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실에 들어서자 흰 가운을 입고 실험용 고글을 쓴 학생 10명이 실험대에서 뭔가 열심히 붙이고 있다. 작아서 잘 보이지 않아 가까이 다가갔다. 가로세로 1cm, 엄지손톱 크기의 태양전지 셀이다.
이들은 셀을 길게 한 줄로 배열한 뒤 전류를 흘려 보내 전압을 측정했다. 한 학생이 상기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3볼트(V)가 훌쩍 넘네. 이 정도면 충전하는 데 문제없겠어.”
7월 12일 울산과학기술원(UNIST) 제2공학관에 위치한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실험실. 실험이 진행되는 내내 한국어 대신 영어가 들렸다. UNIST 학부생 5명과 미국 하버드 존폴슨 공학 및 응용과학대(Harvard SEAS·Harvard John A. Paulson School of Engineering and Applied Sciences) 학부생 5명은 셀을 어떻게 이어 붙여야 태양전지가 원하는 전압을 낼지 영어로 열띤 토론을 펼쳤다.
하버드대 공대, 연구 파트너로 UNIST 선택
하버드대 공대는 2015년 존 폴슨 폴슨앤컴퍼니 회장으로부터 4억 달러(약 4530억 원)의 기부금을 받은 뒤 공대 이름을 하버드 존 폴슨 공학 및 응용과학대로 바꿨다.
하버드대 공대는 이미 오래전부터 해외 대학과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학생들을 해당 대학에 보내 연구 역량을 쌓게 하는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하버드대의 명성에 걸맞게 MOU의 기준도 깐깐해 나라별로 한 개 대학만 선별한다. 하버드대 공대 측은 대학 이름 공개를 꺼렸지만, 그간 세계 유수 대학과 ‘랩온어칩(Lab on a chip·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작은 반도체칩)’을 이용한 토양 분석, 해양 오염 해결 기술 개발 등을 진행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서는 다른 대학을 제치고 UNIST가 발탁됐다. 지난해 하버드대 공대는 UNIST와 MOU를 체결하고 여름방학을 이용해 하버드대와 UNIST 학부생들을 양쪽 대학에 보내는 ‘UNIST-하버드 공대 하계 프로그램(UNIST-Harvard SEAS Summer Exchange Program)’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프로그램 책임자인 서관용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는 “UNIST는 에너지 연구에 특화된 대학으로 하버드대에도 잘 알려져 있다”며 “하버드대 공대가 이런 점을 높이 평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 서 교수 역시 지난해 태양전지와 리튬이온전지를 일체형으로 만들어 전력 생산과 저장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배터리를 개발하며 주목을 받는 등 에너지 분야에서 왕성하게 연구하고 있다.
올해 이 프로그램에 참가한 UNIST 학부생은 이미 지난해 선발을 끝냈다. 5명 모집에 10명이 지원해 경쟁률은 2대 1로 낮은 편이었다. 엄격한 선발 기준에 선뜻 지원하지 못한 학생들도 있었다.
서 교수는 “이 프로그램을 통해 학부생들이 세계 유수 기관에서 경험을 쌓아 글로벌 인재로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다”며 “이런 취지를 살리기 위해 프로그램에서 어떤 연구를 진행할 계획인지 면접을 통해 꼼꼼히 확인했다”고 밝혔다. UNIST는 모든 교과 과정을 영어로 수업하고 있어 교육 과정 전체가 글로벌 인재 양성에 최적화돼 있다.
허다연 씨(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3학년)는 “학부교육 과정에서 접하기 어려운 태양전지와 해수배터리를 연구해보고 싶어 지원했다”며 “다른 나라 친구들과 생활하면서 문화도 체험해보고 싶었다”고 지원 동기를 밝혔다.
태양전지 제작 전 과정 경험
올해 프로그램은 하버드대와 UNIST에서 각각 일주일씩 진행됐다. UNIST에서 선발된 학부생 5명이 6월 25일 먼저 하버드대로 날아갔다. 서 교수와 함께 학부생들의 연구를 도울 진원주 박사과정 연구원도 동행했다. 이들의 체제비 등 연구 경비는 경동장학재단이 지원했다.
하버드대에서 진행한 연구는 결정질 실리콘 태양전지 제작. 결정질 실리콘은 현재 태양전지를 만드는 데 가장 많이 쓰이는 재료다. 광효율이 약 20%로 다른 재료에 비해 높고, 안정성이 입증됐다.
지도는 하버드대 공대 학장인 파와즈 하발 교수가 직접 맡았다. 학생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태양전지 셀 제작에 필요한 모든 과정을 직접 처리했다. 결정질 실리콘을 반도체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도핑(반도체 공정에서 전도율을 높이기 위해 소량의 불순물을 첨가하는 작업) 작업을 하고, 빛 반사를 줄이기 위해 반사 방지막을 만들었다.
학생들은 전류가 흐를 수 있도록 포토리소그래피(사진을 찍는 것처럼 회로선을 만드는 기법)를 활용해 전극도 형성했다. 이때 빛 반사율을 최소로 줄여 전자와 정공을 효율적으로 잡을 수 있도록 전극을 설계해야 하는데, 이 과정 역시 학생들의 몫이었다.
서 교수는 “전문가들이 태양전지를 만들 때는 포토리소그래피보다 훨씬 단순한 방법을 사용한다”면서도 “포토리소그래피가 반도체 공정에서 흔히 사용되는 기술인만큼 학생들이 경험해볼 수 있도록 하버드대 측과 협의해 프로그램에 포함시켰다”고 말했다.
하버드대 공대에서 선발된 5명 중 정 허(생명공학부 4학년) 씨는 “태양전지 셀을 직접 제작해보니 저비용으로 고효율 셀을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체감했다”고 말했다.
조영환 씨(UNIST 화학 및 에너지공학부 4학년)는 “셀 제작뿐만 아니라 셀을 잇는 모듈화 작업도 쉽지 않았다”며 “직접 납땜질을 하고 은 접착제, 구리 테이프 등을 사용해보니 정확한 공정 기술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았다”고 밝혔다.
UNIST 해수배터리 - 태양전지 연결
7월 3일 하버드대 프로그램을 마친 참가자들은 쉴 틈도 없이 바로 비행기를 타고 6일 UNIST에 도착했다. UNIST가 선정한 주제는 해수배터리. 지도는 서 교수가 맡았다. 참가자들에게는 김영식 UNIST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팀이 교육용으로 제작한 3200밀리암페어시(mAh) 용량의 해수배터리 키트가 주어졌다.
참가자들이 만든 해수배터리는 바닷물(양극)과 나트륨(음극)으로 구성돼 있다. 음극에 사용된 나트륨은 원래 금속인데, 전자 저장 효율을 높이기 위해 카본펠트(탄소로 만든 천)에 나트륨을 코팅시켜 표면적을 넓혔다.
해수배터리에 전류를 흘려주면 바닷물에 녹아 있는 나트륨 이온이 음극으로 이동한다. 이때 생성되는 전자가 나트륨에 저장된다(충전). 이와 반대로 전기를 사용할 때는 음극에 있던 전자가 양극으로 이동해 바닷물과 반응하면서 다시 나셀트륨 이온으로 돌아간다(방전).
서 교수는 해수배터리를 태양전지와 연결하는 미션도 줬다. 이렇게 하면 태양전지로 에너지를 만들면서 동시에 해수배터리에 저장할 수 있다.
하지만 태양전지와 해수배터리를 연결하는 작업은 간단치가 않다. 태양전지는 전압이 매우 낮고 전류가 높은 반면, 해수배터리는 전압이 높고 전류가 낮다. 태양전지에서 생산된 전기를 해수배터리에 저장하려면 태양전지의 전압이 해수배터리의 기본 전압(약 2.9V)보다 높아야 한다. 전류는 고전압에서 저전압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2개 조로 나뉜 참가자들은 조별로 머리를 맞대고 태양전지의 전압은 높이고 전류는 낮추는 모듈화 작업부터 시작했다. 핵심은 태양전지의 셀 배열이다. 서 교수는 정답을 알려주지 않았다. 조별로 토론이 시작됐다. 서 교수는 “학생들이 서로 논의를 통해 답을 찾아나가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고 말했다.
셀을 직렬로 이으면 전압이 높아지고, 병렬로 이으면 전류가 강해진다. 양측이 제출한 태양전지 모듈의 모양은 서로 달랐지만, 둘 다 셀을 직렬로 이어붙인 가로가 길고, 병렬로 이어붙인 세로가 짧은 형태라는 점에서 비슷했다. 전압 측정 결과 양쪽 모두 2.9V를 넘기는 데 성공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기쁨의 환호성이 터졌다.
이번에는 태양전지 모듈의 효율을 측정했다. 햇빛과 거의 비슷한 에너지(약 100mW/cm2)를 내는 ‘솔라 시뮬레이터’가 사용됐다. 전압 약 3.5V, 전류는 45밀리암페어(mA)로 나타났다. 광효율은 약 8%였다. 실제 실리콘 태양전지 효율(약 20%)보다는 낮았다. 서 교수는 “태양전지를 직접 제작하면서 원리를 이해하는 게 목표였던 만큼 효율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기온이 34도를 훌쩍 넘긴 오후, 참가자들은 태양전지-해수배터리를 들고 건물 밖으로 나갔다. 실제로 작동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태양전지가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잔디밭에 비스듬히 놓은 뒤, 태양전지에 해수배터리를 연결했다.
전압측정기에 ‘3.055’가 떴다. 2.9V를 넘겼다는 뜻이다. 태양전지에서 제대로 전기가 생산돼 해수배터리에 충전되는 중이라는 소리다. 약 1시간 뒤 MP3 플레이어를 연결했다. 노래 재생도 문제없이 성공했다.
허다연 씨는 “최대 전압을 측정했을 때 느꼈던 성취감은 오랫동안 기억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하버드대 공대 프리얀카 타파(컴퓨터과학과 2학년) 씨는 “UNIST 학생들은 굉장히 열성적이고 실습 중 어려움이 발생해도 긍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며 “앞으로도 UNIST 학생들과 공동으로 연구하고 싶다”고 말했다.
서 교수는 “UNIST-하버드 공대 하계 프로그램은 매년 여름방학 진행될 예정”이라며 “이 프로그램을 통해 UNIST의 우수한 학생들이 외국과 교류하는 한편, 창의적인 연구를 경험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