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통난이도 | 기초과학의 힘, IBS
그간 인류의 탄생과 이주 연구는 화석과 고고학 자료를 바탕으로 진행돼 왔다. 지금까지 에티오피아 등 동아프리카에서 20만 년 전 인류의 화석이 다수 발견됐고, 2017년 6월 북아프리카 모로코의 한 채석장에서는 약 32만 년 전 살았던 인류의 화석도 발견됐다.
화석으로 알아낸 인류의 기원에 대한 지금까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이 속한 호모(homo) 속(屬)의 고인류는 200만~250만 년 전 아프리카에서 출현했고, 현대인의 모습을 한 현생인류 종인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는 약 30만~20만 년 전 등장했다. 그런데 이런 인류의 기원과 발생을 설명할 때 화석만큼 중요한 증거가 또 있다. 바로 DNA다.
‘미토콘드리아 이브’는 누구?
화석은 발굴되지 않으면 증거로 쓸 수 없다. 발굴하는 데 시간과 노력도 많이 든다. 그만큼 화석에서 얻는 증거는 제한적이다. 그래서 진화인류학자들은 유전자로 눈을 돌렸다. 특히 모계 유전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 DNA(mtDNA)의 특성을 활용해 가계도를 추적하고 진화계통도를 정리했다.
그런 의미에서 살아 있는 현생인류와 유전적으로 가장 닮은 아이를 처음 잉태한 최초의 여성을 ‘미토콘드리아 이브’라고 부른다. 아직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누구인지는 모른다. 미토콘드리아 이브의 존재는 추정할 수 있지만, 실제 화석이 발견되지 않는 한 그 실체는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 수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현대인의 미토콘드리아 DNA를 분석해 호모 사피엔스를 L0부터 L6까지 총 7개 그룹으로 나눈다. 이 가운데 L3 그룹은 다시 M, N 등 수십 개의 세부 그룹으로 나뉘는데, 아프리카 이외 지역에 사는 인류에게서 발견되는 유일한 그룹이다.
L3 그룹을 제외한 나머지 6개의 L 그룹은 모두 아프리카 대륙에서만 확인된다. 이 중 인류의 가장 오래된 모계 혈통은 L0 그룹으로, 오늘날 남부 아프리카 일부 지역의 부시맨(원주민)에서도 이 DNA가 확인됐다. 이는 결국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지역이 아프리카였음을 뜻한다.
악셀 팀머만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후물리연구단장은 화석과 DNA 외에 기후 데이터도 인류의 이주 과정을 추적하는 자료로 활용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팀머만 단장은 “미국 하와이대 교수로 있던 2015년부터 인류학 연구에 과거의 기후 데이터를 접목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2016년 말 바네사 헤이즈 호주 가반의학연구소 인간비교및전립선암유전체학실험실 교수의 제안으로 유전정보와 고기후 데이터를 합친 공동연구가 시작됐다. 헤이즈 교수는 방대한 인류 유전자 데이터베이스(DB)를 보유하고 있었다. 진화인류학 연구에 처음으로 고기후 데이터를 적용할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남부 아프리카 칼라하리가 인류 최초 발생지
팀머만 교수가 IBS 기후물리연구단 단장으로 부임한 2017년부터 헤이즈 교수와의 공동연구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공동연구팀이 유전자와 고기후 데이터 연구를 수행한 지 약 3년이 지난 2019년 10월. 현생인류의 가장 오래된 모계 혈통인 L0 그룹이 현재 남부 아프리카 국가인 보츠와나 북부의 칼라하리 지역에 형성됐던 습지에서 20만 년 전 최초로 출현했으며, 기후변화로 인해 13만 년 전부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연구 결과를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발표했다. doi: 10.1038/s41586-019-1714-1
DNA 데이터와 고기후 데이터를 어떻게 결합했길래 이런 결과를 얻었을까. 팀머만 단장은 칠판에 아프리카 대륙과 유라시아 대륙 등 세계 지도부터 그려놓고 설명을 시작했다. 그리고 아프리카 한 곳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남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 부근이었다.
그간 가장 오래된 인류 유골은 동부 아프리카에서 발견됐지만, 미토콘드리아 DNA를 이용한 모계 혈통으로 볼 때 가장 오래된 L0 그룹의 후손들은 주로 남부 아프리카에 거주하고 있다. 이 때문에 L0 그룹 발상지가 아프리카 동부인지 남부인지를 놓고 논란이 있었다. 팀머만 단장은 “이번 연구에서 유전적으로 현대인과 같은 호모 사피엔스는 아프리카 남부에서 처음으로 출현한 것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헤이즈 교수팀은 수년간 L0 그룹의 혈통을 찾기 위해 아프리카 원주민을 만나 일일이 혈액을 채취했다. 연구팀은 L0 혈통 198명의 혈액 표본을 새로 찾아내 기존 1019명의 표본을 합친 총 1217건의 혈액 표본을 이용해 L0 그룹의 계통도를 재구성했다. 그 결과 현생인류는 칼라하리 지역에서 가장 먼저 거주한 것으로 확인됐다.
여기서 고기후 데이터 분석이 큰 역할을 했다. 팀머만 단장은 “우리는 고기후를 시뮬레이션하고, 주요한 기후 변화를 유전자 데이터에서 얻은 당시 인류의 지리적 분포 및 이주 사건 결과와 비교했다”고 말했다. 유전적으로 분리된 L0 그룹의 하위 계통들은 지리적으로도 분리돼 생활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었다.
지구의 기후 변화와 이에 따른 식생 분포는 지구 축의 세차 운동, 공전 궤도상의 태양과 지구 사이의 위치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연구팀에 따르면 L0 그룹이 나타난 약 20만 년 전 칼라하리 지역에는 이미 대규모 습지가 조성돼 있었다. 습지는 인간이 살기 좋은 환경을 제공한다.
하지만 약 13만 년 전 태양과 지구가 가장 가까워졌고 남부 아프리카 여름은 가장 덥고 습도가 높았다. 강수량과 식생이 증가했으며, 이 시기에 현재 잠비아와 탄자니아가 위치한 칼라하리 북동쪽 지역으로 녹지가 형성되면서 최초의 이주가 시작됐다.
L0 그룹이 이 녹지대를 따라 이동했고, 그 과정에서 하위 혈통(L0a, L0f, L0d3 등)이 생겨났다. 또한, 약 11만 년 전에 지금의 나미비아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있는 남서쪽 지역까지 녹지대가 형성되면서 현생인류의 두 번째 이주가 이뤄졌다. 여기서는 L0g, L0d1’2 등 하위 혈통이 추가로 나타났다.
팀머만 단장은 “약 2만1000년을 주기로 자전축의 방향이 변하는 지구의 세차운동 때문에 전 지구적인 기후변화가 발생한다”며 “이를 통해 습지대가 건조해지고 해수면이 상승하는 등 환경이 변하고 새로운 길이 만들어지면서 인류의 이동이 가능해졌다”고 설명했다.
이번 연구결과대로 남부 아프리카 칼라하리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L0 그룹이 나타나 이동한 것이라면 에티오피아나 모로코에서 발견된 30만~20만 년 전 호모 사피엔스의 두개골 화석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팀머만 단장은 “이들 화석은 해부학적으로 현대인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미 멸종된 다른 유전자 혈통에 속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번 연구에서는 현재 살아 있는 인류 중 가장 오래된 L0 그룹을 탄생시킨 미토콘드리아 이브가 칼라하리 지역에서 발생했음을 확인한 것”이라며 “유전적 데이터와 고기후 데이터를 결합한 통계적 접근법이 인류의 기원을 연구하는 데 효과적임을 밝힌 최초의 연구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슈퍼컴퓨터로 기후변화 모델링
기후물리연구단은 향후 대전 IBS 본원에서 운용하는 슈퍼컴퓨터 ‘알레프(ALEPH)’로 고기후와 인류 이주 사이의 상관성 연구, 현재 및 미래 기후 모델링 연구 등을 계속할 계획이다.
알레프의 연산속도는 1.43PF(페타플롭스·1PF는 1초에 1000조 번 연산)로 데스크톱 PC 1560대를 합친 성능이다. 저장 용량은 9820TB(테라바이트·1TB는 1024GB)로, 4GB 영화 약 251만 편을 저장할 수 있다.
기후물리연구단은 해양 10km, 육지 25km의 해상도로 현재 및 미래 기후를 시뮬레이션해, 벌써 약 2000TB의 기후 자료를 생산했다. 10km 해상도는 두 격자점의 거리가 약 10km임을 의미한다.
팀머만 단장은 “세계 최초로 수행된 초고해상도 미래 기후 시뮬레이션”이라며 “향후 구름과 같은 아주 작은 규모의 기상변화까지 추적할 수 있는 초고해상도 기후 시뮬레이션을 구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