 전도사에 뜻이 있었던 건 아니다. 여 교수는 미국 아이오와주립대에서 화학 박사를 취득한 뒤 한국에너지연구소(현재의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다 동국대 화학과로 옮겨 31년을 지냈다.
“시작은 우연이었어요. 교수가 되고 연구를 하려 했지만 함께 연구할 대학원생이 부족해지는 시점에서 연구 진행이 무척 힘들었어요. 연구를 못하게 되니까, 뭐라도 해보자는 생각이 들어서 저 혼자서 할 수 있는 글을 쓰기 시작한 거죠.”
그렇다면 여러 활동 중에서 대중을 위한 글쓰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어떻게 20년 가까이 그 일을 꾸준히 해올 수 있었을까. 기자의 질문에 여 교수는 “간단한 화학 지식만 있어도 주변의 것들이 새롭게 보이고 더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 제가 모르는 화학물질도 엄청나게 많죠. 그런데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저도 궁금하더라고요. 그것들을 더 자세히 공부해서 알아가는 게 기뻐요. 결국 제가 스스로 공부하고 찾아보는 것 자체가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에 (대중을 위한 글쓰기가)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모든 과학을 연결하는 것이 화학의 매력
여 교수는 2023년 12월 무려 640쪽이나 되는 신간 ‘여인형의 화학 공부’를 출간했다. 문과 대학생을 위한 화학 강의,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의 K-MOOC 강의, 은퇴 후 학생들을 위해 진행한 교육 기부 강연, 대중들과 소통하기 위해 글을 쓴 경험을 모두 합쳐 초보자를 위한 화학 입문서를 쓰겠다는 생각에서 시작된 책이었다.
한글만 읽을 수 있다면 화학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썼기에, 책의 원래 제목은 ‘국어로 읽는 화학’이었다. 기자는 바뀐 지금의 제목에 ‘공부’란 단어가 들어간 이유가 궁금했다. 화학 ‘공부’는 어렵다는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다. 여 교수는 “저도 고등학교 시절 화학보다는 물리를 좋아했다”며 “주기율표를 외우지 못해 꾸중을 들었던 기억이 남아있다”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와 마찬가지로 화학 공부를 어려워하던 그가 화학이라는 학문에 본격적으로 재미를 느낀 것은 대학생 시절. 장학금을 받기 위해 물리, 전자공학, 화학 등 모든 기초과학 분야의 공부에 매진하면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화학이 모든 과학을 연결해주는 고리라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물이라는 화합물에 전기를 가하면 수소와 산소가 나와요. 반대로 리튬의 화학구조를 변화시키면 전기가 발생하죠. 이때 전기라는 물리적 현상이 화학을 통해 설명돼요. 또 다른 예를 들어볼까요? 우리가 숨을 쉬면 포도당은 산소와 반응해 이산화탄소와 물, 그리고 에너지를 생성하는데 이것도 화학식으로 설명돼요. 화학이 물리, 생명, 천문 등 여러 과학을 연결해주는 분야라는 점이 큰 매력으로 다가왔어요.”
‘여인형의 화학 공부’라는 제목에는 더 깊은 공부를 통해 화학에 재미를 느꼈던 자신처럼, 책을 읽는 독자들도 공부를 통해 화학의 매력을 알게됐으면 하는 저자의 바람이 담겨있다. 그는 독자들이 이런 화학의 매력을 느낄 수 있게 이번 책을 보다 쉽고 자세히 집필했다.
여 교수는 “원소 기호는 자연의 알파벳”이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알파벳이 모여 단어를 이루고, 단어가 모여 문장을, 문장이 모여 문단, 문단이 모여 글이 되듯, 자연의 알파벳인 원소가 결합해 분자가 되고, 분자들이 모여 물질을 이룬다는 것이다. 자연의 모든 물질을 이루는 기본이 원소이니, 우리 주변에 화학물질이 아닌 것이 있을 리 없다.
“이 세상에서 화학물질이 아닌 것이 있을까요? 찾아오면 저희 집을 드리겠습니다.”
인터뷰를 마무리할 즈음, 그는 대뜸 공약을 던졌다. 기자의 당황한 표정을 읽은 그는 웃으며 말을 이어 갔다.
“사실 이 질문은 2010년 영국왕립화학회(RSC)가 상금 100만 파운드와 함께 내건 공약이에요. 세상 모든 것이 화학물질로 이뤄져 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 말이 새삼 참 인상적이더라고요. 강연 때 잠 깨라고 종종 이 질문을 던져요.”
그제야 함께 웃으며 조만간 화학물질이 아닌 것을 찾아 연락드리겠다고 답했다. 여 교수는 독자들과 머리를 맞대도 좋다고 자신있어 했다. 그러니 여러분도 ‘여인형의 화학 공부’를 읽으며 화학물질이 무엇인지, 우리 주변에 화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물질이 과연 있는지 깊이 고민해 보길. 혹시 모르지 않는가. 과학동아 독자라면, 100만 파운드와 여 교수의 집을 함께 얻을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