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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owledge] 인류세의 시작, 콜럼버스일까 핵폭탄일까

2000년, 한 지질학 회의에 참석한 노벨화학상 수상자 폴 크뤼천은 계속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회의 의장이 자꾸만 홀로세(Holocene Epoch)를 언급했기때문이다. 현재를 일컫는 시대가 공식적으로는 1만 1000년 전에 시작한 홀로세인 것은 맞지만, 그는 지금의 지구가 이전과는 반드시 구분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끝냅시다.”

크뤼천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리곤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더 이상 홀로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류세(Anthropocene Epoch)에 있는 겁니다.”

일순간에 회의장은 정적에 휩싸였다. 갑작스런 그의 제안에 회의 주제는 인류세로 전환됐다. 이어진 휴식 시간에도 주요 화제는 단연 인류세였다. 누군가는 그에게 그 용어에 대한 특허를 내라고 제안까지 했다.

그 뒤 지난 10여 년간 과학자들은 인류세가 타당한지, 타당하다면 언제를 인류세의 시작시기로 할지에 대해 연구하고 논의했다. 그리고 올해 10월, 국제층서위원회(ICS)는 인류세를 공식적으로 도입할지를 두고 투표를 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무난히 투표를 통과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질시대 나누는 핵심, ‘생물’

인류세에서의 ‘세(Epoch)’는 지질시대를 나눌 때 쓰는 시대 단위다. 지질시대는 지구에 아주 큰 변화가 있을 때 나뉘는데, 쥐라기, 백악기에서의 ‘기(Period)’의 아래 단위가 ‘세’다. ‘기’의 아래 단위라도, 지구상에 엄청난 변화가 있을 때만 ‘세’가 나눠진다. 그런데 그 변화가 현재 일어나고 있으며, 인류 스스로가 만들었기 때문에 이를 ‘인류세’라 부르게 됐다.

지구는 46억 년 동안 수많은 변화를 겪어왔다. 특정 생물이 갑자기 출현하거나 멸종할 수도, 대기 조성이나 지각 조성에 큰 변화가 올 수도 있다. 또한 전체 대륙이 이동한다든가, 아니면 생물들이 대규모 이동을 할 수도 있다. 이중에서 지질시대를 나누는 데 가장 핵심이 되는 기준은 ‘생물의 출현과 멸종’이다.

생물의 변화를 중심으로 지질시대를 살펴보자. 우선 5억4000만 년 전 생물종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캄브리아기 대폭발’을 기준으로 그전의 시기를 선(先)캄브리아대로 떼어놨다. 그 후의 시대는 공룡을 중심으로 공룡이 출현하기 전과 출현했을 때, 그리고 멸종후로 나눴다. 그것이 고생대, 중생대, 신생대다. 이중공룡의 멸종과 더불어 포유류의 번성으로 시작된 신생대는 제3기(고제3기, 신제3기)와 제4기로 다시 나눈다.여기서 제4기는 매머드, 털코뿔소, 순록과 같은 거대 포유류가 번성하고, 현생 인류가 진화한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 Epoch)와 인류의 문명, 즉 농경이 시작된 신석기 시대가 포함된 홀로세로 구성돼 있다. 그리고 현재 이 홀로세가 지속되고 있다.

지질시대 경계를 나누기 위해서는 생물의 큰 변화뿐만 아니라, 그 변화를 대표할 만한 표준층서구역(Global Boundary Stratotype Section and Point, GSSP)이 필요하다. 표준층서구역은 뚜렷한 변화가 기록된 퇴적층으로, 그 시대의 시작점이 된다. 예로, 중생대가 끝나고 신생대가 시작된 것은 공룡의 멸종과 포유류의 번성이 주된 이유지만, 그것만으론 신생대가 시작한 연도를 정확히 규정할 수 없다. 때문에 이 시기에 일어난 특징 중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있는 ‘기록’이 있어야 한다. 당시 공룡을 멸종시킨 운석충돌로 생성된 이리듐이 쌓인 퇴적층을 이용하면 신생대가 6만6000년 전에 시작했다고 규정할 수 있다.

표준층서구역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일단 지구 전체에 일어난 사건이어야 한다. 지구상의 특정지역에서만 일어난 기록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전후시대의 특징과 차이를 비교할 수 있도록 퇴적층 상하부로 적당한 두께의 연속된 퇴적층이 있어야 한다. 언제든 확인할 수 있도록 위치(위경도, 높이, 깊이 등)가 정확하고 접근성이 용이하며 보전도 잘 돼있어야 한다.

홀로세는 시작된 지 ‘고작’ 1만1000년밖에 되지 않았다. 고생대부터의 총 38개의 ‘세’가 지속된 평균 기간은 1420만 년 정도다. 이 중에서 홀로세는, 사람으로 따지면 태어난 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신생아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홀로세를 마감하고 새로운 ‘세’인 인류세를 도입하자는 의견이 대두됐다. 이 문제를 진지하게 논의하는 학자들은 이제 다음 논쟁으로 넘어갔다.

[● 제1기와 제2기는 현재 없다. 1759년 이탈리아 지질학자 지오반니 아르두이노가 처음 퇴적층을 조사해서 지질시대를 구분할 때 제1기부터 제4기까지 나눴는데, 제1기와 제2기는 중생대를 포함한 신생대 이전의 지질시대로 세분화되면서 명칭이 바뀌었다. 반면 제3기와 제4기는 여전히 신생대에 속해 있다.]



인류세의 시작은 언제일까

2000년에 인류세가 언급된 이후, 시작 시기를 언제로 할 것인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1610년과 1945년이 현재까지 가장 유력한 후보다. 1610년은 이탈리아의 탐험가인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지 100년정도 지난 시기다. 당시 사람들은 유럽에서 아메리카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전세계를 누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의 이동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를 통해 수많은 동식물이 직간접적으로 사람과 함께 대륙횡단을 시작한 것이다. 3억 년 전에 초대륙(판게아)이 분리되기 시작한 이래로 동식물의 대륙 간 이동은 처음이었다.

동식물뿐만 아니라 각종 감염성 질병들도 사람을 통해 이동했다. 이 당시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갈 때 옮겨간 천연두 때문에 5000만 명 이상의 아메리카 원주민이 사망했다. 이로 인해 아메리카 대륙의 농업 생산량이 급감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 수준이 7~10ppm까지 내려갔다(현재는 400ppm).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지리학과 사이먼 루이스 교수와 마크 매슬린 교수는 ‘네이처’ 2015년 3월 11일자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를 1400~1600년대 시작된 동식물의 대이동을 대표할만한 기록(표준층서구역)으로 보고 1610년을 인류세의 시작이라 주장했다.

최근엔 또 다른 후보가 등장했다. 1945년이다. 이 때 일어난 생물학적 변화는 인구의 폭발적인 증가다. 국제층서위원회는 ‘인류세 소위원회’를 따로 운영하고 있는데, 이 소위원회 회원 상당수가 포함된 필진이 ‘사이언스’ 1월 8일자에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플라스틱, 알루미늄, 콘크리트 등 기술화석(technofossils)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물질이 퇴적층에 쌓이기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기후 변화가 발생해 해수면의 높이도 크게 상승했으며, 탄소, 질소, 인 순환에 변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인류세로 지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이 변화들이 서서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지구역사상 유례없는 속도로 일어났고 현재도 진행 중이라고 했다.

국내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남욱현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제4기지질연구실 책임연구원은 “국내 자연호수나 침전조에서 시추한 퇴적물의 상층에는 최근 몇 십 년간의 흙이 쌓여 있다”며 “1980년대 후반까지 사용된 유연휘발유에만 있는 납 성분이 당시에 쌓인 퇴적물에만 남아있는가 하면, 현재는 사용이 금지된 살충제 속 수은도 포함돼 있다”고 말했다.

생물의 멸종도 인류세의 근거로 제시된다. 이제까지 다섯 번의 생물 대멸종이 일어났고 모두 지질시대의 경계점으로 인정됐는데, 1945년 이후 앞선 다섯 번의 대멸종과 유사한 속도로 생물종이 급감하고 있다. 현재 15분마다 생물 한 종이 멸종하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향후 500년 동안 생물종의 20~50%가 멸종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이 시기의 시작점이라 부를 수 있는 표준층서구역으로는 1945년에 한 핵실험이 꼽힌다. 뉴멕시코 알라모고도에서 실시된 핵실험으로 플로토늄-239 등 이전에 없던 방사성 물질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됐다.

인류세 자체를 부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홀로세가 시작된 지 1만1000년밖에 되지 않았고, 급격한 변화가 시작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았으므로 시기상조라는 것이다. 또 홀로세 자체가 인류 문명과 함께 시작했으므로 인류세를 굳이 나눌 필요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남 책임연구원은 “홀로세가 너무 짧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며 “하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가도 현재와 같은 풍경은 절대 볼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변화가 있는 만큼, 하나의 ‘세’를 시작하는 데는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글 : 서동준 과학동아
도움 : 남욱현
일러스트 : DK
이미지 출처 : Edgar Claure(W), [일러스트] DK

과학동아 2016년 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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