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포성 섬유증’이라는 유전질환이 있습니다. 세포 내 염화이온(Cl-)의 농도를 조절하는 단백질에 문제가 생겼을 때 발생하는 질병입니다. 이 질병을 앓는 환자들은 ‘낭포성 섬유증 막 횡단 전도 조절(CFTR)’이라는 유전자에 돌연변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유전자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면 폐와 장에 끈적끈적한 점액이 축적돼 박테리아가 증식하고, 그 결과 각종 염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최근까지도 항생제 이외에는 별 다른 치료법이 없어 대부분의 환자가 반복적인 감염, 설사, 소화불량, 호흡곤란 등의 증상에 시달리다가 40세 전후에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네덜란드에 사는 낭포성 섬유증 환자 판 데르 하이든 역시 낭포성 섬유증으로 오랜 기간 괴로운 투병생활을 이어갔습니다. 하지만 2015년 주치의는 그녀에게 새로운 치료법을 제안했습니다. ‘오가노이드(organoid)’라는 기술을 활용해 그녀의 장 상피세포를 실험실에서 키운 뒤 신약의 효과를 미리 테스트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이후 그녀의 삶을 바꾸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2009년 장 상피 오가노이드 첫 구현
오가노이드는 실험용으로 배양하는 초소형 생체기관입니다. 줄기세포를 이용해 실제 장기와 기능을 흡사하게 만들어 ‘미니 장기’로 불리기도 합니다. 2009년 한스 클레버스 네덜란드 휴브렉트연구소 교수(위 사진)가 처음 개발했습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줄기세포의 체외 배양은 거의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줄기세포가 성장하는 데 필요한 인자들이 무엇이지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08년 사사이 요시키 당시 일본 이 화학연구소(RIKEN) 발생생물학센터 박사팀은 쥐와 인간의 배아줄기세포를 이용해 대뇌 피질과 유사한 조직을 체외에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대뇌 발생 후기에 만들어지는 신경세포들이 잘 만들어지지 않는 등의 문제가 남아있었습니다. 체외에서 대뇌 피질의 유사체를 만들었다고 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죠. doi:10.1016/j.stem.2008.09.002
참고로 사사이 박사는 줄기세포 연구에서 일본 최고 석학으로 칭송 받던 인물이었지만, 2014년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오보카타 하루코 연구원의 ‘STAP(자극 야기 다능성 획득) 세포’ 논문 날조 사건의 핵심이 된 논문의 공동 교신저자로 이름을 올린 뒤 그 해 자살하며 비극적으로 생을 마쳤습니다.
한스 교수 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던 사토 토시로 연구원은, 연구팀의 기존 연구를 토대로 생쥐의 장 상피를 분리해 배양할 수 있는 조건을 찾는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장 상피는 크게 융모와 크립트(Crypt)라는 두 가지 구조로 이뤄져 있습니다. 융모는 영양분을 최대한 흡수하기 위해 털처럼 뻗어 나와있는 구조고, 크립트는 융모의 일부로 줄기세포와 각종 단백질을 분비하는 파네스 세포 등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사토 연구원은 생쥐의 장 상피 조직에서 크립트를 분리한 뒤 여러 종류의 성장 인자(세포의 성장과 증식에 관여하는 단백질)를 처리했습니다. 그 결과 장 상피가 체외에서 자라기 위해서는 ‘윈트(WNT)’ ‘이지에프(EGF)’ ‘노긴(Noggin)’ ‘매트리젤(Matrigel)’ 등 4개 물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앞의 3개는 장 상피 줄기세포의 분열을 돕는 단백질이며, 매트리젤은 세포 외 기질 단백질(extracellular matrix protein)이 섞인 일종의 젤리형 물질로, 장 상피세포들이 체외에서도 3차원 구조를 유지하도록 합니다.
늘 하던 실험 중 하나라고 생각했던 한스 교수는 기대 이상의 결과에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단순히 뭉친 형태로 세포가 자라나기만 해도 성공이라고 생각했는데, 융모와 크립트를 모두 갖춘 장 상피 구조가 재현된 것입니다. 최초의 오가노이드가 탄생한 것입니다. 게다가 이 오가노이드는 이 구조 그대로 지속적으로 분열하며, 반영구적으로 배양도 되고, 급속 냉동으로 저장할 수도 있었습니다.
장 상피에서 크립트 구조가 만들어지는 기작은 학계의 오랜 난제였습니다. 기존에는 크립트 근처에 있는 근섬유아세포가 크립트 구조를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고 추측해 왔습니다.
하지만 사토 연구원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크립트를 분리해 만든 오가노이드가 완벽한 장 상피의 구조를 가지고 있는 만큼, 다른 세포 없이 장 상피 줄기세포 만으로도 완벽한 오가노이드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거죠. 한스 교수팀은 장 상피 줄기세포를 하나하나 분리하는 데 성공했고, 줄기세포의 생존을 도와줄 몇 가지 물질을 더해, 결국 하나의 줄기세포로 장 상피 오가노이드를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연구는 줄기세포가 마치 장기의 설계도라도 가지고 있는 듯, 몇 가지 인자들만 있으면 몸 안의 장기와 똑같은 구조를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이 연구결과는 2009년 과학학술지 ‘네이처’에 발표됐고, 지금까지 2055회나 인용됐습니다.
오가노이드의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한스 교수팀은 후속 연구를 통해 위, 췌장, 간을 포함한 여러 장기들을 오가노이드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고, 한스 교수는 이 분야의 선구자로 공고히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오가노이드로 신약 효과 쉽게 확인
오가노이드 기술이 가진 가장 큰 힘은 알맞은 배양 조건만 알고 있다면 어디에서든 환자의 장기를 그대로 키워 낼 수 있다는 점입니다. 가령 한국에 있는 낭포성 섬유증 환자가 미국에서 개발 중인 신약을 시험한다면, 약만 전달 받아서 환자의 줄기세포로부터 키워낸 오가노이드에 처리하면 약물의 효능을 바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스 교수는 네덜란드 위트레흐트 주에 위치한 빌헬미나아동병원(Wilhelmina Children’s Hospital)과 공동연구를 통해, 낭포성 섬유증 환자의 오가노이드가 환자의 몸 속에서와 똑같이 체외에서도 수분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또 다양한 환자로부터 만들어낸 오가노이드를 이용해 시판 중인 약물에 대한 반응성 시험을 진행했고, 오가노이드가 환자의 약물 반응성을 체외에서 그대로 반영할 수 있다는 결과를 얻어 2013년 ‘네이처 메디신’에 발표했습니다. doi:10.1038/nm.3201 이제 병원에서 적은 양의 낭포성 섬유증 환자 장 상피 조직만 있어도, 임상시험보다 안전하고 저렴하게 약물 반응성 검사를 진행할 수 있게 된 겁니다.
『이 연구는 줄기세포가 마치 장기의 설계도라도 가지고
있는 듯, 몇 가지 인자들만 있으면 몸 안의 장기와 똑같은
구조를 자체적으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한 놀라운
결과였습니다』
앞에 등장한 낭포성 섬유증 환자 판 데르 하이든도 오가노이드 배양 기술을 활용해 칼리데코(Kalydeco)라는 신약의 약물 반응성 검사를 진행했습니다. 칼리데코는 고장난 염화 이온 채널을 열어주는 약으로, 2012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의 승인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값이 비싼데다가 환자가 약물에 반응한다는 실험적 증거가 반드시 있어야 보험회사로부터 지원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약의 혜택을 받는 환자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오가노이드 기술 덕분에 약에 대한 반응성을 저렴한 가격에 확인할 수 있게 된 겁니다. 판 데어 하이든의 경우, 장 상피 오가노이드에 칼리데코를 처리하자 문제가 됐던 체액 분비능력을 되찾았고, 이 결과를 확인한 보험회사는 환자의 약물 구매 비용을 지불하는 데 동의했습니다.
‘오가노이드 바이오뱅크’ 구축
오가노이드의 또 다른 장점은 냉동기술을 이용하면 반영구적으로 보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환자들로부터 얻은 오가노이드를 저장해 ‘바이오뱅크’를 만들 수 있는 셈이죠. 동일한 질병이라도 그 원인은 다양합니다. 대장암의 경우, 환자마다 돌연변이 유전자가 다릅니다. 즉, 어떤 약이 효과를 낼지 알기 위해서는 직접 환자에게 약을 투여하거나 비슷한 돌연변이를 가진 환자의 사례를 찾아야만 합니다.
하지만 바이오뱅크가 구축되면 환자와 동일한 돌연변이를 가진 오가노이드에 약물을 처리해 바로 효과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2016년부터 서울 아산병원을 필두로 맞춤형 암 치료제 개발을 위해 오가노이드 바이오뱅크 구축에 나섰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지금까지의 성과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전에 임하고 있습니다. 제임스 웰스 미국 신시내티아동병원 교수는 주로 상피를 배양하는 데 집중돼 있던 오가노이드 연구를 장의 연동운동에 관여하는 장 신경망까지 구현하는 연구로 확장했습니다. 그 결과 체외에서 장 운동을 유도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doi:10.1038/nm.4233 이제 장의 신경망이 없어 장 운동에 문제가 생기는 히르쉬스프룽병(Hirschsprung disease)과 같은 질환의 비밀도 곧 풀리게 될 겁니다.
현재 줄기세포 연구자들은 오가노이드에 더욱 다양한 세포 유형을 적용할 수 있는 조건을 찾고, 다양한 종류의 질환을 체외에서 재현하기 위해 고심하고 있습니다. 오가노이드 기술이 지속적으로 발전한다면, 오가노이드가 인간의 질병 연구나 진단 도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인공장기 역할을 하는 시대가 올 수도 있습니다.
염민규_mky24@cam.ac.uk
영국 케임브리지대 줄기세포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생쥐 유전모델과 오가노이드, 그리고 수학적 모델링을 활용해 암 발생 과정에서 암 세포와 주변 정상세포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