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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릇푸릇한 수초와 그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 물안개 사이로 솟아난 거대한 나무, 나뭇가지로 우거진 정글, 바위로 뒤얽힌 동굴. 이처럼 물속 풍경을 수조에 구현한 작품을 ‘아쿠아스케이프’라 부른다. 자연의 한 부분을 잘라내 옮겨놓은 듯한 모습을 수조에 담아내기 위해 아쿠아스케이프 작가들은 거칠고 험난한 작업 과정을 이겨낸다.
정인식 아쿠아스케이프 작가의 도구함
국내 대표적 아쿠아스케이프 작가 중 한 명인 정인식 작가는 수경가드너협회(AGA)가 개최한 2020 국제 아쿠아스케이핑 콘테스트에서 작품 ‘작은 시냇물(Small Stream)’로 최상위 10명에 해당하는 ‘톱10’에 선정됐다. AGA는 정 작가의 작품에 대해 “자연스러운 느낌을 구현한 수조 중 최고의 작품일 것”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정 작가의 작업실 책상에는 수술을 앞둔 의사가 쓸 법한 핀셋, 가위 등의 도구가 놓여있다. 이 도구로 수초를 심고, 다듬고, 어항을 유지한다. 적재적소에 활용하기 위해 같은 도구라도 크기가 다양하게 구비돼있다. 어항 아래엔 강과 호수에서 수질을 정화하는 미생물을 수조에서 키워내기 위해 미세 구멍이 뚫린 여과재가 잔뜩 들어있는 여과기를 설치한다. 여과재 구멍 사이에 미생물이 자리 잡고 물속 유기물질을 정화한다. 정 작가는 “제주에서 수초를 공수해오고 절벽 아래서 돌을 주워오는 등 자연환경을 수조 속에 구현하기 위해 전국을 누빈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나미비아의 세스리엠 캐년은 길이 1km, 깊이 30m의 작은 협곡이다. 약 1500만 년 전 강물이 흐르던 곳으로 긴 시간에 걸쳐 물이 빠지면서 모래와 자갈이 퇴적돼 독특한 지형을 만들어냈다. 약 200만 년 전 대륙이 융기하면서 마침내 그 절경을 드러냈지만, 이제는 둔탁한 돌덩이만 남아있을 뿐이다.
이 같은 절경을 실내에 고스란히 전한 예술가가 있다. 국내 대표적 ‘아쿠아스케이프’ 작가 중 한 명인 이영주 작가다. 그는 세스리엠 캐년의 모습을 어른 두 명이 들어갈 규모의 큰 수조(180×55×55cm) 속에 정교하게 옮긴 작품으로 지난해 세계적인 아쿠아스케이프 대회인 국제수생식물레이아웃콘테스트(IAPLC)에서 22위를 차지했다. 국내 작품으로는 역대 가장 높은 순위였다. 심사위원들은 이 작가의 작품이 “척박한 땅에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물길을 터주고, 수초를 심어 자연의 숨도 함께 불어 넣었다”고 평했다.
물 속 풍경을 빚다
아쿠아스케이프는 물(aqua)과 풍경(scape)의 합성어다. 수생 식물이 만들어내는 경관을 중심으로 수조를 꾸민 작품을 가리킨다. 나뭇가지로 우거진 정글, 바위로 뒤얽힌 동굴, 푸릇푸릇한 수초와 그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물고기 등이 어우러져 아쿠아스케이프가 된다. 특정 서식지나 생태계를 똑같이 구현하는 데 중점을 둔 ‘비오톱’, 해수와 산호초로 이뤄진 ‘해수 어항’, 습지 생태계를 재현한 ‘팔루다리움’ 등 재료와 스타일에 따라 종류도 다양하다.
아쿠아스케이프는 역사가 오래됐다. 일본 풍속화가 이소다 고류사이의 1775년 작품 ‘고양이와 어항’에는 금붕어가 가득한 어항을 들인 집안 풍경이 묘사돼 있다. 이미 300여 년 전부터 실내에 관상용 어항을 두고 생활하는 사람이 꽤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19세기에는 과학과 기술의 도움을 받아 더욱 정교한 ‘물 생활’이 가능해졌다. 단단한 유리 수조와 기계식 공기 주입기 등이 개발됐다. 이들은 원래 수생 식물을 연구할 목적으로 쓰였지만, 산업혁명으로 공산품을 대량 생산하고 항공편으로 화물을 실어 나르면서 실내에 수조를 두고 기르는 생활이 보편화됐다. 하지만 이때까지의 어항은 오직 어류를 위한 공간이었을 뿐, 물이 있는 공간이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식물은 없었다.
식물이 주인공인 현대적인 아쿠아스케이프는 1930년대에 등장했다. 네덜란드에서 어류가 아닌 수생 식물의 성장과 배열에 초점을 둔 정원의 모습을 담은 수조가 처음 만들어졌다. 네덜란드 양식 아쿠아스케이프에서 물고기는 수조의 주인공이 아닌 조연, 필수 요소가 아닌 선택 사항이 됐다.
20세기 후반에는 일본에서 새로운 아쿠아스케이프가 등장했다. 아쿠아스케이프 작가 아마노 다카시가 식물 외에 바위와 유목과 같은 재료를 더해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수조에 담았다. 극단적으로는 수초나 물고기 없이 암석 또는 나무만으로 이뤄진 수조도 있었다. 이런 형식은 자연주의 또는 일본 양식이라 불리며 네덜란드 양식과 함께 아쿠아스케이프 디자인의 양대산맥을 형성했다.
국내에서는 2019년 한국수경예술학회(KAA)가 설립되면서 단순 취미로만 즐기던 아쿠아스케이프 작가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고, 국내외 대회를 통해 뛰어난 작품성을 지닌 작품을 선보이며 서서히 주목받고 있다.
화려한 작품은 톱질, 식재, 기다림에서 탄생
아쿠아스케이프 작품에는 풀의 움직임이 만드는 최소한의 소리만 담겨있다. 수조 속의 세상은 무척 정적이고 평화로워 보인다. 역설적으로, 이 모습은 험난하고 격렬한 과정을 통해서 비로소 탄생한다.
아쿠아스케이프 작업은 작품 구상, 하드스케이핑, 수생 식물 환경 조성 순으로 이뤄진다. 하드스케이핑은 작품을 구상한 뒤 수조에 물을 주입하기 전에 수초, 유목, 바위 등을 이용해서 수조의 뼈대를 잡는 과정이다. 패션 디자인을 전공한 조진선 아쿠아스케이프 작가는 이 과정이 여느 미술 작업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는 “입체적인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며 “유목과 돌을 배치해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각양각색의 수초를 키워 색채를 구현하는 과정이 마치 캔버스 위에 윤곽선을 스케치하고 채색하는 과정과 닮았다”고 설명했다.
하드스케이핑의 기본은 재료다. 작가들은 원하는 재료를 얻기 위해 국제 사이트를 뒤져 해외에서 들여오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지난해 수경가드너협회(AGA)가 개최한 2020 국제 아쿠아스케이핑 콘테스트에서 최상위 10선(톱10)에 선정된 작품 ‘작은 시냇물’을 제작한 정인식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봐 온 주변 자연환경을 어항에 구현하기 위해 제주에만 서식하는 수초를 공수해오고 낙동강에서 물고기를 채집했다”라고 말했다. 정 작가는 “이렇게 발로 뛴 결과 올챙이풀, 제주피막이, 가는마디꽃 등의 수초를 모았고, 참중고기, 쉬리, 모래무지 등의 물고기를 작품에 표현할 수 있었다”라고 밝혔다.
돌과 나무도 마찬가지다. 모양에 따라 수조의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긴 시간 풍화돼 모서리가 둥근 돌을 줍기 위해 강물에 들어가는 것은 일상이다. 각진 돌을 공수하기 위해 절벽 아래까지 내려가기도 한다.
수조라는 닫혀있는 공간 안에 원하는 모습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공수해온 재료를 작게 부순 뒤 다시 합치는 작업이 이어진다. 이 작가는 “작품 속 유목은 모두 작은 나뭇가지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들어 낸 것”이라며 “커다란 바위도 작게 깨부순 돌 조각들을 조각해 합쳐야 원하는 모습을 구현할 수 있다”라고 설명했다.
하드스케이핑이 끝나면 수초를 키우는 작업이 시작된다. 수초에는 여러 종류가 있기에 이들의 생태적 특성을 정확히 파악하는 일이 중요하다. 줄기가 땅 위를 기어가며 뿌리를 내리는 수초, 유목이나 돌에 붙어 자라는 수초 등을 각 특성에 맞게 모양을 잡아준다. 심는 방법도 고심한다. 뿌리로 번식하는 식물은 빛이 강한 곳에 흙과 함께 심어야 한다. 이끼, 양치류 등 착생 식물은 빛이 적게 드는 그늘진 곳이나 동굴 속에 둔다. 착생 식물은 흙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 바위나 유목 위에 붙여도 옆으로 퍼져나가며 잘 자라는 특성이 있어 비교적 다루기 쉽다. 이끼 역시 자라는 환경에 맞춰 서식 환경을 조성한다.
이렇게 계획하고 수집한 수초는 종류와 성장 속도를 고려해 심는다. 천천히 자라는 수초부터 빨리 자라는 수초 순으로 심는다. 대회 출품작은 대개 30~40가지 수초를 4~5차례에 걸쳐서 심는다. 이 작가는 “수초마다 성장 속도가 다르고, 환경에 따라 성장하는 모양이 달라 수차례에 나눠 수초를 심고, 관리한다”라면서 “마치 수조에서 자라나 생태계를 구성한 것처럼, 자연에서 자라는 식물 모습 그대로를 유지하고 키우는 것이 중요하다”라고 밝혔다.
하드스케이핑 이후 수조 속 수초가 자라 자리를 잡기까지는 통상 4달 정도가 소요된다. 조 작가는 이 과정을 “성장과 치유의 시간”이라고 표현했다. 기다리고 인내하는 과정에서 작가 스스로 내적인 치유를 경험한다는 뜻이다. 그는 “아쿠아스케이핑을 막 시작했을 때는 이끼가 번식하거나 갈조가 오는 등의 사건이 생기면 약품을 넣어보는 식으로 인위적인 개입을 했다”며 “하지만 이제는 과잉보호하지 않고 어항이 자생할 수 있도록 기다려준다. 이 같은 기다림이 가장 어려운데, 이런 과정을 거쳐 ‘물이 잡힌’ 어항을 멍하니 바라보면 치유되는 기분이 든다”라고 말했다.
과학으로 자연 그대로의 생태계 조성
아쿠아스케이프 작품에서 식물은 그저 장식이 아니다. 장기적으로 그 수조에서 생존하고 번성해야 하는 생명이다. 이를 위해 아쿠아스케이프 작업에는 물속 생태계를 유지하기 위한 과학적, 공학적 지식이 필요하다. 설치미술 작가 겸 아쿠아스케이프 작가로 한국수경예술학회를 설립한 조재선 회장은 “제아무리 미적인 모습에 중점을 둔 작업이라도 지속 가능한 수조를 만들어야 한다”라며 “무엇보다 생물의 생육 환경이 최적화돼야 한다”라고 설명했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이영주 작가 역시 “물 생활에는 모든 과학이 집합돼 있다”라며 “물 순환에 대한 화학 지식, 물고기를 다루는 생물학 지식, 수초 속에 서식하는 미생물에 관한 과학적 지식, 여과기, 조명 등에 대한 전기공학 지식까지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조 안 질소 순환시스템을 만드는 일이다. 식물은 토양 속 질소를 질산이온 형태로 흡수하고 산소를 방출한다. 물고기는 이 산소를 통해 호흡하고 이산화탄소와 영양분을 배설해 수초의 양분을 만든다. 수조 속에 질소와 인을 포함한 영양분이 많아지면 부영양화로 조류가 다량 피어날 수 있어 용존산소량을 일정하게 유지해야 한다.
이산화탄소가 충분히 공급되지 않을 경우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수조 속 산소 균형을 유지하는 역할을 할 수 없다. 아마노 작가는 그의 에세이에서 이산화탄소 공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수초가 잘 자라지 않아 고민하던 그가 우연한 계기로 탄산수 5병을 수조에 부었고, 그 결과 5분 만에 잎사귀에 기포가 생기는 현상을 발견했다. 최근에는 공급 장치를 이용해 이산화탄소를 주입하기도 한다. 그밖에 수초가 가장 잘 자라는 pH(수소이온농도) 6.8를 유지할 수 있도록 물의 성질을 변질시키지 않는 바위 재료도 신중히 선택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질소 순환시스템을 균형적으로 맞췄을 때 비로소 ‘물이 잡혔다’고 말할 수 있다. 조 회장은 “아쿠아스케이프 대회의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은 작품의 장기 유지 가능성”이라며 “수중에 쓸 수 없는 식물을 미적인 용도로만 잠시 심어 두는 것은 아쿠아스케이프의 의미가 없다”고 설명했다. 그는 “관리가 될 수 있는 구조인지, 생물이 서식하는 환경이 잘 조성돼 있는지 등이 아쿠아스케이프의 중요한 요소”라며 “아쿠아스케이프는 자연의 한 부분을 옮겨놓은 듯이 생태계를 구현하는 게 핵심”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