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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물탱크를 버렸을까

실패한 적정기술, 2.0으로 변신 중


플레이 펌프(Play Pump)’라는 기구가 있다. 아이들이 빙글빙글 돌리며 놀기만 하면, 그 힘으로 지하수를 끌어 올려 물탱크에 저장하는 기구다. 재미있게 놀면서 마실 물도 얻을 수 있어서, 깨끗한 물이 부족한 아프리카 10개국에 1500개 이상이 설치됐다. 한 때 미국 백악관의 지원을 받았을 정도로 큰 관심과 호응을 받았다.

하지만 현재 그 결과는 초라하다. 아이나 여성들이 작동시키기 힘들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려, 점차 외면을 받았기 때문이다. 수리하기도 힘들어 지금은 여기저기 애물단지가 된 채 방치돼 있다.

한때 우리나라에서 화제가 됐던 우물 파주기 프로젝트의 경우, 개발한 많은 우물이 비소에 오염돼 있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비소는 사극에 등장하는 ‘사약’의 주성분인 독극물이다. 현지의 지하수가 독극물에 오염돼 있는데 그 사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우물을 판 것이다. 주민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한 일이 오히려 피해를 입히고 폐쇄된 역설적인 사례다.

이들은 한때 ‘적정기술’의 대표적인 사례로 크게 주목 받았던 기술이다. 최첨단 기술을 적용할 수 없는 환경에서, 현지의 사정에 맞는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도록 고안됐다. 동그란 물통을 굴려가며 물을 운반할 수 있는 큐드럼(Q-Drum)이나 더운 지역에서 전기 없이 항아리만 이용해 낮은 온도에서 식품을 보관하는 항아리 냉장고(Pot-in-Pot), 태양광 식수 살균처리기와 세균과 바이러스를 걸러내는 필터가 내장된 라이프 스트로(빨대) 등이 대표적이다.

적정기술은 개발도상국의 빈곤을 없애고 안전한 생활을 가능하게 해 줄 구세주로 크게 주목 받았다. 그런데 적정기술이 받은 성적표 중에는 플레이 펌프나 우물처럼 초라한 결과도 많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



현지 문화와 기술을 경시하다

과학자들은 적정기술이 실패한 이유로 해당 지역 사용자의 요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적정기술을 ‘원조’ 즉 돕는다는 관점에서 접근하면서, 수요자에게 일방적으로 ‘준다’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서 최근에는 적정기술의 개념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세계적으로 나오고 있다. ‘적정기술 2.0’ 논의다. 국내에서는 2013년 9월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와 과학기술나눔공동체가 공동으로 ‘적정기술 2.0: 물과 미래’라는 세미나를 개최하면서 화두로 떠올랐다.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적정기술 2.0을 이전의 적정기술과 다르게 정의하는 데 합의했다. 기존에는 ‘무료나 저렴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기술’로 정의했다. 하지만 이제는 ‘현지의 정서와 문화까지 고려한 맞춤형 기술’로 바뀌었다. 누군가에게 시혜를 베푸는 듯한 수직적인 관계를 벗어나, 현지 사람들과 공동개발 할 수 있는 수평적인 관계를 중요시하게 됐다. 단기 원조에서 벗어나, 현지에서 지속가능한 사업으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점에도 동의했다.



못 산다고 아무거나 주지 마라

적정기술 2.0의 사례는 물 분야에서 두드러진다. 한무영 서울대 교수는 누구나 공짜로 얻을 수 있고 운반비나 재료비가 들지 않으며, 오염도 되지 않은 깨끗한 수원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바로 빗물이다.

“인류는 아주 오래 전부터 빗물을 이용해 왔습니다. 100~200년 전까지도 빗물을 받아 식수와 생활용수로 썼는데, 생활수준이 높아지니까 빗물 기술이 낮은 수준으로 보이게 된 거죠. 하지만 남의 신세 안 지고, 남의 것 안 빼앗고 공짜로 얻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깨끗한 게 빗물입니다. 개도국 사람들은 이 사실을 잘 압니다. 다만 기술이 따라가지 못하니 이용하지 못 하는 거죠.”

한 교수는 빗물을 보다 효율적으로 모으고 관리하기 위해 빗물탱크를 개발하고, 서울대 학생들로 구성된 ‘비활’ 봉사단과 함께 베트남 등에 빗물탱크를 보급하고 있다. 이전의 빗물탱크와 다른 점은, 불순물이 섞여있는 초기 빗물을 제거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빗물은 보통 지붕 위에 흐르는 물을 받아 이물질을 가라앉혀 사용하는데, 처음에 내려온 빗물은 지붕 위에 있던 먼지가 씻겨 내려와 더러웠다. 그래서 작은 물통을 하나 더 설치해 1차로 가라앉히고, 맨 위에 뜬 깨끗한 물만 따로 받아 모았다. 간단해 보이지만, 정수처리장의 침전 방식을 응용한 것이었다.

빗물탱크도 시행착오를 겪었다. 처음에는 ‘꿀렁꿀렁 움직이는’, 마치 주머니 같은 플라스틱 탱크를 썼다. 나중에 다시 가보니 사람들이 절반도 이용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를 알아보니 쭈그려 앉아 써야 해서 불편한데다 플라스틱 냄새가 났다. 튜브가 움직일 때마다 가라앉았던 이물질도 떠올랐다. 무엇보다, 도시 사람들이 번쩍번쩍한 알루미늄 탱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던 주민들이 알루미늄 재질을 선호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초기엔 실패를 많이 했어요. 처음 인도네시아에 설치한 시설은 한 달도 못 가서 망가졌죠. 원인을 생각해 보니, 제가 너무 겸손하지 못했던 거예요. 못 사니까 아무거나 줘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눈높이를 맞추고 공손하게 줘야 하는데, 저는 한 손으로 휙 던져준 셈이었죠.”


 

최의소 고려대 명예교수는 하수처리에 주목했다. 최 교수는 1970~1980년대 한국의 경험을 통해 물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국국제협력단(KOICA) 중장기 자문단으로 에콰도르에 파견됐다. 거기에서 최 교수는 하수처리 시스템인 ‘에코리우(ECO RIO)’를 개발해 수많은 곳에 설치했다. 최 교수는 현지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로 하수처리 시설을 만들었다. 에코리우는 돌멩이를 쌓아 만든 ‘록 필터(Rock Filter)’를 이용했다. 에콰도르의 한 시골마을에 설치된 에코리우를 보면, 먼저 부패조에 하수를 모아 미생물로 분해하고 다 분해하지 못한 오물을 록 필터를 통과시켜 분해했다. 록필터의 돌 표면에는 미생물이 살고 있는데, 이 미생물이 2차 분해자 역할을 했다. 마지막으로 미생물 찌꺼기를 제거하기 위해 습지를 조성해 미생물 찌꺼기가 가라앉도록 했다. 실제로 운용해 보니 오염물질의 약 90%가 제거됐다.



최 교수가 하수처리에 주목한 것 역시 현지의 분위기를 면밀히 조사한 덕분이다. 에콰도르는 하수처리가 매우 부족한 나라다. 유엔개발기구(UNDP)의 자료로는 인구의 18%가 하수처리의 혜택을 보고 있다. 하지만 현지를 경험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니, 실제로 운영되는 처리장이 드물어 3%의 인구만 혜택을 입고 있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에서 쓰는 첨단 정수 시스템을 도입할 수도 없었다. 돈도 돈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문화’적인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콰도르 사람들은 전기를 쓰는 커다란 기계를 싫어합니다. 그래서 자연의 힘을 이용한 하수처리 방식을 고민했어요.” 최 교수는 그 지역 강물의 속도가 초속 1~2m로 매우 빠르다는 사실을 눈여겨 봤다. 물살이 빠르니 모래는 흘러가고 돌이 남아 있었다. 그 지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자연 재료는 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주의 깊은 조사와 주민에 대한 배려로, 하수처리시설 에코리우는 전기나 기계의 도움 없이 최대한자연에 가깝게 만들 수 있었다. 주민들의 거부감도 없어 성공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비용도 1인당 약 40달러로, 기계식 하수처리장의 10분의 1에서 5분의 1정도였다. 최 교수는 에코리우에 대한 기술을 환경 학술지와 잡지에도 발표했다. 지역에 맞게 응용해 사람들이 깨끗한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실제로 글을 읽은 아프리카 사람들이 연락을 해오기도 했다.



‘한물간’ 기술로는 감동시킬 수 없다

적정기술은 옛날 기술, 쉬운 기술을 응용하는 것이란 느낌이 있다. 그러나 2.0시대에는 첨단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정수를 예로 들어보자. 기존의 적정기술 패러다임에서는 모래필터를 이용한 간이 정수기를 많이 썼다. 하지만 독고석 단국대 토목공학과 교수와 박순호 그린엔텍(주) 소장은 좀더 첨단기술을 응용한 정수기도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비소 제거가 가능한 정수 시스템을 제안했다. 앞서 말했듯 독극물인 비소는 많은 나라에서 식수를 오염시키는 골칫거리다. 동남아시아 지역의 지하수에도 비소가 많았는데, 모래 필터로는 걸러낼 수가 없다.

독고 교수가 처음 비소 문제를 고민한 것은 2000년이었다. “일본에 있을 때였어요. 방글라데시에 비소 문제를 해결할 멤브레인(막)을 보냈는데, 나중에 보니 전기가 없어 못 쓰고 있더군요. 그래서 묘안을 내 전기를 공급할 자전거 발전기를 보냈어요. 근데 비용은 비용대로 들고, 정작 현지에서 쓰지를 않는 거예요. 나중에 알았는데, 30분만 돌려도 힘이 들더군요. 연구실에서는 다 될 것 같아도 현장에서는 안 통하는 게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독고 교수는 전문 분야(환경공학)를 살려 비소 흡착제를 개발했다. 이 흡착제를 필터와 함께 사용하면 효과가 더 뛰어났다. 박 소장이 여기에 동참했다. 박 소장은 비소 흡착제를 현지에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통합형 소형 정수 시스템을 개발했다. 전력이 없는 곳에서도 태양광을 이용해 자가발전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장치로, 활성탄 필터 등 네 종류의 필터를 한꺼번에 갖추고 있다. 모래부터 유기물, 미생물, 중금속까지 모두 거를 수 있는, 최첨단 기술로 가득 차 있는 장치다. 크기도 학생 배낭 정도로 작다.

흔히 적정기술은 첨단기술을 이용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박 소장은 “깨끗하고 안전한 물을 구하기 위해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첨단 시스템이 오히려 더 싸게 깨끗한 물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미리 현지 조사를 한 결과를 반영한 선택이었다.

박 소장은 “적정기술의 ‘적정’은 ‘최적’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가격과 성능, 그리고 사용자의 요구사항이 최적화돼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기술, 오래된 기술, 한물간 기술이 그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을 버려야 해요. 때로는 첨단기술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윤 추구를 뛰어넘는 따뜻함도 깃들어 있어야죠. 그게 진정한 적정기술입니다.”
글 : 이경선 | 에디터 윤신영 과학동아 ashilla@donga.com

과학동아 2014년 0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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