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1452년 4월 15일 이탈리아 피렌체 근교의 빈치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서자의 신분으로 태어나 공증인이었던 아버지의 성과 직업을 물려받지는 못했지만, 아버지는 그의 자질을 알아차리고 그를 피렌체에서 가장 번성한 공방에 입문시켰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건 서른이 되면서부터였다. 1482년 레오나르도는 당시 밀라노의 통치자인 루드비코 스포르차 공작에게 자신을 추천하는 추천장을 썼다. 그는 스포르차를 설득하기 위해 자신이 공병기술에 능한 이유 10가지를 나열하며, 맨 마지막에 예술적 재능을 딱 한 줄로 지나가듯 언급했다. “저는 대리석, 청동, 진흙으로 조각상을 만들 수 있으며, 그림 실력도 뛰어납니다.” 르네상스 시대 최고 미술가의 이력서가 이토록 겸손했던 이유는 그때 이미 그에게 회화는 기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라이트 형제보다 앞선 비행의 아버지
“새는 수학 법칙을 통해 작동하는 기구다. 인간에게는 새의 모든 움직임을 갖춘 기계를 만들 능력이 있다.”
레오나르도는 항상 노트를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바로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그의 코덱스는 일부가 소실되고도 현재 6000여 쪽이 전해진다. 그중 상당 부분은 하늘을 나는 연구다.
연구 초창기의 그는 박쥐나 새처럼 날개가 관절처럼 움직이는 비행 기계를 고안했다. 그가 이것으로 실제 비행 실험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는 곧 인간의 가슴 근육의 힘만으로는 날개를 움직이는 데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는 대안으로 바람을 이용했다. 날개의 형태를 점점 단순화시켜서 사람의 몸 바로 옆에 움직이지 않는 날개가 달린 최초의 글라이더를 생각해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람을 파악할 수 있는 풍향계와 낙하산도 설계했다. 라이트 형제가 비행기를 제작하기 약 400년 전이었다.
뾰족한 피라미드 구조로 된 그의 낙하산은 2008년 스위스의 스카이다이버 올리비에 비에티 테파(Olivier Vietti-Teppa)가 실제로 구현해 냈다. 레오나르도의 낙하산으로 제네바 650m 상공에서 뛰어내린 그는 ‘완벽한 점프(perfect jump)’라고 평가했다. 유일한 단점은 낙하산의 방향을 조종할 수 없어 어디로 착륙할지 모른다는 점이었다고.
해부학에 대한 욕망
레오나르도의 작품이라고 하면 1487년 경 제작된 ‘인체비례도(Vitruvian Man)’를 빼놓을 수 없다. 인체비례도는 사실 레오나르도의 완전한 창작물은 아니다. 기원전 1세기 고대 로마시대의 비트루비우스라는 건축가가 로마 제국 건설을 위해 쓴 책 ‘건축 10서’에서 ‘도시나 건물의 설계는 세계의 축소판인 인체의 비례에 따라야 한다’고 언급한 것을 레오나르도가 데생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당대의 또 다른 작가가 그린 인체비례도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레오나르도가 인체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는 점이다. 특히 그는 남녀의 시체를 30구 넘게 해부했다고 고백할 만큼 해부학에 조예가 깊었다. 당시에는 인체 해부가 불미스러운 일로 치부됐다는 점, 그가 의사가 아니라는 점, 시신의 부패를 막을 기술이 없었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엄청난 열정이다.
덕분에 오늘날 X선 촬영 사진에 필적하는 상세한 해부학 스케치가 탄생했다. 그는 인간의 눈을 해부해 그리면서 각막과 수정체의 기능을 연구했다. 또 인간의 척추가 곡선으로 이뤄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간의 혈관을 그리면서 동맥경화증이 있는 사람의 혈관과 없는 사람의 혈관을 비교하기도 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대부분 남성의 장기를 연구했기 때문에 자궁, 난소 등 여성의 기관은 사실과 다른 점이 많다고 한다.
그는 인간의 신체 그 자체에만 관심을 뒀던 듯하다. 그가 코덱스에 남긴 말은 오늘날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미천한 지성과 나쁜 습관을 가진 거친 인간들이 이토록 섬세한 도구를 가질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군사 공학의 기초를 쌓다
레오나르도는 평화주의자였지만(심지어 동물의 고통을 생각해 평생 채식만 했다), 그런 그도 현실과 동떨어져 살 수는 없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내분이 일어나고 프랑스와도 전쟁 중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그는 재력가들의 후원을 받기 위해 군용 무기를 제작했다. 그 결과 탱크, 투석기, 석궁, 낫이 장착된 전차 등 이전까지는 상상할 수 없던 창조적인(?) 전쟁용 기계들이 세상에 나왔다. 1483~1490년에는 밀라노에서, 1502~1504년에는 피렌체에서 영향력 있는 전술가로서 실력을 펼쳤다.
그의 초창기 디자인들은 실용적이면서 단순했다. 대표적인 것이 비상 교량이다. 레오나르도는 비상시 강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통나무 조각만으로 다리를 만들 아이디어를 냈다. 그는 통나무 양쪽 끝에 홈을 파서 나무들을 맞물리게 하는 형태로 줄이나 못 없이 안전한 다리를 조립했다. 이 다리는 해체도 쉬웠다. 아군이 모두 건넌 뒤 통나무 몇 개를 빼기만 하면 무너졌다.
반면 그의 후기 작업은 복잡하고 좀 더 공격적이었다. 한 예로 그는 로마의 전투용 마차를 발전시켜 4개의 큰 낫을 단 마차를 고안했다. 마차가 움직이면 바퀴가 돌면서 낫도 함께 회전해 적군을 쓰러뜨릴 수 있는 마차였다. 그는 전쟁 상황에서 말이 통제하기 힘든 흥분 상태가 되면 아군도 위험해질 것까지 생각해 업그레이드 버전도 내놨다. 그의 아이디어들은 현대 군사 기술의 밑바탕이 됐다. 모든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으며 모든 방향으로 대포가 달린 탱크, 외부 선체가 파손돼도 안전한 이중 선체 등이 좋은 사례다.
뿐만 아니라 레오나르도는 물리학과 기계 장치의 숨겨진 원리에도 관심이 깊었다. 기계를 통해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노동력을 절감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그는 볼 베어링 시스템, 코일 스프링 같은 오늘날 기계 장치에도 빠지지 않고 쓰이는 유명한 동력 장치들을 개발해 냈다. “직접 시도해보는 것은 큰 감명을 준다. 아는 것을 넘어서 적용해 봐야 하고, 의지를 넘어서 직접 행동해야 한다. ” 그가 남긴 말은 그가 타고난 천재가 아닌,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평생 노력한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음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