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수학이 바로 그런 표현의 방법이란 걸 배웠다.”
시인을 꿈꾸던 고등학생이 자라 2022년 필즈메달을 수상했다.
한국계 수학자 허준이(39) 미국 프린스턴대 수학과 교수 겸한국고등과학원(KIAS) 수학부 석학교수의 이야기다.
2022년 7월 5일(현지시간) 핀란드 헬싱키에서 개최된 세계수학자대회(ICM)에서 허준이 교수가 필즈상의 영예를 안았다. 필즈상은 수학계에 중요한 공헌을 한 40세 미만의 수학자에게 주는 상이다. 허 교수는 대수기하학을 통해 조합론의 여러 난제를 해결하고, 대수기하학의 새 지평을 연 공로를 인정받았다.
허준이 교수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그의 부모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태어났다. 두 살 때부터 한국에서 자란 허 교수는 대학원 석사까지 한국에서 마쳤다. 또 한국 고등과학원 수학부 석학 교수로 매년 여름마다 활동하고 있다. 대한민국 수학계가 허 교수의 수상에 함께 기뻐하는 이유다.
과학 기자 꿈꾸며 물리천문학과 진학
그는 여느 수학자와는 다른 학창 시절을 보냈다. 시인이 되고자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력이 대표적이다. 또한 소위 말하는 ‘올림피아드 키즈’도 아니다. 허 교수가 천체물리학 전공을 선택한 이유도 지극히 현실적이다. 7월 6일 언론 브리핑에서 허 교수는 “글로 밥벌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했다. 과학에 흥미를 느끼고 있으니 과학 기자가 되려고 했다. 물리천문학과는 과학 기자가 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진학했다”고 말했다.
수학에 매력을 느낀 것은 대학 3학년 때 일이다.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던 당시, 우연히 위상수학 강의를 듣고 수학의 매력에 반했다. 다음 해 1970년 필즈상을 수상한 히로나카 헤이스케 하버드 명예 교수의 서울대 초빙 강의를 듣고 더욱 깊이 수학에 빠져들었다. 20대 중반의 일이다.
수학자가 되기까지 꼬불꼬불한 길을 거쳐온 것 같지만, 허준이 교수는 자신의 삶이 가장 빠른 길이라 자평한다. 허 교수는 수학자로서 자기 자신의 강점으로 ‘언어를 다루는 능력’을 꼽았다. 7월 13일 강연에서 “수학과 같은 기초학문은 물론 이공계 어느 분야에서든 언어를 다루는 훈련은 생각할 줄 아는 힘이 된다”며 그 이유를 밝혔다. 허 교수가 시인을 꿈꾸던 시간이 있었기에 필즈 메달 수상이라는 성과를 낼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동료’ 덕분에 선택한 ‘조합 대수기하학’
허준이 교수의 연구 분야는 조합 대수기하학이다. 조합 대수기하학은 대수기하학을 통해 조합론의 난제를 해결하는 수학 분야다. 조합론에서는 주어진 조건을 만족하는 수를 세는 문제가 탐구의 대상이다. 쉽게 말해 ‘경우의 수’다. 대수기하학은 방정식을 통해 도형이나 공간의 성질을 연구하는 수학 갈래 중 하나다.
‘동료 연구자’는 허 교수가 조합 대수기하학 연구를 하게 된 계기였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가 수학에 매력을 느끼는 이유다. 허 교수는 서울대 수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유학을 갔을 때만 해도 조합론이 무엇인지 몰랐다. 미국에서 조합론에 애정을 갖고 연구하는 동료 연구자들을 만나고 나서 관심을 갖게 됐다.
허 교수는 7월 6일 언론 브리핑에서 “(동료들과 함께 연구하면) 더 멀리 갈 수 있고 더 깊게 고민할 수 있다”며 “그 과정이 수학 연구자에게 큰 기쁨”이라고 말했다.
행운은 일찍 찾아왔다. 박사 1년차에 오래된 조합론 분야 난제였던 ‘리드 추측’을 증명해 냈다. 허 교수는 ‘수학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이 성과를 두고 “문제를 풀기 전에 해답을 만난 운 좋은 케이스”라 평했다. 석사 시절 대수기하의 특이점 이론 분야를 공부를 하며, ‘거시적 구조에 있어서도 비슷한 이론을 개발할 수 있지 않을까’ 짐작해왔는데, 리드 추측 얘기를 듣고 특이점 이론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걸 간파했기 때문이다.
“화성에서 생명체를 발견한 수준”
현재까지 허 교수가 해결한 추측은 무려 11개에 달한다. 수학에서 추측이란 ‘맞다고 여겨지지만, 아직 증명되지 않은 명제’를 뜻한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은 추측은 어려울 난(難)자를 써 ‘난제’라고 불린다.
허 교수의 학사 및 석사 지도교수인 김영훈 서울대 수학과 교수는 허 교수의 연구를 두고 “대수기하학과 조합론 모두에 정통한 수학자만이 시도할 수 있는 매우 어려운 연구”라고 설명했다. 허 교수가 ‘조합 대수기하학의 아이콘’이라 불리는 이유다.
또 김영훈 교수는 허 교수의 업적에 대해 “화성에서 생명체를 발견한 것과도 같은 성과”라고 평가했다. 기하학에서 중요한 연구 대상인 사영다양체를 거치지 않고, 사영다양체의 교차이론에서 나오는 기하학적 구조가 매트로이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해냈기 때문이다.
조합론의 그래프나 매트로이드는 정보통신, 반도체 설계, 교통, 물류, 기계학습과 같은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된다. 허 교수의 연구는 이 매트로이드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 받는다.
노벨상보다 받기 어려운 필즈상
국제수학연맹(IMU)은 4년마다 주최하는 세계수학자대회에서 필즈상을 수여한다. 필즈상은 수학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상이다.
1924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제 7차 세계수학자대회에서 당시 조직위원장이었던 수학자 존 찰스 필즈가 국제적인 수학상을 제정하자고 제안했다. 이후 1932년 취리히 세계수학자대회에서 수학상이 제정됐다. 제정에 헌신한 수학자 존 찰스 필즈를 기리기 위해 상의 이름은 필즈상이라 정해졌다. 필즈상은 1936년 오슬로 세계수학자대회에서 처음 수여됐다.
필즈상은 수학계 노벨상이라고도 불린다. 하지만 필즈상은 노벨상보다 더 받기 어렵다. 매년 시상식이 열리는 노벨상과 달리 필즈상은 4년에 한 번씩 수여할 뿐만 아니라 공동 수상자의 인원도 최대 4명으로 제한되기 때문이다.
특히나 수상자 나이에 제한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만 40세가 넘으면 아무리 뛰어난 수학자라도 필즈상을 받을 수 없다. 나이 제한은 국제적 수학상이 장래에도 계속 좋은 성과를 내도록 장려하길 바랐던 필즈의 뜻을 따른 것이다. 실제로 국제수학연맹 소속 집행위원회는 기존의 학문적 성과와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살펴 필즈상 수상자를 선정한다.
세계수학자대회는 필즈상 외에도 네반리나상, 가우스상, 천 메달을 시상한다. 네반리나상은 정보과학, 가우스상은 공학·응용수학, 천 메달은 기하학 분야에 업적을 세운 수학자를 선정해 각각 수여한다.
허준이 교수가 해결한 난제 │ 어디에나 있는 ‘로그-오목’을 증명하다
허준이 교수는 어떤 문제들을 풀었을까? 허 교수가 필즈상을 수상한 당일, 김영훈 서울대 수리과학부 교수가 동아사이언스 온라인 클래스에서 허 교수의 연구 내용을 설명했다.
김영훈 교수는 허준이 교수의 학·석사 지도교수다.
허준이 교수가 해결한 대표 난제인 리드 추측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리드 추측은 일반적인 그래프의 채색다항식에 등장하는 계수의 절댓값이 ‘단봉패턴’을 보인다는 가설이다. 절댓값이 증가하다 감소한다는 거다.
1968년 영국 수학자 로널드 리드가 제기했다. 허준이 교수는 대수기하학의 ‘특이점 이론’으로 그래프가 단봉패턴을 보이는 이유를 설명했다.
■리드추측은 1852년에 제안된 4색 정리 문제에서부터 시작한다. 4색 정리는 지도 위의 모든 나라를 색칠하는데, 네 가지 색으로 인접한 나라끼리 색이 겹치지 않게 칠하는 것이 가능한지 따지는 문제다.
■평면 그래프를 활용하면 4색 정리 문제를 이해하는 데 편리하다. 각 나라를 점으로 표시하고 인접한 두 나라끼리 선을 긋는다. 이를 통해 지도마다 하나씩 그래프를 얻는다. 하나의 꼭짓점에 연결된 모든 꼭짓점을 다른 색으로 칠하는 데 4색이면 충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채색 다항식은 어떤 그래프에서 꼭짓점을 q개 이하의 색으로 칠하는 방법의 수를 나타낸 식이다. 이때 이웃한 꼭짓점은 서로 다른 색이 돼야 한다. q가 4일 때 채색다항식의 경우의 수가 하나 이상 있다는 것이 4색 정리가 된다. 1932년 조지 볼코프와 해슬러 휘트니가 정리했다.
로그-오목 관련 추측
허준이 교수는 리드 추측을 강화한 리드-호가 추측을 시작으로 여러 조합수학 문제에서 나타나는 로그-오목성을 증명했다.
• 리드-호가 추측 : 그래프의 채색 다항식의 계수들은 로그-오목이다.
• 메이슨-웰시 추측 : 벡터 집합의 특성 다항식의 계수들은 로그-오목이다.
• 로타 추측 : 매트로이드에서 유추되는 다항식 계수도 로그-오목 성질을 가진다. 1971년 미국의 수학자 잔카를로 로타가 리드 추측을 일반화해 제시한 문제다. 허준이 교수는 대수기하학의 ‘호지 이론’을 통해 로타 추측을 증명했다.
※오목로그란.
로그-오목은 계수에 로그를 씌웠을 때 오른쪽 그림과 같이 오목한 형태를 보이는 성질을 뜻한다. 로그-오목은 절댓값 단봉 패턴을 포함하는 더 넓은 성질이다. ʻ리드-호가 추측’ ʻ메이슨-웰시 추측’
ʻ로타 추측’ 등을 해결한 허준이 교수는 로그-오목 성질이 서로 연관이 없어 보이는 대상에서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증명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