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런던올림픽이 7월 28일부터(현지시간) 열리고 있다. 전 세계에서 모인 남녀가 26개 종목에 걸쳐 기량을 겨루는데 이 가운데 한 종목에는 호모 사피엔스 이외의 동물이 선수로 참여한다. 바로 승마에 출전하는 말이다. 마장마술, 종합마술, 장애물 각각 개인과 단체전 모두 6개 메달이 걸려있다. 물론 말이 뛰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기수, 즉 사람의 역량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마칠기삼(馬七騎三)이라는 얘기가 있지요.”
토종말인 제주마를 연구하는 제주대 생명공학부 강민수 교수(제주승마산업RIS사업단 단장)는 말의 역량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아무리 뛰어난 요리사라도 식재료가 형편없으면 좋은 요리를 내놓을 수 없듯이 일단 말의 자질이 뛰어나야 뭘 해볼 수 있다는 것. 사실 오늘날 경마나 승마에 나가는 말은 인류가 수천 년 전 야생의 말을 가축화한 뒤 오랜 세월에 걸쳐 품종을 개량해 탄생시킨 ‘작품’이다.
안나 카레니나 법칙
말의 진화를 다룬 1파트에서 보았듯이 지난 5500만 년 동안 살았던 수많은 종은 대부분 멸종했고 현재는 에쿠스속 8종만이 살아남았다. 이 가운데 에쿠스 페루스(Equus ferus)와 에쿠스 아프리카누스(Equus africanus)만이 가축화돼 각각 말과 당나귀로 인류와 함께 했다. 당나귀는 5000~7000년 전 오늘날 이집트 땅인 동북부 아프리카에서 아프리카야생당나귀를 길들인 결과로 그 뒤 세계로 퍼져나갔다. 한편 말은 약 6000년 전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처음 가축화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3만 2000년 전 가축화된 개나 1만 년 전 가축화된 소에 비하면 한참 늦었다. 그렇다면 인류는 왜 말을 길들이기로 결심했을까.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 인류학자 팻 십먼 교수는 지난해 출간한, 인류의 진화에 동물이 미친 영향을 다룬 책 ‘The Animal Connection(동물과의 유대)’에서 대형 사냥감이던 말이 가축화된 건 유라시아의 초원에서 벌어진 우연한 사건에서 비롯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즉 겁이 없는 사람이 들판에 돌아다니던 사냥감인 야생마를 잡아 등에 올라타려는 시도를 했고 그 뒤 재갈이나 안장 같은 마구를 고안해 본격적으로 길들였다는 것이다.
지난 2009년 과학저널 ‘사이언스’에는 약 5500년 전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보타이 문화 유적지에서 말 화석과 마구, 말젖이 묻어있는 그릇을 발굴했다는 논문이 실렸다. 그 당시 이미 말의 가축화가 상당히 진전됐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사실 인류는 말을 길들이는 데 성공하면서 ‘삶의 질’을 급속히 개선했다. 말은 무거운 짐을 짊어질 뿐 아니라 먼 거리를 빨리 이동하는 교통수단이 됐다. 또 농사에도 유용했다. 유목민들은 지금도 말젖을 즐겨 먹는다.
물론 말이 긍정적인 영향을 준 것만은 아니다. 말의 기동성과 힘은 곧바로 전쟁에 활용됐고 그 결과 기병은 핵심 전투력이 됐다. 13세기 몽골의 세계지배는 날렵하면서도 끈기있는 몽고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흑사병 같은 전염병이 만연하게 된 데도 말이 역할을 했다.
말은 사람보다 크고 훨씬 힘이 세기 때문이다. 보통 건장한 말은 체중이 500kg이나 나간다. 말 애호가이기도 한 십먼 교수는 책에서 “승마를 배우는 사람은 어느 순간 승마가 자신의 몸을 다른 종의 동물에게 맡기는 행위라는 걸 깨닫게 된다”며 “아무리 길이든 말이라도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강제할 수는 없다”고 쓰고 있다.
어쨌든 사람은 말을 길들이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말에 줄무늬만 그은 것처럼 보이는 얼룩말은 왜 여전히 야생으로 남아있을까. 아프리카 사람들은 얼룩말을 길들일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미국 UCLA 생리학자인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1997년 풀리처상을 받은 명저 ‘총, 균, 쇠’에서 얼룩말을 길들일 시도를 하지 않은 게 아니라 길들이는 데 실패했다고 설명한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말은 성공하고 얼룩말은 실패한 현상을 ‘안나 카레니나 법칙’이라고 불렀다.
[제주도 초지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제주마. 토착 품종으로 키는 작지만 튼튼하고 지구력이 뛰어나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러시아 작가 레프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위의 문장으로 시작한다. 다이아몬드 교수는 이 문장을 패러디해 “가축화할 수 있는 동물은 모두 엇비슷하고 가축화할수 없는 동물은 가축화할 수 없는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고 말한다. 즉 말과 소, 양, 염소, 돼지 같은 가축화된 대형 포유류는 가축화에 적합한 소질을 지니고 있었다고. 반면 얼룩말과 영양, 코끼리 같은 동물은 저마다 가축화가 곤란한 이유가 있다는 것. 자연 다큐멘터리에서 늘 사자에 쫓기기만 하는, 불쌍하고 착해 보이는 얼룩말은 실제 성격이 거칠고 예민하다고 한다.
반면 말은 야생에서 10여 마리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데 위계가 정해져 있다. 이런 습성은 가축화에 유리한데 사람을 지도자로 여겨 따르기 때문이다. 또 우리에 여러 마리를 몰아넣어도 패닉상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교미를 한다. 많은 동물에서 가축화가 안 되는 이유는 사로잡힌 뒤에는 교미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200여 품종 저마다 개성 있어
개만큼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사람 손을 거치면서 말에서도 다양한 품종이 나왔다. 우리나라에도 토착품종인 제주마가 있다. 제주마는 키(어깨높이)가 120~130cm로 조랑말로 분류되는데 몸은 작지만 튼튼하고 지구력이 뛰어나다. 참고로 조랑말은 품종 이름이 아니라 키가 작은 말로 세계승마연맹의 기준에 따르면 148cm 이하일 때 조랑말로 분류한다. 제주마는 13세기 몽골이 고려를 정복한 뒤 제주도에 데려온 몽고말에 과하마로 불리는 토착 조랑말의 피가 섞이면서 토착화한 품종으로 보인다.
제주대 강민수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말 3만5000두 가운데 제주마가 1만 두 정도 된다”며 “제주마는 키가 작고 보폭도 짧기 때문에 편안한 승마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적합하다”고 말했다. 지구력이 뛰어난 건 근육이 대부분 지근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치면 마라토너인 셈이다.
반면 늘씬한 몸매에 폭발적인 스피드를 내는 경마용 말은 서러브레드라는 품종이다. 17세기 영국에서 토착 암말과 들여온 아라비아 수말 사이에서 태어난 말을 출발점으로 품종을 확립한 서러브레드는 1791년 이후 지금까지 족보가 완벽하게 작성돼 있을 정도로 혈통을 잘 보존하고 있다. 키가 160~170cm로 다리가 길고 시속 60km에 이르는 순간 스피드를 내는 서러브레드는 근육이 대부분 속근이어서 단거리 경마에 최적화돼 있다.
물론 신체조건이 전부는 아니다. 강 교수는 “말의 성향도 품종 개량의 대상이다”라며 “서러브레드는 출발선에 서면 달리려고 안달을 하고 근성이 있어 지기 싫어한다”고 설명했다. 기수가 채찍을 휘둘러서 달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도 앞서 나가려고 최선을 다한다. 사람과 마찬가지로 말은 성취욕이 대단한 동물이다.
한국마사회 승마활성화팀 박경원 차장은 “최근 승마를 즐기는 사람이 늘면서 말이 부족해 경마용 말이 은퇴한 뒤 승마용으로 쓰이고 있는데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라며 “놀라면 내 달리는 습성이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젊은 사람들은 달리는 말을 좋아하지만 그렇더라도 웜블러드처럼 승용마로 적합한 품종을 공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벤 이유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김유신과 천관의 이야기가 나온다. 젊은 시절 김유신은 기생 천관에 빠져 공부를 게을리 했는데 어머니 훈계에 마음을 고쳐먹고 발길을 끊었다. 그런데 하루는 술에 취해 말을 탄 채 졸았는데 눈을 떠 보니 천관의 집 앞이었던 것. 말에서 내린 김유신은 허리에 찬 칼을 뽑아 자신을 그리로 데려온 말의 목을 내려쳤다.
“말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말의 귀소본능을 몰랐던 김유신 탓이지요.”
강민수 교수는 위의 일화가 충분히 일어났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말은 길을 잘 찾는 걸로 유명한데 뛰어난 기억력과 예민한 후각, 시각, 청각 덕분이라고. 따라서 주인이 특별한 지시를 하지 않아도 평소에 자주 가던 곳으로 발길을 옮기곤 한다. 사실 말은 기억력이 상당히 뛰어난 동물이다.
예를 들어 제각각 독특한 패턴이 그려진 카드 20쌍을 보여주고 올바른 카드를 고르면 먹이를 주는 훈련을 시켜보자. 3개월, 6개월, 12개월이 지난 뒤 다시 시험을 쳐도 말은 거의 잊지 않고 카드의 각 쌍에서 정답인 패턴을 골라낸다. 이는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에게 해코지를 한 사람은 한참 뒤에 만나도 피하거나 거부하지만 잘해준 사람은 기억하고 최선을 다한다는 것.
미국 과학저술가인 스티븐 부디안스키는 1997년 펴낸 책 ‘말에 대하여’에서 조련사들이 말을 다룰 때는 말이 기억력이 뛰어난 반면 마음이 여린 동물이라는 사실을 늘 명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즉 말은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너무나 신경을 쓰기 때문에 때로는 대혼란에 빠지기도 한다는 것.
예를 들어 검은색 구유와 흰색 구유를 구별하는 훈련을 받은 말에게 둘 모두 회색 계열인 구유를 제시하면 말은 두 구유 사이를 맴돌며 어쩔 줄 몰라 한다. 즉 조련사는 말에게 애매한 신호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말이 얼마나 사람의 반응에 민감한가, 즉 눈치를 보는가에 대한 유명한 사례가 바로 ‘똑똑한 한스’ 이야기다. 20세기 초 독일 베를린의 한 학교 교사였던 빌헬름 폰 오스텐은 자신의 말 한스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수학 문제까지 푼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신문들은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고 마침내 프로이센 과학아카데미가 검증에 나섰다. 놀랍게도 한스는 위원들의 말도 알아들었다.
정답인 숫자만큼 앞발을 구르게 훈련을 받은 한스는 ‘8-3’이라는 문제를 내면 정확히 5번 발을 구르고 멈춘다. 위원들은 이 모습에 깜짝 놀랐지만 곧 한스 수학 실력의 실체가 밝혀졌다. 즉 한스는 자신이 발을 구르는 장면을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어디서 멈춰야 할지에 대한 정보를 얻었다. 4번 발을 구를 때까지의 긴장한 표정과 정답인 5번째 발을 구를 때 안도한 표정의 차이를 알아차렸던 것.
문제 정답을 모르는 사람이 지켜보자 한스의 수학 실력이 들통났다. 사실 폰 오스텐 역시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신호를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이다.
말과 사람, 차이점과 공통점
영장류인 사람과 유제류(발굽이 있는 동물)인 말은 포유동물이라는 것만 빼면 공통점이 없는 것 같다. 특히 다리와 발은 완전히 다르다. 말 뒷다리에서 흔히 무릎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실제로도 무릎으로 부른다)은 사실 사람의 발목에 해당한다. 말은 빨리 달리게 진화하면서 발가락뼈가 극적으로 늘어나 다리의 3분의 1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땅에 닫는 발굽은 사람으로 치면 발톱에 해당한다. 즉 사람이 말처럼 서있으려면 발레리나가 돼야 한다.
말 뿐 아니라 영양 같은 다른 유제류 초식동물도 다리구조가 같은 방향으로 진화했다. 박경원 차장은 “말의 몸 구조는 빨리 달리는 데 최적화됐다”며 “몸에 비해 다리가 길고 얇기 때문에 멀리 내달리면서도 드는 힘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즉 야구배트를 거꾸로 잡고 휘두르면 힘이 훨씬 덜 드는 것처럼 회전 반경이 큰 말단(다리의 아랫부분)이 가벼울수록 힘이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가벼워지면 그만큼 약해지는 게 아닐까.
박 차장은 “말은 관절을 단순화해 힘을 효율적으로 지탱할 수 있게 됐다”며 “대신 사람처럼 관절이 유연하지는 못하다”고 말했다. 말의 앞다리 관절은 앞뒤 운동만 할 수 있게 맞물려 있다. 사람은 앞뒤는 물론 안팎으로 움직일 수 있는 대신 불안정해 가만히 서 있을 때도 근육이 뼈를 잡아줘야 하므로 오래 서 있으면 피곤하다. 반면 말은 뒷다리 무릎관절이 특수하게 발달한 무릎뼈와 인대 덕분에 똑바로 서 있어도 에너지를 별로 쓰지 않는다. 말이 서서 잠을 잘 수 있는 이유다.
말과 사람 사이의 뜻밖의 공통점도 있다. 동물 가운데 엉덩이가 가장 발달한 종이 바로 말과 사람이다. 개나 침팬지가 걷는 모습을 뒤에서 보면 영 부실하다. 그런데 사람과 말은 엉덩이 근육이 통통하게 발달해 있다. 흥미롭게도 이런 구조는 두 종 모두 잘 달리기 위한 진화의 결과다. 강민수 교수는 “말은 엉덩이 근육 힘으로 달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차로 치면 후륜구동”이라고 설명했다. 동물은 근육이 수축할 때 내는 힘으로 움직이는데 말은 허벅지뼈를 감싸는 엉덩이가 발달한 것. 반면 회전반경이 큰 다리(엄밀히는 정강이와 발가락)에는 근육이 별로 없다. 사람 역시 엉덩이를 이루고 있는 큰볼기근이 잘 발달해 달릴 때 몸이 흔들려도 쓰러지지 않고 균형을 잡아준다.
말과 사람의 또 다른 공통점으로는 둘 다 땀을 흘려서 체온조절을 한다는 것. 포유류 가운데 땀을 많이 흘리는 건말과 사람뿐이다. 이 역시 오랜 시간 달리는데 적합하게 진화한 결과다. 사실 땀을 내는 능력은 말이 한 수 위로 같은 피부 면적에서 사람이 흘리는 양의 5배나 된다. 경주를 마친 말의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빗물이 흘러내리듯 땀이 줄줄 흐른다.
그럼에도 체온조절 능력은 사람이 한 수 위다. 사람은 말보다 작기 때문에 체중에 대한 표면적 비가 더 크고(사람은 35~40kg에 피부 표면 1m2인 반면 말은 90~100kg에 피부 표면 1m2이다) 개처럼 숨을 헐떡거려서 열을 내보낼 수도 있다. 반면 말은 입으로 숨을 못 쉬고 코로만 쉬기 때문에 호흡으로 체온을 식히는 효과가 미미하다.
[말은 사람처럼 땀을 내서 체온을 조절하는 동물이다. 한참 달린 뒤인지 온 몸이 땀범벅이 돼 번들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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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인간과 말 가장 아름다운 진화
1. 그 많던 말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2. 말은 엉덩이 힘으로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