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는 역시 두툼해야 제맛이라고 했는데. 최근 여기에 반기를 드는 ‘세력’이 등장했다. 복고감성 충만한 얇디얇은 ‘냉삼(냉동삼겹살)’의 부활이다. 꽁꽁 얼린 돼지고기를 약 5mm 두께로 썰어 익혀 먹는 냉삼은 입안에서 살살 녹는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다. 얇은 두께 덕분에 일반 삼겹살보다 야들야들하기도 하다. 냉삼부터 냉동만두, 냉동도시락까지. 바야흐로 냉동식품 전성시대다. 이들이 맛있는 이유는, 잘 얼렸기 때문이다.
냉동만두┃ 얼음 결정과의 싸움
냉동식품은 냉동기술의 발전과 함께 성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 냉동만두는 해동해도 맛이 변하지 않고 쫀득쫀득한 식감이 살아있다. 얼음 결정을 제어하는 냉동기술이 발달한 덕분이다. 조리된 음식을 냉동시킬 때 생기는 얼음 결정은 맛과 식감을 해치는 요인이다.
얼음 결정이 생성되는 과정은 얼음 결정의 핵이 생성되는 과정과 핵을 중심으로 결정이 성장하는 과정 등 크게 두 단계로 나뉜다.
물은 다른 물질과 달리 액체에서 고체가 될 때 부피가 증가한다. 음식을 얼리면 수분이 얼면서 부피가 팽창하고, 조직이 손상되며 단백질 등 영양소가 파괴될 수 있다.
얼음 결정을 최소화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방법은 급속냉동이다. 급속냉동은 주로 영하 196도의 액화질소나 영하 78도 이하의 드라이아이스를 이용해 얼린다. 얼음 결정은 온도가 0도에서 영하 5도로 내려갈 때 가장 많이 생성되는데(이 구간을 최대빙결정생성대라고 부른다), 급속냉동은 최대빙결정생성대를 35분 이내에 최대한 빨리 지나가게 만들어 얼음 결정을 줄인다.
급속냉동으로도 얼음 결정을 완벽하게 피해가긴 힘들다. 다만 급속냉동을 하면 얼음 결정의 핵은 생성되지만, 결정이 성장할 시간은 부족해 음식 내부 조직이 파괴되는 것을 최소화할 수 있다.
아예 얼음 핵의 생성 자체를 막는 냉동기술도 있다. 이를 위해서는 과냉각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과냉각은 어는점보다 낮은 온도에서 상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액체 상태로 존재하는 현상을 말한다. 영하의 낮은 온도에서도 과냉각 상태가 유지되면 음식에 얼음 핵이 생성되지 않는다. 영하 5도 아래에서는 결정의 성장 속도가 느린데, 보통 영하 10도 이하까지 음식을 과냉각 상태로 유지하면 얼음 결정이 거의 생기지 않는다.
과냉각 상태는 전기장, 자기장, 초음파 등으로 만들 수 있다. 액체 상태의 물 분자는 자유롭게 운동하는 반면 고체 상태에서는 육각 구조로 결합해 있다. 액체 상태의 물 분자에 전기장과 자기장을 가해 물 분자에 미세한 진동을 일으키면 영하의 환경에서도 분자끼리 결합해 고체 상태로 바뀌지 않고 액체 상태로 남아있게 된다.
미국 캘리포니아공대 지질학및행성과학과 등 공동연구팀은 세포 안에 있는 자철석(Fe3O4)에 자기장으로 진동을 유도하면 영하 30도까지 얼음 결정이 형성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 국제학술지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 2018년 5월 7일자에 발표한 바 있다. doi: 10.1073/pnas.1800294115
빙결억제단백질(AFP·Antifreeze Protein)을 이용해 생화학적인 방법으로 냉동시키기도 한다. AFP는 얼음 결정의 성장면에 붙어 다른 물 분자와 더 이상 결합하지 못하도록 한다. 얼음 결정의 성장을 막아 어는점을 내리는 것이다. 미국의 아이스크림 브랜드인 브라이어스(Breyers)는 AFP를 첨가해 얼음 결정 형성을 막아 부드러운 식감을 극대화한 아이스크림 ‘브라이어스 라이트(Breyer’s Light)’를 2000년대 중반 출시하기도 했다.
식품의 내외부 온도를 비슷하게 유지하는 것도 냉동기술의 핵심이다. 보통 식품을 얼릴 때 냉기에 직접 닿는 식품 표면의 온도가 먼저 내려가기 때문에 겉에서부터 언다. 이를 ‘유리화(vitrification)’라고 한다. 냉기가 안쪽까지 전달돼 안쪽도 얼면서 부피가 팽창할 때쯤이면 이미 바깥은 딱딱하게 굳은 상태여서 내부가 더 이상 팽창할 수 없고, 이로 인해 내부에 압력이 생긴다. 겉부분이 이 압력을 견디지 못하면 균열이 생기고 식품의 조직이 파괴된다.
냉동공학 전문가인 정진웅 한국식품연구원 중소기업솔루션센터 전문연구원은 “보온, 보냉 등의 포장법을 통해 식품의 내외부 온도를 균일하게 유지할 수 있다”며 “영하 5도 이하에서 균일하게 냉동하는 기술은 아직 실용화되지 않고 있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아이스크림┃ 얼음 비율로 식감 조절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혀끝에서부터 부드러움이 전해지는 ‘소프트 아이스크림파’인가, 한입 씹으면 머리끝까지 시원함이 전해지는 ‘빙과류파’인가? 아이스크림은 같은 원액이라도 어떻게 냉동하는지에 따라 식감이 달라지는 대표적인 식품이다.
가장 큰 차이는 얼음의 비율이다. 아이스크림은 주로 원유와 당분, 물을 섞어 만든다. 이때 원유의 지방 성분인 유지방과 물의 비율에 따라 식감이 달라질 수 있다. 유지방이 10% 이상인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유지방이 얼음 결정의 생성을 억제해 부드럽게 느껴진다. 우유를 얼린 ‘우유 얼음’을 사용하는 눈꽃빙수가 일반 빙수의 얼음보다 부드러운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얼음 결정의 크기도 식감에 영향을 미친다. 일반적으로 아이스크림은 얼음 결정이 작을수록 부드럽게, 클수록 아삭하게 느껴진다. 부드러운 맛이 강한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얼음 결정의 크기가 35~55㎛(마이크로미터·1㎛는 100만분의 1m), 아삭한 빙과류는 55~70㎛다.
얼음 결정의 크기는 아이스크림 원액을 냉동하는 속도로 조절할 수 있다. 소프트 아이스크림은 영하 30도에서 급속 냉동해 얼음 결정을 가능한 작게 만든다. 반면 빙과류는 천천히 얼려 오히려 얼음 핵이 성장할 시간을 충분히 준다. 최대빙결정생성대를 최대한 길게 지나가게 하는 셈이다.
아이스크림 내부 수분의 동결 비율도 식감에 영향을 줄 수 있다. 가령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영하 4~6도에서는 전체 수분의 약 55%만 얼음으로 존재하고 나머지는 액체 상태로 존재한다. 딱딱하고 시원한 맛을 내는 빙과류는 1차 냉동 이후 영하 35도에서 2차로 동결시켜 전체 수분의 90%까지 얼린다.
보관하는 온도도 중요하다. 만약 소프트 아이스크림을 먹는데 서걱거리는 느낌이 있다면 제조 후 유통과정에서 녹았다가 다시 얼었을 수 있다. 식품을 냉동할 때 온도를 빨리 낮추지 않으면 제조 과정에서 생긴 얼음 결정이 서로 달라붙으며 성장한다. 서걱거리는 식감이 생기는 것도 이 때문이다.
녹았다가 다시 어는 과정에서 얼음 결정의 비율이 달라지면 식감의 변화가 생기기 때문에 아이스크림을 만들 때는 증점제(용액의 점도를 증가시키는 물질) 등을 첨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잔탄검(Xanthan gum) 성분의 증점제를 넣으면 아이스크림의 점성이 커져 유통과정에서 온도가 내려가도 형태를 유지해 식감의 변화를 줄일 수 있다.
동결건조칩┃가볍고 바삭하게 즐긴다
식품을 냉동하면 오랫동안 원래 상태를 보존할 수 있다. 다만 냉동은 유통과정에서는 단점으로 작용한다. 저온으로 유지해야 할 뿐만 아니라 얼음막의 무게가 더해져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냉동 후 수분을 제거하는 동결건조 기술을 이용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래서 우주식품이나 전투식량은 동결건조법으로 제조된다.
우주에 올라갈 때 무게는 곧 비용이다. 예를 들어 1kg의 물체를 지상 약 300km에 위치한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보내기 위해서는 수천 만 원이 든다. 그래서 무조건 무게를 줄이는 게 유리하다. 며칠치 식량을 지고 행군해야 하는 군인의 전투식량도 마찬가지다.
동결건조 식품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라면의 건더기 수프나 물에 넣어 녹이는 인스턴트커피가 동결건조 식품이다. 최근에는 말린 과일이나 개 사료도 동결건조법으로 제조한다.
동결건조는 삼중점(고체, 액체, 기체 상태가 공존하는 상태의 온도와 압력) 이하에서 승화 현상을 이용해 건조하는 방식이다. 식품을 우선 영하 50도 이하에서 예비동결한 뒤 저온 상태가 유지되는 삼중점인 4.58Torr(토르·1Torr는 표준대기압의 760분의 1) 이하의 진공 챔버에 넣어서 얼음이 기체로 승화되도록 한다. 열을 가하지 않기 때문에 영양소의 파괴나 맛의 변화, 외관의 변형을 최소화할 수 있다.
얼음이 기체로 증발하면서 원래 얼음이 있던 자리는 미세한 구멍(pore)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뜨거운 물을 넣으면 수분이 구멍에 채워지면서 원래 상태로 복원된다. 예를 들어 라면의 건더기 수프에 80~90도의 뜨거운 물을 부으면 3분 안에 금세 원재료인 채소나 육류의 맛과 식감으로 돌아온다. 식품 내부 구조가 그대로 유지되는 만큼 비타민 같은 영양소가 파괴되지 않고, 원래의 색깔과 향도 유지된다.
폴란드 브로츠와프환경생명과학대 연구팀은 과일과 채소를 다양한 방법으로 말린 뒤 부피와 구조를 비교해 2016년 국제학술지 ‘국제분자과학학회지’에 발표했다. 연구팀에 따르면 동결건조, 진공건조, 열건조 순으로 부피 변화가 적었다. doi: 10.3390/ijms18010071
최근에는 과일 등을 동결건조해 과자처럼 먹을 수 있는 칩도 개발됐다. 얼음이 승화되고 남은 미세한 구멍이 있어 튀기지 않아도 과자 같은 바삭바삭한 식감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동결건조는 승화 과정을 거쳐야 하므로 일반적인 열건조보다 기술적으로 에너지가 많이 필요하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동결건조 식품이 열건조 식품보다 2~3배 비싼 이유다. 박성희 서울과기대 식품공학과 교수는 “적외선 복사에너지나 마이크로파로 물 분자의 진동을 유도해 승화 속도를 높이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며 “1인 가구가 늘면서 가정간편식(HMR·Home meal replacement) 등에 동결건조 기술이 더욱 많이 쓰일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