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후 79년,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연안의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했다.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던 고대 로마의 도시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은 화산이 뿜어낸 잿더미에 뒤덮였다. 그로부터 2000년이 지난 2023년 10월 12일, 헤르쿨라네움의 잿더미에서 발견된 고대 파피루스 속 글자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2000년 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할 때 함께 묻힌 고대 파피루스를 해독하는 자에게 상금 70만 달러(약 9억 2400만 원)를 수여하겠다.’
프랑스 최고 권위의 학술기관, 프랑스 학사원이 주최한 ‘베수비오 챌린지(Vesuvius Challenge)’의 주요 내용이다. 상금을 얻기 위해 2023년 3월부터 미국, 독일, 중국 등 각국의 컴퓨터 공학도들이 챌린지에 뛰어들었다. 이들이 읽어야 하는 고대 파피루스는 화산재의 열 때문에 숯덩이처럼 탄 상태다. 건드리기만 해도 부스러지니, 돌돌 말린 파피루스 속 글자를 ‘손 대지 않고’ 읽어야 한다. 프랑스 학사원은 왜 거액의 상금을 걸면서까지 숯덩이 속 옛 글자를 읽으려 했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고대 파피루스에 얽힌 역사를 알 필요가 있다.
고대 로마의 영광이 고스란히 담긴 ‘숯덩이’
거액이 걸린 고대 파피루스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며 멸망한 고대 로마의 도시 헤르쿨라네움에서 출토됐다. 당시 헤르쿨라네움은 폼페이와 더불어 고대 로마 귀족들의 휴양지로 인기가 많은 곳이었다. 헤르쿨라네움의 인구 수는 5000명이었다. 잘 알려진 옆 도시 폼페이보다는 조금 작은 마을이었지만, 더 부유했다. 헤르쿨라네움에는 로마 전역에서도 손에 꼽힐 만큼 호화스러웠던 저택이 있었다. 앞으로는 나폴리 바다가 펼쳐지고, 뒤에는 베수비오 산이 자리 잡은 이 저택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장인인 루시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별장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저택에는 청동으로 된 예술작품뿐 아니라 수천 개의 파피루스 문서가 보관돼 있었다. 이 저택의 별명이 ‘파피루스의 빌라’인 것도 이 때문이다. 피소는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들을 후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천 개의 파피루스에는 피소가 귀히 여긴 당대의 지식이 적혀 있을 것이다.
헤르쿨라네움의 화려한 영광은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기원후 79년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며 내뿜은 화산재가 파피루스의 빌라를 뒤덮었다. 약 20m 두께로 쌓인 화산재의 열로 저택 안에 보관됐던 파피루스들은 모두 숯처럼 탄화됐다. 그리고 저택 속 수많은 예술품과 함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혔다.
하지만 이런 화산 폭발이 파피루스에겐 오히려 호재였다. 파피루스는 갈대과 식물의 줄기를 이용해 만든 옛 종이다. 내구성이 약해 공기와 만나면 쉽게 부식된다. 그런데 파피루스의 빌라에 보관된 고대 파피루스는 탄화된 뒤 땅속에 묻혀 외부 공기와 접촉하지 않은 채 보존됐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1750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저택의 대리석 바닥을 발견하면서 다시 세상에 드러났다.
손대면 부서질 듯 연약하지만, 이 고대 파피루스를 읽기만 하면 지금까지 남겨진 고대 로마의 문헌자료 두 배가량의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헤르쿨라네움에서 출토된 파피루스가 고고학자들에겐 보물상자나 다름없는 이유다.
2023년 10월 12일, 첫 글자가 세상에 공개되다
베수비오 챌린지는 총 상금이 100만 달러(약 13억 1200만 원)나 되는 대회다. 파피루스 속 연속된 문장을 읽는 데 처음으로 성공한 참가자에게 상금 70만 달러를, 글자를 읽는 데 처음으로 성공하는 참가자에겐 상금 5만 달러를 수여한다. 그 외에도 파피루스를 읽는 데 기여하는 참가자들을 위해 크고 작은 상이 마련돼 있다.
2023년 10월 12일, 5만 달러의 주인공이 발표됐다. 2000년 만에 파피루스 속 글자를 읽는 데 성공한 참가자는 미국의 컴퓨터공학도 루크 패리터다. 패리터는 현재 미국 네브래스카 링컨대에서 컴퓨터과학을 전공하고 있다. 베수비오 챌린지 운영진은 “루크 패리터가 지난 8월 파피루스 속 4cm2 면적에서 최소 10글자 이상을 식별해 냈다”면서 “그가 읽은 글자는 그리스어로 보라색을 뜻하는 ΠΟΡΦΥΡAC(포르피라스)였다”고 발표했다. 이어 “패리터의 발견 이후 또 다른 참가자인 유세프 나데르가 패리터와 같은 부분을 더 선명하게 읽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나데르는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데이터과학을 전공하고 있는 대학원생이다. 패리터와 나데르에게는 각각 4만 달러와 1만 달러의 상금이 수여됐다.
패리터는 수상 직후 자신의 X(트위터) 계정을 통해 “너무나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며 “이제 시작일 뿐이고, 앞으로 (더 좋은 성과를 내) 여러분을 실망시키지 않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패리터가 수상소감을 통해 ‘많은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강조한 이유가 있다. 패리터와 나데르가 돌돌 말린 채 숯덩이가 돼 버린 파피루스의 글자를 읽을 수 있었던 배경에는 브렌트 실스 미국 켄터키대 컴퓨터과학과 교수의 노력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실스 교수는 컴퓨터과학 기술을 활용해 고문서를 읽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는 2015년 돌돌 말려 탄화된 채 이스라엘의 사해 인근에서 발견된 ‘엔게디 두루마리’를 읽은 공로로 잘 알려져 있다. 당시 실스 교수팀은 X선으로 엔게디 두루마리를 스캔했다. 그 다음 스캔을 통해 얻은 정보로 엔게디 두루마리를 컴퓨터 프로그램 상에 재구성하고, 그 내용을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이 기술에 ‘가상적 펼치기(virtual unwrapping)’란 이름을 붙였다.
헤르쿨라네움의 고대 파피루스를 읽는 데에도 같은 기술이 활용됐다. 그러나 이번엔 문제가 더 복잡했다. 헤르쿨라네움에서 출토된 고대 파피루스들은 엔게디 두루마리보다 더 촘촘하게 말려 있었다. 게다가 글자를 적는 데 활용한 잉크가 더 옅어 X선 스캔을 통해 글자를 식별하기도 어려웠다.
컴퓨터공학도들의 히든 카드 ‘AI’
실스 연구팀은 인공지능(AI)에서 돌파구를 찾았다. 헤르쿨라네움의 파피루스 조각 일부는 적외선으로 분석했을 때 글자를 식별할 수 있었다. 즉, 잉크의 흔적이 종이에 남아있었다는 뜻이다. 다만 육안으로 X선 스캔 데이터를 보고 식별할 수 없을 뿐이다. X선 스캔 데이터 상에서 잉크가 있는 자리와 없는 자리의 차이점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알아낸다면, X선 스캔 데이터만으로도 파피루스의 글자를 식별할 수 있게 된다.
연구팀은 글자를 읽을 수 있었던 파피루스 조각의 X선 스캔 데이터를 AI에 학습시켰다. 그 결과, AI가 X선 스캔 데이터 상에서 글자가 있던 곳과 없던 곳을 구별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연구 결과는 2023년 4월 4일 논문사전공개 사이트 ‘아카이브(arXiv)’에 공개됐다. arXiv: 2304.02084
더 높은 해상도의 X선 스캔 데이터도 확보됐다. 연구팀은 2019년부터 입자가속기를 이용해 헤르쿨라네움에서 출토된 고대 파피루스 두 개와 몇 가지 조각들을 스캔해왔다. 그 결과, 3~8μm(마이크로미터・1μm는 100만 분의 1m) 단위의 높은 해상도를 가진 X선 스캔 데이터를 얻을 길이 뚫렸다.
보이지 않는 글자를 읽을 방법과, 더 정밀하게 파피루스 두루마리 내부를 볼 방법이 생겼다. 남은 건 실제로 AI를 학습시켜 파피루스를 읽는 일이다. AI와 입자가속기를 이용한 스캔 데이터를 이용해 고대 파피루스의 글자를 읽을 수 있다는 소식은 아카이브에 연구 결과가 게시되기 전부터 인터넷에 퍼지기 시작했다.
특히 관심을 가진 사람은 세계 최대 오픈소스 코드 공유 플랫폼 ‘깃허브(GitHub)’의 전 최고경영자(CEO) 냇 프리드먼이었다. 프리드먼은 연구팀에 AI 챌린지 플랫폼 ‘캐글(Kaggle)’을 통해 헤르쿨라네움에서 출토된 고대 파피루스를 읽어내는 챌린지를 열자고 제안했다. 여기에 프랑스 학사원이 주최를 맡고, 다양한 후원자들이 후원금을 모아왔다. 베수비오 챌린지는 이렇듯 많은 이들이 모여 탄생했다.
실스 연구팀은 그동안 촬영한 고대 파피루스의 3차원 X선 스캔 데이터들과 함께 가상적 펼치기 기술의 컴퓨터 시뮬레이션 모델을 공개했다. 참가자들의 역할은 주어진 정보를 활용해 돌돌 말린 파피루스를 펼치는 알고리즘, 파피루스에서 잉크를 식별하는 알고리즘 등을 개발해 궁극적으로는 파피루스의 글자를 읽는 것이다. 참가자들이 함께 진행 상황과 피드백을 공유하는 ‘디스코드’ 페이지에는 기사를 쓰고 있는 지금(2023년 12월 14일)도 활발한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
실스 교수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많은 이들이 챌린지에 참여할 줄은 몰랐다”면서 “베수비오 챌린지를 통해 그간 다섯 명의 연구자가 작업하던 일에 전 세계의 공학도 수천 팀이 함께했다”고 했다. 그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여러 사람이 경쟁하는 ‘경쟁적 과학’덕에 고대 파피루스 해독이 앞당겨졌다”고 했다.
베수비오 챌린지는 2023년 12월 31일까지 전 세계 참가자들의 해독 결과를 받고, 2024년 초 최종 우승자를 발표할 계획이다. 2000년 전 파피루스를 읽어 상금을 차지하려는 ‘온라인 보물찾기’의 결말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