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퍼부터 성악가까지 모든 가수는 관객에게 노랫말을 전달한다. 성대가 만든 소리를 노랫말로 바꾸려면 복부부터 얼굴까지 400여 개의 근육을 움직여 소리의 공명을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이들 근육의 움직임을 최종적으로 조율해 발음을 만들어내는 기관이 바로 혀다. 혀가 만든 길을 따라 공기가 흐르고 이들 공기의 흐름이 입술을 통해 바깥으로 나오면 비로소 말이 완성된다. 혀가 지휘하는 근육의 움직임에 따라 랩 스타일이 결정되는 셈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 밴쿠버로 간 박신욱 씨(연세대 사회정의리더십과 2학년)는 고등학교 때까지 학창시절을 외국에서 보냈다.
박 씨가 캐나다에서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한국으로 온 것은 한국의 랩과 젊은이들의 문화에 매료돼서다. 래퍼 빈지노, 도끼, 스윙스의 랩을 듣고 이들의 벌스와 그 분위기에 반한 박 씨는 연세대에 입학한 뒤 흑인음악동아리 ‘RYU(알와이유)’에 가입해 아마추어 래퍼의 길에 들어섰다.
래퍼 빈지노 따라할 수 있나
4월 12일 박 씨와 함께 서울 강남구 예송이비인후과 음성센터를 찾았다. 좋은 래퍼가 되기 위한 과학적인 조건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예송이비인후과는 2006년 국내 최초로 목소리 검진센터를 열고 혀와 성대의 상태를 검사하고 치료해왔다.
이날 박 씨는 약 40분 간 음향학적 검사와 폐활량 검사, 성대 내시경, 성문 압력 검사 등을 포함한 ‘음성종합검진’을 받았다.
검사를 진행한 장진은 예송이비인후과 음성언어치료사는 박 씨를 컴퓨터가 있는 의자 앞으로 안내했다. 장 치료사는 랩을 하거나 말을 할 때 불편한 점을 묻는 질문을 시작으로 박 씨에게 다양한 질문을 쏟아 냈다. 박 씨가 “랩을 할 때 호흡이 버거운 경우가 있다”고 하자 장 치료사는 박 씨의 평소 말 하는 습관과 폐활량을 통한 발성량부터 체크했다.
우선 ‘아’ 하는 소리를 각각 5초, 10초 간격으로 내뱉게 했다. 이어서 약 10줄에 이르는 글을 소리 내 읽게 했다. 박 씨가 이를 읽자 센서를 통해 컴퓨터에 입력된 박 씨의 음성 데이터는 파형으로 바뀌어 기록됐다.
호흡량을 검사하기 위해 숨을 크게 마신 뒤 한 번에 ‘후~’ 하고 내뱉는 동작도 세 번 반복했다. 최대발성량을 확인하기 위해 마스크를 쓰고 ‘아’ 소리가 갈라져 끊어질 때까지 내뱉게도 했다. 박 씨는 최장 25초간 ‘아’ 소리를 이어갔다. 이후 ‘파’ 소리를 5번 연달아 내게 해 성대 압력을 측정했고, 성대 내시경 검사도 했다.
김형태 예송이비인후과 음성센터 대표원장(가톨릭대 의대 이비인후과학교실 외래교수)은 박 씨의 검진 결과를 받아 들고 성대의 구조와 기능부터 판독했다.
김 원장은 “성대를 보면 아래가 살짝 헐어 있고, 성대가 닫혀야 할 때 끝이 조금 열려 있다”며 “자신의 호흡량으로 소화하기 버거운 랩을 할 때 공기와 함께 동시에 말을 뱉어내는 습관 때문에 성대에 일부 이상이 생긴 것 같다”고 추정했다. 호흡량 자체는 평균 이상이지만, 그보다 더 많은 얘기를 담고자 가사를 너무 길게 노래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김 원장은 “성대 이상은 당장 약으로 치료할 수 있다”면서도 “장기적으로는 본인의 호흡량이나 성대 구조에 적합한 스타일의 랩을 찾아야 더 이상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박 씨가 좋아하는 래퍼 빈지노는 빠른 랩이나 분위기 있는 랩 등 모든 종류의 랩을 잘 소화하는 수준급 래퍼로 평가 받는다. 박 씨도 다양한 종류의 랩을 소화하기 위해 최근 빠르고 강한 랩 스타일을 연습했다.
김 원장은 “다양한 랩을 시도하는 것은 좋다”면서도 “사람마다 말을 할 때 나타나는 근육의 반응이 다른 만큼 근육이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연습하면 오히려 성대에 무리가 갈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박 씨의 경우 현재 성대 결절이 일부 나타난 만큼 이를 치료한 뒤 자신의 호흡량에 맞는 벌스를 작성해 적당한 비트의 랩을 시도하는 게 좋다는 진단을 받았다. 또 빠른 랩은 흉식호흡과 복식호흡을 익혀 호흡량과 발성량을 늘린 뒤에 시도해야 혀와 근육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는 조언도 들었다.
400개 근육 중 가장 중요한 8개 근육
해부학적으로 본인에게 적합한 랩 스타일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발성역학적다차원측정법’이라는 더욱 정교한 검사를 받을 수도 있다. 예송이비인후과는 2005년 신체 근육 측정 시스템을 자체적으로 개발했다.
얼굴과 턱, 목, 복부, 흉부 등의 근육이 있는 부위에 전극 19개를 붙이고 노래할 때 근육 긴장도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2~3곡을 부르는 동안 근육이 수축되고 이완되는 정도가 전극을 통해 측정되고, 이를 파형으로 확인할 수 있다.
김 원장은 “특정한 발음을 한다고 생각하면 우리 뇌는 즉각적으로 여기에 필요한 근육을 작동시킨다”며 “배부터 얼굴까지 분포하는 약 400개의 근육이 상호작용해 후두에서 입까지의 공간이 변하고, 이를 통해 발음이 만들어 진다”고 설명했다.
음성을 내기 위해 움직이는 400여 개 근육들 중 가장 큰 역할을 하는 것이 8개의 대표 근육으로 이뤄진 혀다(최상단 혀 근유 그림). 김 원장은 “후두에서 나온 공기는 성도 내에 위치하는데, 이때 성도 내의 공기 진동을 가장 크게 변화시키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기관이 혀”라며 “특히 가사가 많은 랩의 경우 혀 근육에 문제가 생기면 치명적”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혀는 우리 몸에서 가장 자유로운 근육에 해당한다. 다른 근육들은 뼈나 인대에 양쪽 끝이 고정된 상태여서 움직임에 제약을 받지만, 혀 근육은 한쪽 끝만 고정돼 있다. 덕분에 연습을 통해 근육의 움직임을 새롭게 추가할 수 있다.
김 원장은 “일본인은 한국어에만 있는 ‘의’나 ‘외’ 같은 발음을 할 수 없는데, 이는 혀 근육이 이런 발음에 필요한 동작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일본인도 연습하면 이런 발음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다른 근육의 움직임까지 자연스럽게 구사하려면 시간이 걸린다. 처음 외국어를 배울 때 어눌하게 발음을 하는 이유도 근육의 훈련이 덜 됐기 때문이다.
발음이 근육의 훈련과 관련이 있다면 랩은 어릴 때부터 하는 게 좋을까. 최근 ‘중등 래퍼’와 ‘고등 래퍼’의 등장도 이와 관계된 것은 아닐까. 김 원장은 “조기 랩 교육은 언어를 자연스럽게 내뱉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이라며 “어릴 때부터 근육 훈련을 통해 향후 자신만의 스타일로 언어를 소화해 발음하는 래퍼가 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성악의 경우 조기 교육은 오히려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김 원장은 “구강 내 성도가 완전히 발달하지 않은 상태에서 성악 발성을 위해 근육을 움직이면 공명을 만드는 습관이 잘못 자리 잡을 수 있다”며 “성인이 됐을 때의 성도에는 어릴 때 형성한 근육의 움직임이 맞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MRI로 혀 움직임 실시간 확인
전문 보컬 트레이너나 성악과 교수는 노래하는 모습만 보고도 ‘왼쪽 어깨를 들라’거나 ‘혀를 입천장에 더 붙이고 소리를 내라’는 등 조언을 한다. 경험을 통해 소리를 내는 방법을 알기 때문이다.
김 원장은 “그간 근육의 움직임을 확인해 구강 내에서 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파악하기 어려웠다”며 “최근 ‘실시간 자기공명영상(real time MRI)’ 기법이 발전하면서 혀의 움직임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실시간 자기공명영상 기법은 MRI를 이용한 인체 촬영 이미지를 영상으로 확보하는 기술이다. 지금까지는 심장의 움직임을 보는 데 주로 활용됐지만, 최근 음향 연구에도 이 기법이 활발하게 쓰이고 있다.
2018년 11월 캐나다 빅토리아에서 열린 제176회 ‘미국음향학회(ASA)’ 연례회의에서 티모시 그리어 서던캘리포니아대 박사과정 연구원은 “비트박스를 하는 사람(비트박서)의 구강 구조를 실시간 자기공명영상 기술로 관측한 결과 소리가 생성될 때 성도 내 공간에서 나타나는 구조적인 변화를 확인하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가령 비트박서들은 스네어 드럼(뒷면에 쇠 울림줄을 댄 작은 북) 소리를 따라할 때, 방출음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방출음은 구강 내 압력을 높인 뒤 공기의 출입을 막은 곳을 열어서 내는 소리다. 그런데 연구팀은 일부 비트박서는 방출음 없이도 스네어 드럼 소리를 재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팀은 이런 변화를 분석해 혀와 입천장 등 소리를 만들어내는 데 관여하는 다양한 신체 부위의 움직임을 분석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했고, 비트박서를 포함해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 음악가의 발성을 조사하는 데도 적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김 원장은 “실시간 MRI 기술이 아직 목소리를 시각화하는 수준은 아니다”라며 “향후 구강 내부의 움직임에 대한 데이터가 계속 축적되면 래퍼가 랩을 하는 동안 자신의 혀의 움직임을 확인하고 실력을 늘리는 데 활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