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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룡 KAIST 화학과 교수 “제올라이트 연구로 사이언스 10대 성과에 뽑혔습니다”

interview

“화학이 여전히 창조적인 노력이 필요한 분야라는데 회의적인 사람은 제올라이트를 보라.”

저명한 주간과학저널 ‘사이언스’는 매년 마지막 호에 그해의 ‘10대 과학성과’를 발표한다. 2011년 선정된 10가지 가운데 하나가 위에서 언급한 제올라이트(zeolite)라는 물질에 대한 연구 성과다.

그런데 지난해 제올라이트 연구에서 ‘창조적인 노력’을 한 화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유룡 KAIST 화학과 교수다. 유 교수는 2007년 우리나라 과학자의 최고 영예라고 할 수 있는 국가과학자에 선정된 스타 과학자다. 지난 1월 3일, 연초라서 오히려 시간이 난다는 유 교수를 만나러 대전 KAIST를 찾았다.





큰 구멍과 작은 구멍이 같이 있는 구조 만들어

“금요일(2011년 12월 23일) 아침에 신문을 보다 깜짝 놀랐습니다.”

유룡 교수는 이날 신문에서 자신의 연구 결과가 ‘사이언스 10대 과학성과’에 뽑혔다는 기사를 봤다.

“저희는 제올라이트라는 다공성 물질을 연구하고 있는데, 세계에서 처음으로 작은 구멍과 큰 구멍이 동시에 뚫려 있는 제올라이트를 만들어 논문 발표 당시 주목을 받았죠(유 교수팀의 논문은 작년 7월 15일자 ‘사이언스’에 실렸다). 그런데 그게 이 정도로 주목받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노 크기의 미세한 구멍이 무수히 존재해 표면적이 매우 넓은 물질인 제올라이트는 세탁세제에 들어 있을 뿐 아니라 다양한 화학반응 촉매로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기존 제올라이트는 작은 구멍(지름 1nm(나노미터, 1nm=10-9m) 미만)뿐이어서 사용이 제한돼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유 교수팀interview이 특수한 분자를 합성해 육각기둥의 가운데에 큰 구멍(지름 3.5nm)이 있고 주변에 작은 구멍(지름 0.55nm)이 있는 제올라이트를 만드는 데 성공한 것.

“제올라이트에 이렇게 큰 구멍이 있으면 커다란 분자도 들어갈 수 있어 훨씬 다양한 물질에 대한 촉매로 쓸 수 있습니다. 또 촉매 효율도 높일 수 있지요.”

기존의 제올라이트가 작은 골목길뿐인 도심이라고 한다면 유 교수팀은 여기에 사방팔방으로 큰 길을 내 골목 구석구석까지도 차가 쉽게 들어가고 나갈 수 있게 만든 셈이다. 사실 유 교수는 제올라이트 분야에서 이미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학자다. 2010년에는 국제제올라이트학회가 3년마다 제올라이트 연구에서 탁월한 업적을 낸 과학자에게 주는 ‘브렉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 교수는 어떻게 제올라이트 분야에서 손꼽히는 석학이 될 수 있었을까.


마흔이 돼서야 창조적인 연구 시작

195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난 유 교수는 똑똑한 아이었지만, 그래서 오히려 진로를 잡는 데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어려서부터 각종 동물과 식물 이름을 줄줄 욀 정도로 자연에 관심이 많았던 유 교수는 생물학자가 되고 싶어 고등학교 2학년을 올라갈 때 이과를 지원했지만 “법대에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성화에다 마침 문과를 간 동급생이 이과로 옮기기를 희망해서 서로 ‘바꿔치기’를 해 문과로 갔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제 적성은 이과인 거예요. 그래서 혼자 이과 공부를 했죠.”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아버지도 결국 유 교수의 고집에 꺾였지만 조건을 내걸었다. 당시만 해도 취업이 안 되는 생물학과는 안 되니(유 교수가 차선책으로 내세운 화학과도 안 되고) 대신 공대를 가라는 것. 결국 유 교수는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들어갔다.

“대학에서 공부를 해보니 전 역시 공대 체질이 아니더라고요.”







자연을 ‘변화’시키는 것(공학)보다 자연을 ‘이해’하는 데(자연과학) 더 관심이 많았던 유 교수는 학비가 공짜인데다 병역특례 혜택도 있는 KAIST 화학과 대학원에 진학했다. 여러 우회로를 거쳐 마침내 자신의 길을 찾은 유 교수는 내친김에 미국 스탠퍼드대로 박사과정 유학을 떠났다.

“솔직히 실망이 컸습니다. 지도교수가 굉장히 유명한 분이었는데 너무 바쁘셔서 두세 달에 한 번 면담하는 게 고작이었죠. 지금 생각하면 박사학위를 받은 것만 해도 고마울 지경입니다.”

그래도 이때 제올라이트를 처음 만났다. 그의 연구 주제는 금속이 들어 있는 제올라이트의 내부 구조를 밝히는 일이었다.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명문대를 졸업했지만 국내에서 일자리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학부가 ‘화학과’가 아니라 ‘화공과’ 출신이어서 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음에도 화학과에서 뽑아주지 않았던 것. 지금이야 학문간 융합 시대이지만 당시만 해도 순혈(純血)주의가 뿌리 깊던 시절이었다.

결국 그는 학부생만 있는 한국과학기술대 화학과에 취직했다. 한국과학기술대가 KAIST(당시에는 대학원 과정만 있었다)와 통합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에 기대를 걸었다. 3년 동안 학생들만 가르치며 연구에서 손을 떼고 있던 유 교com수는 1989년 두 기관이 통합되면서 KAIST 교수가 됐다.

“1990년 처음 대학원생이 한 명 들어왔습니다. 연구비도 500만 원 받았죠.”

이렇게 시작한 유 교수팀의 연구 주제는 X선 흡광 분석을 통해 물질의 구조를 밝히는 일로 미국에서 박사과정 때 하던 실험을 조금 변형한 것이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다.

“이 때만 해도 박사과정 때 했던 일을 계속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없었죠. 진짜 연구가 무엇인가를 몰랐습니다.”

스탠퍼드대 박사에 KAIST 교수. 겉으로는 성공한 삶으로 보였지만 이렇게 가다가는 이류, 삼류 과학자로 적당히 지내다 은퇴하는 길이 뻔히 보였다. 그런데 1994년 우연히 일본에서 열린 한 학회에 갔다가 미국의 화학회사 모빌이 만든 MCM-41이라는 실리카 다공성 물질에 대해 알게 됐다.

“이 물질에 백금 나노입자를 넣어 구조를 분석해볼까 했는데 MCM-41을 구할 수가 없더군요. 고민을 하다가 저희가 직접 합성해보기로 했습니다.”

물리화학자로 구조분석만 해온 유 교수가 다공성 물질의 합성에 뛰어들었다. 나이 마흔이 돼서야 처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 독자적으로 실험을 설계한 것이다. 막상 부딪쳐보니 다공성 물질의 합성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또 자기 아이디어가 실현됐을 때 예전에는 맛보지 못한 기쁨을 느꼈다.




제올라이트 분야 아직 노벨상 안 나와

“이렇게 몇 년 해보니까 슬슬 연구에 자신감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네이처’나 ‘사이언스’ 같은 저널에 논문을 내보자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이런 유명 저널에 논문이 실리려면 그 내용이 독창적이야 한다. 이때부터 유 교수의 숨은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유 교수팀은 실리카 다공성 물질을 틀로 해서 나노탄소 파이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 백금나노입자를 넣으면 골고루 분산돼 촉매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 이 연구를 실은 논문이 과학저널 ‘네이처(2001년 7월 12일자)’에 실리면서 유 교수는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실험실을 찾은 유 교수가 한 대학원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유 교수의 아이디어와 대학원생들의 열정이 합쳐져 독창적인 연구결과가 나온다.]

 


“나노탄소 연구로 한참 재미를 봤지만 여러 실험실에서도 이 분야에 뛰어들면서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그래서 2004년부터 새로운 주제를 찾기 시작했죠.”

블루오션이 레드오션이 된 것이다. 그래서 뛰어든 게 바로 구멍이 큰 제올라이트를 합성하는 연구다. 이런 물질을 만들면 쓸모가 많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외국의 유명 실험실에서도 번번이 실패한 어려운 과제였다. 2006년부터는 기존 연구를 마무리하고 본격적으로 제올라이트 연구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2007년에 국가과학자가 된 것.

“사실 2007년이 제 연구인생에 가장 큰 위기였습니다. 1년 내내 논문을 두 편밖에 내지 못했어요. 그것도 지명도가 높지 않은 저널에 말입니다.”

어려운 과제에 뛰어든 유 교수로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사실 이런 혁신적인 연구를 하라고 그를 국가과학자로 뽑아준 것 아닌가.

“우리나라의 연구평가 풍토는 가혹합니다. 한 해만 성과(논문)가 안 나와도 가만히 넘어가지 않지요.”

국가과학자는 원래 3년마다 평가를 받지만 그 사이에도 매년 연구실적을 점검받는다. 2008년 점검결과 보고서는 ‘2007년 유 교수팀이 낸 논문의 질과 양이 너무 나쁘다’고 명시하고 있었다. 1년도 못 참아주는 우리나라 연구풍토에 압박감은 높아졌다. 그러나 다행히 2nm 두께의 나노판 제올라이트를 합성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해 2009년 ‘네이처’에 논문을 실었다.

“사실 2009년 결과는 큰 구멍과 작은 구멍이 같이 있는 제올라이트를 만드는 실험에서 실패한 것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꿩 대신 닭이었지요. 아무튼 이 논문 덕분에 극심한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매년 15억 원의 연구비를 쓸 수 있는 국가과학자조차 여전히 단기적인 연구성과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우리나라 연구풍토가 아쉬운 대목이다. 아무튼 2010년 단계 평가에서 유 교수는 최고 점수인 ‘S’를 받았다.

“이게 바로 ‘네이처’의 힘이지요. 한편으로는 씁쓸하기도 합니다.”

유 교수의 더 심각한 고민은 따로 있다. 연구비 걱정은 없는데 문제는 연구할 사람이 없다는 것. 유 교수팀 정도의 실험실이면 박사후연구원(포닥) 서너 명은 유지할 수 있지만 지금은 한 명 뿐이다. 그래도 대학원 학생들이 워낙 열심이다.

“대학들이 국내에서 포닥을 하면 연구결과가 좋아도 교수로 잘 뽑아주지 않아요. 그러니 우수한 박사들이 오지 않죠.”

최근 서울대 공대에 수시로 합격한 16살 영재학생이 결국 연대 치대를 택했다는 뉴스에 충격을 받았다는 유 교수는 결국 노벨과학상 수상자 같은 초대형 스타 과학자가 나와야 뛰어난 학생들이 과학에 몰릴 것으로 내다봤다.

“우리나라에 세계 최고 수준의 과학자가 100명은 돼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요? 지금은 10명 정도입니다만.”

유명 과학자와 인터뷰를 할 때면 늘 그렇듯이 이번에도 마지막에 노벨상 이야기가 나왔다. 흥미롭게도 화학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큰 제올라이트 분야에서는 아직 노벨상 수상자가 없다. 수상 범위에 든 화학자들이 수상이 무르익을 때쯤 사망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해 외국의 한 블로그에서 노벨화학상을 예측했는데 제올라이트 분야에서 제 이름이 언급되더군요. 뜻밖이었지만 솔직히 자극이 됐습니다. 게다가 철회된 황우석 교수팀의 연구논문 말고는 우리나라 과학자가 주도한 연구 결과가 ‘10대 과학성과’로 뽑힌 건 처음 아닙니까?”

예전 같으면 기자들이 노벨상 후보 운운하면 “말도 안 되는 얘기”라며 손을 내젓던 유 교수의 눈빛에서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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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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