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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동아 x 쿤달] 제조기│우주에 없던 향을 만들다

[특집] 이 향에 지구의 기억을 담을 수 있다면

지난해 11월, 과학동아는 퍼스널케어 브랜드 쿤달과 ‘과학동아의 향’을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쿤달은 50여 개의 향으로 샴푸, 핸드크림, 디퓨저, 섬유유연제, 칫솔 등을 만드는 기업인 더스킨팩토리의 대표 브랜드다. 얼핏 보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 두 곳이 어디에서도 시도한 적 없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4달 동안 수차례의 회의와 취재, 촬영을 진행하는 동시에 사이언스 보드를 통해 향에 대한 독자들의 의견을 모았다. 그리고 2월 14일, 과학동아와 쿤달이 만든 향 ‘창백한 푸른 점’이 핸드크림의 형태로 세상 밖에 나왔다.

 

콘셉트 결정
‘창백한 푸른 점’을 떠올리다

 

“그래서…. 과학동아의 향은 무엇일까요?”


지난해 11월, 서울 강남구 더스킨팩토리 사옥에서 개최된 첫 회의. 모두의 표정에 막막함이 역력했다. ‘우주의 향은 어떨까?’ ‘우주엔 향이 없는데.’ ‘그럼 지구의 향은?’ ‘그래 지구의 향을 만들어 보자.’ ‘그런데 지구의 향이 뭔데?’


수많은 아이디어의 바다에서 헤엄치던 그 순간. 먼 우주에서 바라본, 우주에서 기억하는 지구의 향을 만들어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냄새는 뇌로 하여금 과거를 떠올리고 추억하게 하는 대표적인 매개체다. 만약 먼 미래에 지구를 떠나면서 지구를 기억할 매개체 하나를 가져간다면, 향기가 가장 적합해 보였다.


곧이어 ‘창백한 푸른 점’이란 단어가 수면 위로 올라왔다. 태양계 탐사를 떠난 보이저 1호가 지구로부터 약 60억 km 떨어진 명왕성 궤도에서 1990년 촬영한 지구 사진에 천문학자 칼 세이건이 붙인 이름이다. 이 사진에 담긴 지구는 희미한 푸른 빛을 띠고 있었다. 세이건은 지구에 흰 구름이 있어 진한 푸른색이 아닌 창백한 푸른색이라고 했다. 이후 창백한 푸른 점은 우주 속 지구를 부르는 하나의 고유명사가 됐다.


11월 19일, 마침내 이름과 콘셉트가 정해졌다. 먼 훗날 지구를 떠난 후손에게 과거 지구의 향수(鄕愁)를 불러일으킬 향이다. 그 향,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콘셉트 향 구체화
스토리와 메시지를 만들다

 

다음 단계는 이름과 콘셉트를 어떤 향으로 표현해야 메시지를 가장 잘 전달할지 고심하는 단계다. 향을 배합하는 조향사들은 보통 만들고자 하는 향을 떠올린 뒤 이름을 붙이고 향을 제작한다. 이때 주로 본인이 기억하는 향을 떠올리며 그와 어울리는 향들을 찾는다. 


하지만 이번에 제작하는 창백한 푸른 점은 알고 있던 향이 아닌, 상상해서 만들어 내야 하는 향이었다. 조향사들에게도 도전적인 과제였다. 조향에 참여한 최민지 더스킨팩토리 제품마케팅팀 조향사는 “창백한 푸른 점을 표현하기 위해 상상력을 100% 발휘해 향에 대한 이미지를 구현했다”고 말했다. 이럴 때 조향사들은 영화, 음악 등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최 조향사 역시 “평소 좋아하는 우주 SF 영화에서 영감을 많이 받았다”며 “예를 들어 ‘인터스텔라’에서 블랙홀로 사람이 빨려 들어가는 장면, ‘그래비티’에서 우주 속을 표류하는 장면 등을 떠올리며 어떤 향이 어울릴지 고심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새로운 행성에 도착해 생명의 소중함을 얘기하는 장면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얻었다”며 “지구의 소중함, 인간과 자연의 생명력 등 지구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요소들을 고민했다”고 설명했다. 


201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별과 행성, 우주와 외계를 노래한 데이비드 보위의 음악에서도 영감을 받았다. 최 조향사는 “‘스페이스 오디티’라는 노래를 들으면서 우주에 있는 상황을 상상했고, 이때 어떤 향이 날지 생각했다”고 말했다.


조향사로 참여한 노현준 더스킨팩토리 대표는 자연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노 대표는 “먼 훗날 다른 행성에서 지구를 기억한다고 상상해봤다”며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담은 지구, 원시림의 이미지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향의 스토리와 메시지는 정해졌다. 그렇다면 이 향을 담을 제품에 대한 고민을 할 차례다. 고심 끝에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이용할 수 있는 제품인 핸드크림으로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핸드크림 용기 디자인, 패키지 디자인, 패키지 재질까지 향 콘셉트에 맞춰 특별히 제작했다.

 

 

 샘플 향 제작
분자 크기를 고심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향을 만든다. 조향사들이 여러 향료를 배합해 콘셉트에 맞는 향을 찾는 과정이다. 합성 향료는 5000가지, 천연향료도 200가지가 넘는다. 국내의 한 향료공장 관계자는 “수천 종의 향료가 있기에 이를 조합하면 사실상 만들지 못하는 향은 없다”고 설명했다. 


하나의 향을 제작할 때 약 100여 개의 향료가 사용된다. 다양한 향료가 섞이지만, 기본적인 구성은 ‘공식’처럼 존재한다. 톱노트, 미들(하트)노트, 베이스노트 3가지 층이 기본이다.


톱노트는 향을 처음 맡았을 때 첫인상을 만드는 향이다. 미들노트는 톱노트가 서서히 사라진 뒤 30분~1시간 사이에 올라오는 향이고, 베이스노트는 5~6시간까지 지속하는 향이다. 각 노트에 포함될 수 있는 향의 종류는 정해져 있는데, 이는 분자의 크기에 따라 나뉜다. 분자가 작을수록 향이 확산되는 속도가 빨라진다.


분자 크기가 가장 작은 톱노트에는 오렌지, 자몽을 비롯한 시트러스 계열의 향이 속한다. 대부분의 과일 향이 톱노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미들노트에는 꽃향기 계열이 많다. 베이스노트에는 갈바닉, 우디, 머스크 등의 ‘무거운’ 향이 담긴다.


창백한 푸른 점의 콘셉트에 맞게 톱, 미들, 베이스노트를 다양하게 배합해 샘플 향 15가지를 제작했다. 나무 향기를 강조한 향, 싱그러운 식물이 연상되는 향긋한 향 등 다양했다. 


보통 쿤달은 새로운 향을 출시하기 전 직원들을 대상으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한다. 선호도뿐만 아니라 발향 정도 등 다양한 항목으로 나눠 고심 끝에 향을 선택한다. 이번에는 과학동아와 쿤달이 이 과정을 함께했다. 11월 24일, 이 가운데 콘셉트에 가장 부합하는 향 3가지를 선택해 핸드크림 샘플 제작을 시작했다. 

 

 

핸드크림 향 구현
제형·제품마다 ‘공식’이 다르다

 

향료는 향수 외에도 핸드크림, 샴푸, 옷장 방향제, 디퓨저 등 다양한 생활용품에 들어간다. 같은 향을 만들어도 어떤 제품을 만드느냐에 따라 향의 의도를 살리는 방법은 다르다. 고체, 액체 등 제형에 따라서도 다르게 발향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종종 같은 향도 어떤 제품에 함유되느냐에 따라 다른 향으로 느껴질 수 있다. 원료 고유의 향(특이취)도 영향을 미친다. 조향사들은 이 향을 포함해 조화가 잘 이뤄지도록 만든다.


향료의 함량 비율도 제품에 따라 달라진다. 향수나 방향제 같은 제품은 향을 강조하는 제품이기 때문에 향료의 비율이 높다. 샴푸, 바디워시 등 세정제품도 향료 함량이 높다. 이들은 세정력을 위해 계면활성제를 많이 사용하는데, 계면활성제는 특이취가 강해 이를 가리기(마스킹) 위해 향료를 더 함유한다. 안 좋은 냄새가 나는 성분을 다공성 물질에 흡착시켜 없애기도 한다.


반면 로션, 크림과 같은 보습 제품은 오일, 왁스 등 보습 성분을 함유하고 있는데, 보습 성분은 특이취가 거의 없어 향료를 조금만 포함해도 본래 향의 의도가 산다. 


다만 핸드크림에 향을 섞어 제품으로 만들었을 때, 재질 때문에 의도하지 않은 향으로 변할 수 있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핸드크림 향을 만들 때는 크림 재질에 영향을 주는 성분은 애초에 제외한다. 향의 지속성을 높이기 위한 기술도 쓰인다. 향을 캡슐에 넣어 만드는 기술이 대표적이다. 제품을 사용할 때 캡슐이 터져 향이 발산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지난해 12월 3일 과학동아와 쿤달이 선정한 3가지 향으로 3개의 핸드크림 샘플이 제작됐다.

 


 

‘창백한 푸른 점’ 향 제작
첫 향은 싱그럽게, 끝 향은 묵직하게

 

3가지 핸드크림 샘플로 과학동아와 쿤달은 다시 테스트를 진행했다. 테스트 결과 의견이 갈릴 경우에는 조향사의 목소리가 좀더 강하게 반영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하나의 샘플이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얻었다.


최종 결정된 향은 지구의 느낌을 살려 싱그러운 과일과 향긋한 꽃, 그리고 자연의 향을 조화롭게 담았다. 톱노트에는 레몬 향과 오렌지 향, 미들노트에는 뮤게(은방울꽃) 향과 재스민 향, 베이스노트에는 우디 향과 머스크 향이 담겼다. 이 샘플을 토대로 창백한 푸른 점의 향과 핸드크림 제품 생산이 시작됐다.


물론 이들 향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모두 실제 원액만 사용되는 것도 아니다. 화학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과거에는 순수 원액만을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생산 비용, 재배 여건 등의 이유로 이용할 수 있는 천연 원료는 한정돼 있다. 특히 수컷 사향노루의 사향샘(머스크) 향 등 동물에게서 향료를 채취하는 것은 현재엔 금지돼 있다. 


현대에는 여러 가지 합성 향료를 조합해 특정 향을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딸기 향은 라즈베리 케톤(Raspberry ketone)이라는 합성 향료를 사용하고, 복숭아 향은 피치 알데하이드(Peach aldehyde)라는 합성 향료를 사용한다. 물론 딸기 향, 복숭아 향은 적용되는 제품의 속성에 따라 다양하게 만들기 때문에 사용하는 항이 정확히 하나로 정해져 있지는 않다. 


국내의 한 향료공장 관계자는 “천연향료가 무조건 좋고 합성 향료는 좋지 않다는 편견이 있다. 하지만 오히려 합성 향료가 성분이 균일하고 안정화된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향 조정
망친 조향도 살리는 비법의 특제 향

 

이번 조향은 성공적으로 이뤄졌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본래 의도를 잘 살리기 위해 향을 추가하거나 발향을 줄이는 과정이 추가될 때도 있다. 조향사가 향료를 배합하기 때문에 특별히 불쾌한 향이 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그래도 분명 조화가 잘 이뤄지는 향이 있고, 이뤄지지 않는 향도 있다.


만약 조화가 잘 이뤄지지 않을 때엔 미들노트에 속하는 라벤더, 재스민 등을 쓴다. 망친 조향도 살릴 수 있는 향료계의 특제 소스 같은 존재다. 특히 라벤더는 이런 이유로 ‘만인의 오일’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창백한 푸른 점의 미들 노트에는 재스민이 포함됐다. 


원액 자체는 향이 좋지 않지만 한두 방을 소량으로 이용할 때 배합된 향을 훨씬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향료도 있다. 마치 감초 역할을 하는 이 향료는 클로브다. 원액을 맡았을 때는 흔히 치과 냄새로 알고 있는 강렬한 향이 난다. 공포의 순간이 저절로 떠오를 만큼 무서운 향이지만, 소량으로 이용하면 신선하고 상쾌한 향을 만들 수 있다. 

 

제품 테스트
지구의 향을 맡았다

 

원하는 향을 생산한 뒤에는 향취 테스트를 한다. 테스트 방법은 제품마다 다르지만, 향에 대한 조화와 발향, 잔향 확인은 반드시 포함된다.


쿤달은 자체적으로 기술 향기 전문 연구소를 보유하고 있다. 이곳에서 연구원들은 제품에 향을 부여했을 때 변색, 변취 과정을 기록하고 특징점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특히 제품의 기본 성분에 따라 향이 변할 때가 있어 변취 테스트는 중요하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지난 2월 14일 마침내 창백한 푸른 점이라는 향을 담은 핸드크림이 탄생했다(94쪽). 최 조향사는 “의도한 대로 원시림이 우거진 식물의 향이 모두 조화롭게 느껴지는 향이 완성됐다”고 밝혔다. 

 

●INTERVIEW "향기로 기억하는 매력적인 일"

_최민지 조향사 (더스킨팩토리 제품마케팅팀)

 

왜 조향사가 됐나요.

향기로 기억한다는 점이 매력적이었어요. 비 오기 전 특유의 냄새를 좋아하는데, 이를 향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실제로 향을 만들 때도 향에 대한 이미지를 먼저 구상한 뒤 그 이미지에 어울리는 향들을 찾아 향을 구성합니다.

 

조향사가 되려면 어떻게 하나요.

선천적인 후각 능력이 발달해 있으면 가장 유리하겠죠. 그러나 후각 훈련을 통해 연습하면 누구나 조향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습니다. 쿤달에서는 조향을 배울 수 있는 ‘퍼퓨머리 아카데미’ 운영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향사 시험은 어떻게 진행되나요.

약 50가지 기본 향을 담은 전용 키트가 있는데 기본적으로 각각 어떤 향이 나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두 가지 이상의 향을 섞었을 때 어떤 향들이 조합돼 있는지 구분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만의 향 기억법을 찾는 게 중요해요.

 

여러 가지 향을 맡으면 구분이 안 될 것 같은데요. 

조향사들은 여러 가지 향을 연달아 맡을 때 냄새가 섞이지 않도록 다양한 방법을 이용합니다. 코가 피로해졌을 때 커피 가루, 섬유 등의 향을 맡는 경우도 있죠. 자기만의 방식을 이용하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호랑이 연고’를 바릅니다. 아무래도 향을 많이 맡게 되면 코가 막히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일시적으로 콧속을 뚫기 위해서요.

 

코 관리법이 따로 있나요.

저는 잠들기 전에 매일 코세척을 하고 자요. 겨울에는 가습기를 필수로 사용하고요. 코가 건조해지면 향을 구분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죠. 코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체력관리를 필수로 하고 있습니다.

 

조향사의 필수 요건이 있다면요.

체력과 정신력이요. 실제로 조향사 멘탈 관리를 해주는 회사도 있어요. 조향사의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같은 향도 다르게 느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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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과학동아 정보

  • 조혜인 기자
  • 사진

    남윤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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