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만 5500년 전 그려진 것으로 확인된 인류 최고(最古)의 동굴 벽화로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리앙 테동게 동굴에서 발굴됐다. 지역에 사는 멧돼지를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위는 유럽에서 사냥 장면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동굴벽화인 프랑스 라스코 동굴벽화 속 반인반수의 모습이다. 최대 2만 1000년 전 작품이다.
인류가 그린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가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됐다. 4만 5500년 전 그림으로, 기존에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진 또 다른 인도네시아 동굴벽화보다 제작시기가 1600년 이상 앞선 것으로 추정된다. 인도네시아가 구석기 인류 문화의 금자탑 중 하나로 꼽히는 벽화를 가장 먼저 탄생시킨 지역이라는 사실도 다시 한번 확인됐다.
막심 오베르 호주 그리피스대 교수와 아디 아구스 옥타비아나 인도네시아 국립고고학연구센터 연구원팀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 남쪽에 위치한 리앙 테동게 동굴에서 새로 발굴한 벽화(왼쪽 아래 사진)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4만 5500년 전 작품이라는 사실을 밝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어드밴시스’ 1월 13일자에 발표했다. doi: 10.1126/sciadv.abd4648
연구팀은 석회동굴인 리앙 테동게 동굴과 인근에 위치한 리앙 발랑가지아1 동굴에서 각각 새로 발견된 벽화의 연대를 측정했다. 리앙 테동게 동굴 벽화에는 지역에 서식하는 멧돼지를 묘사한 가로 1.4m, 세로 0.5m의 커다란 그림이 빨간색 또는 자주색 염료로 그려져 있었다. 리앙 발랑가지아1 동굴에도 가로 1.9m 세로 1.1m의 커다란 멧돼지가 그려져 있었다. 연구팀은 이 그림이 그려진 벽화 위에 더께처럼 낀 탄산칼슘 침전물(스펠레오뎀)을 찾은 뒤 그 아래 그림 염료와 염료 아래 암석 일부까지 떼어내 우라늄 동위원소를 조사해 연대를 추정했다. 그 결과 리앙 테동게 동굴 벽화의 돼지는 최소 4만 5500년 전, 리앙 발랑가지아1 동굴 벽화의 돼지는 최소 3만 2000년 전 그려졌다는 사실을 밝혔다. 특히 4만 5500년 전 동굴 벽화는 지금까지 밝혀진 최고(最古) 동굴 벽화로 꼽혔다.
연구팀은 “이 그림을 현생인류(호모 사피엔스)가 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라면서도 “하지만 지구상의 다른 구상화들이 현생인류의 작품인 것으로 보아 현생인류의 작품일 가능성이 높다”라고 말했다.
‘구석기 예술 변방’ 취급 아시아, 최고(最古) 벽화 본고장으로
인도네시아는 인류 최고(最古)의 벽화가 연거푸 발견되면서 예술 고고학 역사를 계속 다시 쓰고 있는 지역이다. 2019년 12월에도 그리피스대와 인도네시아 국립고고학연구센터팀은 술라웨시섬 남부 석회암동굴 ‘리앙 불루 시퐁4’에서 2017년 발견된 구석기 벽화의 연대를 측정한 결과 최소 4만 3900년 전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밝혀 ‘네이처’에 발표했다. 당시 이번에 발견된 벽화와 비슷한 멧돼지·소 그림과 함께 상상의 산물인 ‘반인반수’ 그림이 포함돼 눈길을 끌었다. 사람의 형상에 부리가 달려 있거나 꼬리가 달린 모습으로, 인간이 기존에 존재하던 형상을 합쳐 새로운 형상을 상상하고 창조한 결과로 해석된다. 이형우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는 당시 e메일 인터뷰에서 “인간의 창조와 상상이 이 때부터 보였는지 가늠하게 해 줄 핵심 단서”라며 “반인반수는 기존에 존재하던 것을 새롭게 조합해 유에서 ‘무한한 유’를 창조한 결과물”이라고 말했다.
반인반수 가운데 여섯 명은 창과 밧줄을 든 채 소 옆에 서 있어 사냥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오른쪽 위 사진). 이 벽화의 발견으로 사냥 장면을 담은 그림이 등장한 시점은 2만 년 이상 앞당겨졌다. 인간과 동물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벽화 가운데 기존 최고 기록은 프랑스 라스코의 2만 1000년 전 동굴벽화였다. 사냥 그림이 동남아시아에서 발견된 것 자체도 이례적인 것으로 해석된다. 배기동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당시 e메일 인터뷰에서 “동남아시아에서는 사냥이 생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유럽만큼 크지 않았기 때문에 대단히 귀하거나 특별한 의미가 담긴 역사현장을 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말했다.
예술의 최초 발상지를 둘러싼 논쟁이 다시 벌어질 가능성도 제기된다. 구석기 동굴 벽화는 오랫동안 프랑스와 스페인 남부 등 유럽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돼 왔다. 이에 따라 한때 고고학계는 예술이 유럽에서 탄생해 다른 세계로 전파됐을 가능성을 제기해 왔다. 2013년 발굴된 스페인 북부 엘 카스티요 지역의 마노스 동굴벽화 속 기하학 문양(원반)이 당시로서는 가장 오래된 약 4만 년 전 그림으로 밝혀지면서 이런 가설이 증명되는 듯했다.
하지만 2014년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에서 역시 4만 년 전으로 연대가 밝혀진 손바닥 스텐실(물체를 대고 염료를 뿌려 윤곽을 그리는 그림 기법)이 발견되면서 ‘예술은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2018년에는 보르네오섬 동부 칼리만탄 지역 루방 제리지 살레 동굴에서도 4만 년 전 동물 그림이 발견된 데 이어, 2019년 4만 3900년 전 사냥 그림, 2021년 4만 5500년 전 벽화가 발견되면서 인도네시아가 예술고고학의 중요한 현장으로 떠올랐다.
다만 아직은 ‘벽화 예술이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가장 앞서서 탄생했다’거나 나아가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수출됐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서 발견된 280여 개의 구석기 예술 유적은 대부분 스페인과 프랑스 등 남부 유럽에 집중돼 있다. 동굴 벽화는 아니지만, 색소를 사용해 무른 돌에 기하학적 문양을 그린 유적은 수십만 년 전 아프리카 유적에서도 발견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