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적인 맞춤형 교육과정
학생들이 미래의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도록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교과를 진행
KAIST와의 긴밀한 협력
교육과정 개편부터 교육 프로그램 운영까지 KAIST 교수들이 적극 참여
밀도 있는 연구 프로그램
국내외 교육 기관과 협력해 학생들에게 다양하고 지속적인 공동연구의 기회 제공
10월 30일, 부산에 위치한 KAIST 부설 한국과학영재학교 본관.
1층 로비에는 피아노와 재즈 기타로 연주하는 ‘어텀 리브스’의 선율이 잔잔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학교의 인문예술학부가 진행하는 점심 콘서트였다. 둥글게 모여 앉은 학생과 교사 사이에서 가을 정취 가득한 곡들을 잠시 즐긴 것만으로도 이 학교의 학생들이 얼마나 다채로운 경험을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최은영 화학생물학부장에게 한국과학영재학교 생활과 수업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물었다.
Q.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께선 12년 전부터 한국과학영재학교에 재직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시는 학교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한국과학영재학교는 다양한 특징이 있습니다. 현재 한국에 있는 8개의 과학영재학교 중 유일하게 교육부 소속이 아닌 과학영재학교라는 점도 그중 하나죠. 다른 공립 학교들이 각 시도 교육청에 속한 것과 달리, 한국과학영재학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소속입니다. 교육과정 편성과 그 내용을 비롯한 운영의 자율성, 예산의 규모 및 예산 집행의 신속성 등에서 장점이 큽니다. 학생들의 요구를 자체적으로 교육과정에 신속하게 반영하고 실험, 연구에 필요한 기자재를 수시로 구입할 수도 있죠.
과학, 수학 교과목의 경우, 교사의 90% 이상이 박사후연구원까지 경험한 전문가인 것도 운영의 자율성을 잘 보여주는 측면입니다. 학생들과 다양한 연구 경험을 공유하고 연구자로서의 진로를 함께 탐색할 선생님들을 모신 것이죠.
KAIST와의 긴밀한 관계도 특징입니다. KAIST 교수님들께서 한국과학영재학교에 관심을 갖고 학생들의 R&E
(Research & Education) 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고 계십니다. 학생들이 원하는 KASIT 연구실을 견학하는 오픈랩 진행도 수월합니다. KAIST의 생물학, 생명공학 전공 교수님들이 화상 강의를 진행하며 학생들과 소통하는 ‘줌 인 바이오’와 같은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죠.
Q. 학교에 오시기 전엔 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자로 활동하셨다고요. 현재 맡고 계신 ‘나노화학의 입문’ 과목을 비롯해, 한국과학영재학교의 화학 교과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말씀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먼저 1학년이 입학하면 ‘화학 및 실험’이란 과목을 듣습니다. 그 범위는 모든 고등학생이 공통적으로 알아야할 화학 지식입니다. 그리고 2학년부터 ‘나노화학의 입문’ 같은 대학 화학과의 교육과정을 포함한 상위 교과를 배우죠. 여기엔 KAIST 등에서 학점으로 인정되는 AP(Advanced Placement) 과목도 있습니다.
특히 소개해드리고 싶은 과목은 ‘화학 특강’인데요. 신청 학생이 5명 이상이면 ‘화학 특강’이란 이름으로 다양한 과목이 개설됩니다. 제가 담당하는 ‘나노화학의 입문’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학생이 늘고 나노소재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정규과정이 됐죠.
‘화학 세미나’ 수업은 최근 주목받는 연구를 하시는 KAIST의 화학 전공 교수님들도 매년 일곱 분씩 모셔서 진행합니다. 학생들이 학회에 가도 따로 뵙거나 질문하기 어려운 교수님들께 중요한 연구 성과를 직접 듣고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다는 점이 화학 세미나 수업의 큰 장점입니다. 교수님들도 앞으로 연구자로 자랄 학생들을 위해 수업에 정성을 들이십니다.
Q. 선생님의 이전 인터뷰들 중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씹어서 소화, 흡수해야 하는 잡곡식 교육을 선호한다”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잡곡식 교육의 방식을 설명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한국과학영재학교 학생들 중에서도 중학교 때까지 접한 이른바 1타강사의 ‘미음식’ 교육에 길들여진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씹고 소화할 필요 없도록 외우기 편하게 정리된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죠. 하지만 연구자로서 자신의 관점과 목표를 가지려면, 미음식 교육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이런 한계가 스스로 꼭꼭 씹어 소화해야하는 잡곡식 교육을 말한 이유입니다. 한국과학영재학교 학생들의 목표는 앞으로 연구자로서 스스로 성장할 능력을 갖추는 것입니다. 따라서 잡곡식 교육은 아직 어린 학생들에게 지금부터 실패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기도 하죠. 이 교육의 목표를 교사가 학생들에게 설득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제가 매년 진행하는 창의연구 수업에선 처음에 학생들에게 영문 논문만 나눠줍니다. 논문들을 읽고 이 연구 결과를 토대로 더 연구할 분야가 있을지, 있다면 어떤 분야일지 등을 학생들이 자유롭게 발표합니다. 이런 과정을 3주 정도 진행하면 논문을 근거로 더 연구할 영역을 자연스럽게 학생 스스로 찾게 되죠. 영재는 남보다 적은 자극으로도 남들만큼, 혹은 그보다 더 나아가는 특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적절한 자극을 주는 교사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Q.한국과학영재학교의 졸업생 중 특히 선생님의 기억에 남는 학생이 있으신가요?
제가 부임한 2011년에 가르쳤던 졸업생에게 그가 유학 중인 미국 캘리포니아주 버클리에 가겠다고 약속한 적이 있습니다. 한국과학영재학교는 갈 수 있는 국외 위탁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하지만 업무가 바빠서 계속 못 가다가 그 학생이 4학년이 됐고, 꼭 가야겠단 생각이 들어서 개인 여행을 가는 길에 들렀죠. 약속을 했고, 게다가 첫 제자였으니까요.
초임 교사였던 2011년의 저는 참 미숙했는데, 버클리에서 만난 그 학생이 “제가 여기 있는 건 선생님 덕분이예요.”라면서 “저희에게 해주셨던 것처럼 후배들에게도 해주세요.” 하더라고요. 그 말이 지금까지 참 깊이 울립니다. 드라마 ‘슈룹’을 보면서도 떠올렸는데, 저는 우산을 접고 학생들과 함께 비를 맞아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Q. 한국과학영재학교에서 선생님께 배운 학생들이 이것만큼은 꼭 얻어가면 좋겠다고 생각하시는 점은 무엇일까요?
먼저 사고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자신의 것으로 삼으면 어느 분야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간단하고 당연해 보여도 사고하는 연습과 그 능력은 모든 탐구의 시작이니까요. 그리고 회복탄력성입니다. 실패를 반복하는 연구는 회복탄력성을 길러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학생들이 연구 과정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받아도 스스로 회복할 수 있도록 자존감을 키우는 데에도 관심을 두죠. 마지막으로 소통 능력입니다.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능력이죠. 이 세 능력이 결합할 때 자율적인 연구자로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한국과학영재학교의 교육과정은 자율적으로 기획, 운영된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방식과 기준 등이 궁금합니다.
교육부에서 운영하는 전국 공통의 교육과정이 아닌, 자체 교육과정을 편성합니다. 현재는 6차 교육과정을 운영 중이죠. 교육과정을 개편할 땐 저희 학교 선생님들과 KAIST 여러 학과의 교수님들이 함께 치열한 논의를 거듭합니다. 교육과정이 이공계 연구자 육성의 비전으로서 지니는 의의가 작지 않아서, 다양한 관점을 수렴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매 학기의 과목은 5명 이상의 학생이 신청하면 교육과정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개설되는 절차가 있습니다. 이 위원회는 학교 선생님들이 중심인 교내외의 위원들로 구성됩니다. 심사 기준 중 하나는 대학원 과정까지 들어가는 선행 내지 심화 과목은 지양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을 미리 쌓는 것보다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보는 까닭입니다. 작년부터는 학생 1명이 스스로 16주 교육과정을 구성해오면 학교의 해당 학과 및 교육과정위원회에서 심사해 과목을 개설하는 절차도 도입했습니다.
Q. 마지막으로 과학동아를 읽는 청소년 독자들에게 과학, 특히 화학 과목을 보다 밀도 있게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조언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는 생활 속에서 화학으로 다가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주위의 사람, 물건, 현상들에 더 주목하는 거죠. 바나나에 생기는 까만 점에 주목하고, 이 점이 냉장고에 넣었다 꺼내면 왜 더 빨리 생기는지, 이 현상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이런 식으로 질문을 확장시키는 겁니다. 답을 당장 몰라도 됩니다. 하지만 궁금해해야 합니다. 떠오르는 질문들을 항상 기록하고 정리하면 도움이 됩니다. 질문은 그냥 떠오르는 것이 아니며, 질문 찾기는 습관입니다. 자기 속의 질문을 꺼내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더 밀도 있는 화학 공부를 위해선 인성도 중요합니다. 인성은 타인을 향한 관심과 애정입니다. 남들에게 이익을 주고 싶다는 동기 부여에 꼭 필요하죠. 자신만을 위한 동기로 공부를 지속하는 데는 한계가 있고, 영재교육은 이타적 동기 부여를 위한 인성을 함께 키우기 위해서도 중요합니다. 주위를 보는 연구자를 양성하는 것이 한국과학영재학교의 가장 큰 경쟁력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