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는 가장 신기한 포유류다. 그 큰 덩치로 어떻게 물에서 살게 된 걸까. 고래의 유전자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난 걸까. 최근 한국 연구팀이 이런 궁금증을 속 시원히 풀어줬다. 밍크고래의 자세한 게놈 지도를 ‘네이처 제네틱스’ 지난해 11월 25일자에 발표한 것이다. 이제는 누구라도 고래 유전자를 자세히 볼 수 있게 됐다. 구글 어스에서 지구의 위성사진을 공개한 것과 비슷하다.
예부터 한국은 고래가 많은 편이었다. 특히 밍크고래는 한국 근해에서 그물에 자주 잡혀, ‘바다의 로또’라는 불행한 별명을 가지고 있다. 밍크고래에게 미안한 일이지만 이렇게 ‘우연히’ 잡힌 다 자란 고래는 한 마리에 7000만 원에서 최고 1억 원 정도에 팔리기 때문이다. 한국 근해에서 매년 최소한 수십 마리가 혼획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밍크고래가 세계 최초의 수염고래 게놈 지도로 해독된 것도 한국 근해에서 사고로 종종 죽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DNA 샘플을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이번 연구도 2011년 초 동해에서 혼획된 밍크고래 한 마리의 근육조직에서 시작됐다.
연구팀은 밍크고래를 중심으로 돌고래 한 마리, 상괭이 한 마리, 긴수염고래 한 마리까지 총 4종의 고래 게놈을 해독해 완성했다. 돌고래는 이빨고래의 대표로 포함했다. 이렇게 여러 종을 동시에 해독한 것은 고래 전체의 특징을 찾기 위해서였다.
고래에게는 바다 맞춤형 유전자가 있다
고래는 육상에서 거꾸로 바다로 들어간 고등동물이라 형태나 기능이 매우 특이하다. 수명도 매우 길어, 북극고래는 200년까지도 산다고 알려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면서도 깊은 바다 속에 장시간 다이빙을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래의 특징과 유전자를 결합하면 매우 재미있는 연구를 할 수 있다.
먼저 노화다. 일반적으로 다이빙을 깊이 하면 산소가 부족해져 몸에 엄청난 화학적 스트레스가 쌓인다. 특히 활성산소가 많이 생겨, 세포의 노화가 촉진된다. 하지만 고래는 산소가 매우 적은 심해의 극한상황도 충분히 견딜 수 있다. 비결은 유전자에 있는 게 아닐까.
실제로 이번 연구에서 관련 유전자의 변이가 밝혀졌다. 피 속에서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과 햅토글로빈의 결합 부위가 사람과 달랐다. 이 부분의 아미노산 서열이 달라져서 햅토글로빈이 헤모글로빈과 결합해, 헤모글로빈이 활성산소를 만드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또한 활성산소에 의한 독성을 막아주는 물질인 글루타치온을 조절하는 유전자도 특이했다. 이러한 유전자의 면모가 다 드러나면 인류는 몸에 해로운 활성산소를 해결하고, 노화를 늦추는 열쇠를 찾을지 모른다.
고래가 짠 바닷물에서 생활할 수 있는 이유도 밝혀졌다. 염분 조절 기능이 있는 유전자(ACE2)가 다른 포유류와 달랐다. 밍크고래의 이 유전자는 아미노산 서열의 747번, 801번째 등이 다른 포유류와 다르게 변했다. 이런 진화가 염분 조절 단백질의 기능을 어떻게 바꿨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덕분에 고래는 바다에서 생활할 수 있었다.
또 수염고래의 일종답게 밍크고래는 이빨이 전혀 없다. 포유류에게 매우 드물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밍크고래는 돌고래와 달리 이빨 대신 굵은 털과 비슷한 수염(발린)을 이용해 먹이를 취한다. 이번 게놈 분석에서 그 원인이 되는 유전 변이를 찾아냈다. 이빨 형성에 관여하는 유전자 3개가 켜지지 않은 것이다. 아울러 고래는 털 형성 유전자의 수가 적었다. 고래나 인간은 털이 매우 적은, 극히 드문 포유류인데 앞으로 자세한 이유가 밝혀질 것이다.
진화의 발자국 보여줘
고래는 팔다리 대신 꼬리와 물고기 지느러미 같은 부분이 있는데, 모두 유전자가 변해서 생긴 결과다. 이처럼 생물의 팔다리 형성에 관련된 유전자를 혹스(HOX)라고 한다. 이번 연구에서도 역시 혹스 유전자가 고래의 몸 모양에 관여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아래 그림은 혹스 유전자의 변이에 따라 모양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여준다. 이번에 고래의 혹스 유전자를 처음으로 완벽하게 해독했으며, 육상 포유류와 다른 부분은 어디인지도 확인했다.
고래 게놈을 통해서 고래의 흥미진진한 진화 과정도 엿볼 수 있다. 고래는 5000만~6000만 년 전 개처럼 생긴 동물에서 진화했다고 추정된다. 파키스탄에서 개 같이 생긴 화석이 발견됐는데, 두개골에 고래에만 나타나는 특징이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형태로 진화할 때마다 그 동물의 게놈이 변했다. 다리가 사라진 것, 털이 없어진 것도 진화의 어느 시점에서 일어난 자연선택이다.
그리고 그에 맞는 유전자 변이의 선택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게놈은 이런 진화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놓은 역사 기록이다. 이미 밝혀진 다른 동물들의 게놈 지도와 비교하면 고래의 게놈에서 어느 부분에 변이가 일어났는지 찾아낼 수 있다.
사람이 대륙별로 특징이 뚜렷하듯, 밍크고래도 지역별로 개성이 강하고 서로 닮지 않았다. 밍크고래 몸에 있는 흰색 얼룩도 각자 약간씩 다르다. 바다에 사는 밍크고래의 총 개체수를 약 70만마리로 보는데, 이들의 다양성이 70억 명의 인간에 버금간다.
실제로 개체의 다양성 지표인 핵산 다양성이 밍크고래는 0.00061로 나와 0.00069인 인간과 비슷했다. 포유류는 엄마로부터 1쌍, 아빠로부터 1쌍의 염색체를 받아와 2쌍의 염색체를 보유한다. 이때 2쌍의 염기서열이 서로 얼마나 다른지를 측정한 것이 핵산 다양성이다. 이 수치가 높으면 엄마와 아빠가 서로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다. 즉 그 종의 게놈 다양성이 크다.
세계는 지금 고래 게놈 해독 중
해외에도 고래 게놈을 해독하기 위해 노력하는 연구팀들이 많다. 가장 강력한 경쟁 팀은 미국 MIT의 브로드연구소다. 브로드 연구소는 고래뿐만 아니라 많은 수중 포유류 게놈을 분석하고 있다. 또 다른 팀은 북극고래 게놈을 분석 중인 미국 하버드대와 영국 리버풀대 연구팀이다. 이 연구팀은 북극고래가 오래 산다는 점에 착안해, 장수에 초점을 맞춰 연구를 하고 있다.
유명한 혹등고래의 게놈 지도를 만드는 팀도 있다. 미국 UC샌프란시스코다. 혹등고래가 몸집이 큰데도 암에 잘 걸리지 않는 이유를 찾고 있다. 범고래와 향유고래의 게놈 지도도 곧 논문으로 나올 것이다. 이들과 밍크고래를 비교하면 더 새로운 발견이 나올 거라고 기대한다. 그리고 앞으로 새로운 고래 종의 분류, 연구와 보존, 포경에 새로운 발판을 마련해줄 것이다. 이는 500년 전 세계지도가 최초로 완성되면서 인간의 역사가 확 달라진 것과 비슷하다.
얼마 전 고래의 배설물조차 해양의 영양보급에 중요하다는 논문이 발표됐다. 이처럼 고래는 지구 생태계에게 중요한 존재다. ‘자, 떠나자, 고래 잡으러’라는 노래 가사처럼 한국이 미래의 고래연구를 이끌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