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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 조이풀 데이즈 비하인드

 

소원을 들어주겠다며 다가온 이가 평일 퇴근길이 아니라 주말이나 휴가철을 택했더라면 아마 세상은 그렇게 회까닥 돌아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혹은 정희가 아니라 다른 이를, 가령 분노에 가득 차 있지 않은 인간을 선택했더라면 세계평화 따위가 실현되었을지도. 그러나 하필 타겟이 정희였고, 그 여름 정희는 유달리 진상들에 시달린 참이었다. 처음 만난 회원 하나가 팔짱을 끼고 정희를 한참 위아래로 훑더니 “뭘 먹으면 그렇게 살이 쪄요?” 하고 물은 일도 있었다. 사무실 에어컨은 툭하면 파르르 몸을 떨며 꺼져 버렸으나 위에서는 고쳐 줄 생각을 않았다. 야근은 잔뜩 해야 하는데 오후 다섯 시 이후에는 에어컨을 켜는 게 금지되었다. 막내도 아닌데, 사무실 청소를 매일 직접 했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비질을 하고 대걸레로 밀어야 했다. 그러면서 계속 출입문을 곁눈질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을 노리는 스토커가 있기 때문이었다. 정희의 담당 회원이었는데, 매칭된 여자들에게 모두 퇴짜를 맞은 후 정희에게 보상 데이트를 요구하는 인간이었다. 하늘 같은 회원님에게 주먹 한번 뻗을 수 없는 정희는 그저 웃으며 뒷걸음치다 나 살려라 내뺄 뿐이었다.
그러니, 조용한 퇴근길의 막바지 좁은 골목에 홀연히 나타나서는 정희가 청하지도 않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떵떵대던 날개 달린 괴한에게 정희가 한 대답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그러나 본디 충동이란 본심과 가장 가까운 법. ‘미친놈아,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 하는 느낌으로 정희는 말했다.
“번식에 환장한 인간들이 너무 싫어. 번식할 때마다 수준이 뚝 떨어지면 좋겠네요.”
“수준이란 것의 정의가 뭐죠?” 괴한이 되물었다.
정희는 한숨을 쉬었다. 골목을 막아선 저 거구의 괴한이 비켜 주지 않으면 집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 문장도 더 이야기할 여력이 없어서, ‘수준’과 비슷한 단어가 무엇인지 머리만 굴렸다.
그 단어가 생각난 것은 몇 시간 전 받은 어느 노모의 전화 때문이었다. 노모는 괴성을 질러댔다.
“우리 애를 어떻게 그딴 집이랑 매칭해? 우리 집은 그런 집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그래서 정희는 괴한의 물음에 대답했다.
“차원이요. 차원. 수준 이꼬르, ‘차원’. 언더스탠?”
그 대답을 들은 괴한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선 길을 비켜 주었는데, 아무래도 한국말로 ‘수준’보다 ‘차원’이 더 어려운 단어가 아닌지 정희가 의문을 가졌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진 후였으므로 부질없었다.
“참”, 괴한은 떠나는 정희의 뒤통수에 대고 물었다.
“어느 때고 필요한 정의가 분명히 파악되지 않을 땐 다시 찾아와서 묻겠습니다. 그래도 괜찮아요?”
괴한의 물음에 정희는 “뭐요? 아저씨가 뭔데 나를 파악해?” 하고 소리친 후 제 갈 길을 갔다.
 
그런 식으로 주식회사 본매리지의 10년 차 커플매니저인 정희는 본의 아니게, 인간의 번식을 2차원으로 만들어버렸다. 그 와중에도, ‘수준’ 같은 단어는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던 괴한이 ‘번식’이란 어휘는 찰떡같이 알아들었다는 것이 신기할 노릇이지만, 여하튼 그리하여 ‘번식 성공’의 가능성이 0을 초과하는 모든 행위의 현장은, 그 즉시 2차원으로 격하됐다. 그 현장에는 어떤 부피도, 깊이도 존재하지 않았다. 번식을 시도하자 신체가 이집트 벽화의 흔적처럼 짓눌린 이들의 당혹감은 절망감으로, 절망감은 기괴한 열망으로 변화했다. 하지만 평면은 평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지막까지 잔머리를 굴리던 이들도 물론 있었다. 그러나 2차원이 1차원으로 점으로 더 작고 짧게 바뀌었을 뿐이다. 2차원의 선은 겹쳐질 수 없으니, 하나가 소거되는 것. 결국 그런 시도마저 아주 나중에는 자취를 감추었다. 남은 건 번식할 수 없는 사람들의 비명뿐.
그래도 전반적인 인간 사회에서 결혼이란 제도는 번식보다는 계급재생산의 의미가 훨씬 강했기에 본매리지는 없어지지 않았고 정희 역시 일자리를 잃지 않았다. 정희는 아주 오래 살았고 내내 독신이었다.
자신이 정체 모르는 괴한에게 의미 모를 소원을 빌었다는 말을 정희는 생전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인류의 번식을 중단시켰다는 엄청난 사실을 아무도 몰라야만 한다’ 같은 비장한 공포심이 있던 건 아니고 단지 누구도 그 말을 믿어 주지 않을 현실을 잘 알았던 탓이다. 대신 커플매니저 일을 하며 회사에서 지급받은 업무기록용 클리어파일에 자신이 인류를 저주에 빠뜨린 순간부터 죽기 직전까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세세히 기록을 남겼다. 관련된 기사도 꼬박꼬박 프린트해 스크랩했다. 클리어파일이야 플라스틱이니 그렇다 치고, 그 안의 종이들이 어떻게 일만 년 동안 썩지 않고 살아남았는지는 참으로 미스터리다.
일만 년 후, 발굴된 파일의 내용물을 해석하고 가치를 최초로 알아본 이는 네-다리 종교학자 매닝이었다. 거주 행성을 잃은 두-다리와 초과-다리들을 이끌고 지금의 신행성을 발견하여 뿌리를 내렸다고 알려진 신화 속 개척자, 크뮨의 시대로부터도 이미 충분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매닝이 쉽게 내용을 해석할 수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미연qzw173과 비밀리에 계급을 초월한 연애 중이었기 때문이다.
 
*
크뮨 가라사대, 신행성의 모든 생명을 총 세 개의 계급으로 나누어라. 두-다리와 초과-다리들, 그리고 같은 얼굴의 클론들.
상위층인 두-다리는 개체마다 다른 모습을 지녔다. 그게 바로 신으로부터 점지된 고귀함의 증거라고 했다. 중위층인 초과-다리들 역시 모습은 제각기 달랐으나, 다리의 수가 둘보다 많다는 것은 곧 탐욕의 상징이므로 신의 축복을 상쇄할 원죄 역시 품은 것이라 해석되었다. 하위층인 클론들은 신행성의 원주민 출신으로 다리는 모두 두 개였으나 일제히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는 온전하지 못한 영혼의 증거로, 하등함의 표식으로 여겨졌다.
 
미연qzw173은 파일에 스크랩된 기사의 헤드라인을 매닝에게 천천히 읽어 주었다. 땅에 떨어진 도덕…… 인류와 비인류 간의 사랑은 가능한가…… 생존이냐 존엄이냐…… 
“그러니까, 이 기록자가 말하는 ‘인간’이란 건 이 행성에서 살던 종의 극히 일부였나 보지. ‘이종’ 번식은 가능했던 걸 보아하니.” 매닝이 말했다. 미연qzw173은 대답하지 않은 채, 그 다음 헤드라인을 계속해서 조용히 읊조려 갔다.
‘충격’ 중국서 단성생식 케이스 첫 보고……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어, 누리꾼들 ‘조작’에 무게 실어…… 탄자니아서 단성생식 케이스 추가 보고…… 프랑스 연구팀, 중앙아시아서 단성생식 집단 대거 발견…… ‘모두 똑같은 얼굴을 한 디스토피아’……
미연qzw173의 손가락이 기사의 사진 위에 머물렀다. 매닝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복식이 낯설 뿐 지금의 클론층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신 조상들이군.” 매닝이 말했다. “그렇지, 이 파일의 기록자가 인간이란 종의 번식 과정을 건드렸지만, 단일 개체에 의한 단성생식은 그 과정 없이도 번식이 가능하니 차원의 문제와는 완전히 무관했겠지. 꽤 빠르게 진화했군, 당신 조상들.” 매닝은 네 다리를 서로 꼬고서 나머지 두 팔로 턱을 괴었다. “환경에 따라 생식 방법을 빠르게 변화시켰으니. 어떻게든 멸종은 하지 않으려던 거였어, 고무적이군. 이런 선구자들의 후손이라니, 당신.”
그러나 미연qzw173은 일언반구 없이 다시 읽기 시작했다. 
여성의 전유물인 단성생식…… ‘생식을 허하라’ 남성의 처절한 외침…… 한국서 첫 이종둥이 유희망 군 탄생, “꼬리 빼곤 사람과 다를 바 없어요!”…… 산부인과 대호황…… 인도서 하누만랑구르원숭이 대거 수입, ‘침팬지와 맞먹는 성공률, 비용은 절반’…… 교황, 이종둥이에 첫 세례, 단성생식 클론에는 세례 거부해…… 각국 정부, ‘앞서거니 뒤서거니’ 이종교배권고안 발표……
“당신 선조들 꽤 유연하네. 훌륭해.” 매닝이 말했으나 미연qzw173은 고개를 저었다.
뉴욕시 10대 청소년 무리가 클론 연쇄 살해, 재물손괴죄로 고발되었으나 집행유예…… 충북서 국내 첫 단성생식 사례 뒤늦게 확인! 다자녀 혜택 모조리 챙긴 것으로 알려져 공분……
‘다자녀 혜택’이란 게 뭐지. 매닝은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공분’이란 단어의 뜻은 알았으므로 어쨌거나 환영받지 않았다는 건 확실했다.
‘축복의 아기’ 유희망 군 서울대 입학, ‘우주 연구할 것’…… 교배 대상 종별 지능 차이 보고서는 연내에 공개할 예정……
그리고 정희가 스크랩한 마지막 기사의 헤드라인은 이랬다.
천재 이종둥이 30인의 크뮨호, 우주로! 유희망 대장, ‘꼭 돌아올 것’ 비장하게 마지막 인사……
“크뮨이라고?” 매닝은 웃으며 여섯 개의 팔다리로 미연qzw173을 안았다. “내가 읽지 못한다고 그런 위험한 농담을 맘대로 하면 안 돼. 신고하면 바로 잡혀갈 수 있다고, 그러면 하나도 재미없어지는 거지. 당신 눈엔 내가 대단해 보이겠지만 나도 그저 힘없는 중위층이야. 두-다리 놈들이 깔아뭉개면 뭉개져야 하는 존재라고. 알잖아?”
그러나 미연qzw173은 매닝의 몸을 천천히 밀어냈다. 그러고서는 재게 다리를 놀리며 매닝의 방을 나갔다. 그래서 매닝은 그가 크뮨이란 단어를 발음한 게 농담이 아님을 알았다. “자기야” 하고 불렀으나 이미 방문은 철컥 소리를 내며 닫혔고, 무려 한 달이 흐른 후 미연qzw173이 다시 돌아올 때까지 매닝은 그가 자신을 버리고 두-다리 놈들의 소유가 되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매닝은 돌아온 미연 qzw173에게 오래오래 사과했다. 그리고 미연qzw173은 말했다. “당신이 미워서 도망친 것이 아니었어요. 당신이 내게 해석을 요구한 기록을 내가 온전히 번역할 수 없기 때문이었어요. 두려워서 빼먹은 게 너무나 많아요. 나는 그걸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어요. 제가 잡혀가면 어떻게 되죠? 제아무리 하등하다 한들 통각마저 죽어 버린 것은 아니잖아요. 한때 이 행성의 많은 이는 자신보다 하등하면 통증조차 느끼지 못한다고 여기기도 했습니다만.”
매닝은 미연qzw173이 헤드라인들을 읽던 때에 그와 동시에 느낀 의혹을 직접적으로 물었다. “읽지 못했다는 것이, 쾌락에 대한 언어인가?”
“예.” 미연qzw173은 말했다. “기록자의 문장은 아주 강력하고 적나라해요. 인간들이 오로지 쾌락을 위해 이종교배를 선호했고 그걸 정당화하기 위해 단성생식을 핍박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해요. 도덕을 해치지 않는 단성생식이 하나의 성별만 생산한다는 이유로 탄압받는 세태를 한탄하고.”
“어쩐지, 몇 페이지를 넘어가는데 기록된 내용이 그렇게 적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지.”
“……미안해요.”
“그러니까, 우리가 약간의 비약을 더하여 추론하자면 지금의 두-다리들은 자네와 마찬가지로 이 행성 출신이며, 이종교배의 결과물이다, 이건가. 부도덕한 쾌락 없이 얻은 후손이 자네와 같은 클론들이고?”
미연qzw173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매닝은 자신이 신행성의 계급 사회를 일대 위기에 빠뜨릴 기록을 찾아냈음을 직감했다. 지배층이 그렇게 죄악시하는 ‘쾌락’, 그것만 좇는 과정에서 두-다리들이 발생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지극히 불경스러운 주장이었으며, 특히 지금 초과-다리들의 주위를 얼쩡대는 두-다리들의 이유가 그들의 논리처럼 ‘하등한 초과-다리를 구원하기 위한 희생’이 아니라는 근거까지 발굴한 것이다. 정희의 기록이 사실이라면 상위층의 두-다리들은 죄다 비도덕적인 선조의 후손들이었다. 유실된 권리를 어떻게든 다시 누리기 위해 금기를 깬 이들이었고, 그러던 중 운 좋게 번식에 성공했을 뿐이다.
‘내가 이 진실을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일까?’ 매닝은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능력과 정의로움을 믿었으며, 무엇보다 ‘위험하니 묻자, 묻어두자.’라고 되뇌기에는 연인의 표정이 마음에 사금처럼 남았다. 굴곡 없이 매끄러운 얼굴과 빛나는 미소의 미연qzw173. 신행성의 원주민이었던 미연qzw173. 클론들은 모두 여성이었고, 정희의 기록을 읽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만의 단성생식이라 한들 아이를 품고 낳으려면 말이다! 물론 다른 계층끼리의 만남은 원칙적으로 금지됐지만, 두-다리들이 가끔 이른바 ‘아랫것들’과 사귄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니, 이제 두-다리들은 한때 손가락질받은 관계를 만들던 범죄자들, 클론들을 고스란히 닮은 셈이었다. 이 행성의 원래 논리대로라면, 두-다리와 클론의 위치는 뒤바뀌어야 했다. 고귀한 방식을 택한 이들이 지배받는 상황이라니!
그리고 물론, 세상을 뒤엎고 싶은 학자로서의 명예욕이 들끓는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
매닝은 기록을 정리해 자신의 추론과 함께 출판했다. 금세 금서로 지정되었으나 미연qzw173의 도움을 받아 해적판을 여기저기 뿌려 둔 뒤였다. 미연qzw173은 매닝을 클론의 비밀 독서 모임에 초대했다. 똑같은 얼굴의 이들이 어둡고 좁은 거처에 모여 이마를 맞대고 매닝의 기록을 탐독했다. “어찌 그런 기록을 발견하고 또 알릴 생각을 하셨어요”, “정작 언어를 보존하고 있는 우리가 하지 못한 일을 대신……” 이란 말들을 찬탄 어린 눈빛으로 해 주는 것이 까무러칠 정도로 좋아서 매닝은 모임에 지속적으로 참석했다.
그러나 답답한 점들도 있었다. 크뮨이 처음 신행성에 도착했을 때, 클론들이 제대로 된 반격을 못한 채 무력하게 거주지를 뺏겼다고 매닝은 어린 시절에 배웠다. 이번에도 멍청해 뵈긴 마찬가지였다. 왜 얼굴에 분노나 결의가 어리지 않고 미소마저 감도는가. 미연qzw173과 사귀는 것도 그 ‘온화함과 유순함’에 큰 위로를 받아서였지만 매닝은 못내 답답했다. 
“들고 일어나지 않을 겁니까? 저 사악한 두-다리들이 증오스럽지도 않냐고요!” 
매닝이 다리들을 휘저으며 말해도 클론들은 그저 ‘수줍게’ 웃을 뿐이었다. 
그리고 클론들이 걱정한 대로, 어느 날 매닝은 모임을 급습한 두-다리들에게 체포되었다. 죄목은 역사 왜곡과 허위사실 유포. 반란 모의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게 매닝은 더 화가 났다. 너희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업신여김이라고 여겨졌으니까. 그러나 이례적으로 집행이 빨랐으므로 오래 분노할 필요도 방법도 없었다. 매닝은 신행성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는 위성감옥에 수감되었고, 가만히 벽에 다리들을 붙인 채 스크랩의 헤드라인들을 중얼거리며 서서히 미쳐 갔다. 그렇게 세상에서 허무히 잊혀졌다.
 
*
미연qzw173의 주변에서 가끔 매닝을 언급하는 이가 있었다. 그러면 미연qzw173은 하늘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가 그리울 때가 있었다. 그 시절의 즐거움은 확실히 매우 불량스럽고 짜릿했다. 클론끼리 교제할 때는 몰랐던 것들.
물론 다른 클론들에 비해 미연qzw173은 싫증이 빠른 성격이긴 했다. 언제쯤 저 찰거머리를 떼어낼 수 있을까, 고심하던 찰나에 이미 클론들이 다 알아 마지않는 기록, 너무 많이 알려져서 발에 차이도록 방치한 정희의 클리어파일을 매닝이 발견했다며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때 미연qzw173은 마지막 장난의 불씨를 당겼고, 그 장난은 귀찮았던 연인을 편리하게 삭제했다. 미연qzw173은 후련했다. 미안하지는 않았다. 자신의 장난을, 가령 실험실에서 2차원의 세포들을 찌르고 가르며 괴롭히는 3차원 연구자의 행위와 비슷하다고 여겼다. 어차피 그 세포는 상위 차원의 본체를 구성하는 일부이므로 개별적인 삶이 없다는 논지. 정희가 고안할 법한 정희 스타일의 예시를 들자면, ‘예컨대 각 난자의 생애를 논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라는 게 미연qzw173처럼 다른 계급의 연인과 만나고 헤어지는 독특한 취미를 가진 이들의 설명이었다.
“근데 선배, 솔직히 장난이라기에는 이데올로기가 너무 명확해.” 후배의 말에 미연qzw173은 대답했다.
“그게 나빠?”
 

크뮨호가 떠난 후, 인구가 십 분의 일로 줄어 버린 지구에서 마침내 정희의 기록을 처음 발견한 이가 있었다. 국문학과 수학을 복수전공했으며 박사 학위까지 땄으나 결국 그 어느 곳에도 발붙이지 못해 유품정리사로 일하게 된 오미연이었다. 비위와 끈기, 그리고 남 말에 신경 쓰지 않는 능력은 끝내줬다.
이미 이종교배가 빈번해진 시절이었다. 지극히 일상적으로 응원받는 일이었다. 정부는 단성생식을 엄금했다. 차별의 이유는 자명하다고 미연은 생각했다. 이종교배로는 남자가 태어났다. 단성생식은 자궁을 가진 여자만 가능했고 체세포분열과 다를 바가 없었으므로 여자만 태어났다. 그게 차이였다. 밥 먹듯 시위에 나갔으나 소용없었다. 곤봉에나 안 맞으면 다행이었다.
미연은 고독사한 정희의 기록을 읽으며 문득 의문점을 떠올렸다. ‘만약 내가 차원을 하나 높여 4차원에 사는 생물이 된다면, 나를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이 아니니 번식할 수 있을까? 그런데 사실 어느 쪽이든 괜찮지 않을까? 만약 인간이 아니라면 드디어 번식할 수 있을 테고, 만약 인간이라 해도 4차원의 인간이니 번식을 시작하면 3차원…… 3차원의 번식이라면 이 땅의 모두가 그리워하고 갈망하는 바로 그것 아닌가! 어느 쪽이든 4차원의 세계에 발을 들일 수만 있다면 빼앗긴 기쁨을 돌려받는 것, 아닌가?’
국문학과 수학을 전공한 미연. 언어의 모호함과 다양한 해석이 품을 수 있는 힘에 대해서는 빠삭했다. 정의가 분명하지 않다면…… 그러면 이 ‘괴한’은 과연 어떻게 판단할까? 미연은 머리를 굴리다가 생각했다. ‘그렇다면, 옳지, 내가 3차원으로 정의할 수 없는 개체가 되는 데 성공하면, 그렇게 된다면 내가 인간인지 아닌지 그가 다시금 판단하러 올 수밖에 없겠지.’
4차원의 인간이 되는 것 역시 대단히 쉬웠다. “아, 내가 방금 4차원의 인간이 되었어! 그런데 4차원의 인간이 뭐지? 정확한 정의가 뭐야?”라고 물으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정의를 여태 내리지 못한 개념이었으니 가능했다. 미연은 득달같이 달려온 괴한을 만나 끊임없이 대화했다. 사흘 밤낮을 토론한 후 동이 틀 때쯤 합의점에 다다랐고―손색없는 정의는 전혀 아니었다. 다만 괴한이 토론에 지쳐 멋대로 하라며 놓아 버렸을 뿐이다. 미연은 정희의 기록을 읽고 바로 눈치챘던 것이다. 괴한 역시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다는 걸 말이다.―, 그에 따라 미연은 4차원 인간으로 정의되었다. 미연은 제가 좋아하는 이들을 데려와 합의점에 따라 조정했고, 그리하여 4차원 인간은 다수가 되었으며 무리 없이 서로 사귀게 되었다. 특혜는 전혀 아니었다. 4차원 인간의 번식도 한 차원 강등되었으니까. 그러나, 그래서 3차원이었다. 
하여 지금 신행성의 클론들은 모두 4차원 인간으로 정의된 개체들이었다. 미연과 괴한이 합의한 4차원 인간의 정의에 남성이 포함되었다면 분명 두-다리들에게 의심을 살 법했으나,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미연은 어차피 단성생식이 가능해진 이상 복잡한 분류법은 필요 없다고 여겼었다. 그리고 오미연의 얼굴을 한 미연qzw173 역시 제 선조의 마음에 완벽히 동조하는 바였다. 얼마나 훌륭한 선조인가.
크뮨이 다시 돌아온 후의 지구는 더 멋졌다. 클론들만의 지구가 고봉밥밖에 없는 동네였다면 지금의 지구는 새로 생긴 아이스크림 가게와 같았다. 클론들이 굳이 저희끼리 살겠다 죽창 들 이유가 하나 없었던 것이다.
 
“야아, 나 왔어!”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익숙하고 강한 힘이 미연qzw173의 어깨를 잡아 눌렀다. 함께 사는 해은ooz251이었다. 
“나 여덟-다리한테 고백받았다!”
말도 안 돼. 미연qzw173은 눈을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여덟-다리들의 개체는 몹시 드물었고 그래서 인기도 많았다. 미연 역시도 엄청나게 공들인 적이 있었다. 잘 안되고 나서는 그 허탈함에 때려치우고 여덟-다리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그런데 뭐라고? 하늘이시여!
“당장 설명해. 실감나게. 그 어느 디테일도 빼놓지 말고.” 자기자랑이 가장 큰 취미인 해은들의 성향을 잘 아는 미연qzw173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물론 그게 단순히 친구의 기쁨만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해은들은 자랑도 어지간히 했으나, 좋은 것을 남과 나누려는 마음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장단만 살짝 맞춰주면 둥실둥실 위로 떠올라서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단비를 나누는 이들이 그들이었다―미연들의 선조가 해은들의 선조를 동족으로 끌어들인 이유 역시 정확히 그런 호혜성이었다―. 다른 여덟-다리를 소개해줄지 모른다. 간만의 소개팅이라니! 미연qzw173은 기대감에 들떴다.
정말이지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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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설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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