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제주역까지 단 25분!’
이런 팻말이 서울역에 달릴 날이 올까. 서울역에서 제주(제주국제공항 기준)까지 직선거리는 약 450km. 이 거리를 25분 만에 도착하려면 열차가 시속 1000km 이상으로 달려야 한다. 이 속도는 ‘현재 우리나라 땅위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KTX(시속 약 300km)보다도 3배 이상 빠르며, 국제선 비행기와 비슷하다!
전 세계 과학자들은 차세대 첨단열차로 진공터널을 달리는 열차, 즉 진공튜브열차(vactrain)를 지목하고 있다. 터널(튜브)을 공기가 거의 없는 상태로 유지하면, 그 안을 달리는 열차는 공기 저항을 거의 받지 않아 빨리 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이나 중국, 일본, 스위스, 네덜란드처럼 철도기술이 발달한 나라들은 일찍부터 진공튜브열차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중국 시난교통대 과학자들은 지난해 “진공튜브열차는 현재의 비행기보다도 더 빨리 달릴 수 있으며, 이론상으로는 시속 2만km까지 달릴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과학자들은 실제 크기의 수십 분의 1 정도인 모형열차를 만들어 진공터널 안에서 정말 원하는 만큼 열차가 빨라지는지 실험했다. 그런데 진공터널 안에서 진공상태를 유지하며 초고속으로 모형열차을 달리게 하는 발사장치를 설계하기가 어려웠다. 또 공기역학적으로 정확한 수치를 얻기에는 모형열차가 너무 작고, 속도를 내기에 터널이 너무 짧았다. 열차가 좁은 터널에서 완벽한 직선운동을 하지 못하는 점도 한계였다. 직선운동을 못하면 열차가 터널 벽면에 스치게 돼 공기역학적인 실험이 불가능하다.
지난 10월 25일, 한국철도기술연구원(이하 철도연)의 김동현 박사팀은 이런 한계점을 극복하고 실제 크기의 52분의 1 정도인 모형열차를 진공터널에서 시속 약 700km로 달리게 하는 데 세계 최초로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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➋ 모형열차는 미사일처럼 길쭉하고 주둥이가 뾰족하다. 공기저항을 최소로 줄여 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다.
➌ 공기가 거의 없는 (아)진공터널. 시속 400km대로 달리는 모형열차가 진공터널 안에서는 시속 약 700km로 달렸다.
성공 비결은 열차 관통하는 팽팽한 와이어
“위험할 수 있으니 좀 떨어져서 보세요.”
“뻥!”
연구원이 열차 출발을 알리는 신호를 보내자, 뻥튀기 기계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눈앞을 빠르게 지나갔다. 뭐가 지, 나, 갔, 나? 저 멀리 제동장치 사이에 뭔가 끼어 있는 걸 보고나서야 열차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굉장히 빠르죠? 방금 전 모형열차는 시속 약 400km로 지나갔습니다. 이 열차가 진공터널 속에서는 시속 약 700km로 달릴 수 있어요.”
김동현 박사가 미사일처럼 주둥이가 뾰족한 장비를 보여주며 말했다. 실험에 사용한 모형열차다.
11월 중순, 기자는 경기 의왕시에 있는 철도연 실험동을 방문했다. 모형열차 여러 대와 투명한 관처럼 생긴 터널, 열차를 출발시키는 장치, 터널 속 공기를 빼주는 장치, 그리고 열차를 멈추는 제동장치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연구팀이 만든 모형열차는 지름 5.8cm, 길이 60.3cm다. 17m인 진공터널(지름 10cm)을 포함해 총 40m나 달렸다. 이것은 네덜란드항공우주연구소가 만든 모형열차(실com제의 180분의 1)보다 훨씬 길고, 일본철도종합기술연구소의 모형레일(20m)보다 길다. 전체 주행거리가 길수록 공기역학 실험을 하기가 좋다.
모형열차는 공기의 힘으로 달린다. 압축돼 있던 공기를 터뜨리면 마치 공기총에서 총알이 튕겨 나가듯이 빠르게 나아간다(에어건 방식). 출발 후 새어나간 공기는 덤프탱크로 빨아들인다. 시속 수백km로 출발한 모형열차는 사다리 모양의 철로 대신 지름 3mm의 와이어를 타고 달린다. 펌프로 공기를 빨아낸 진공터널을 지날 때는 원래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린다. 와이어 중간에 설치된 속도 측정장치는 모형열차가 출발한 속도, 달린 속도, 터널 안을 지날 때의 속도를 측정한다.
모형열차가 와이어에서 달리는 이유는 마찰을 최소로 줄이고 경로를 이탈하는 것을 막아 정확한 공기역학 실험을 하기 위해서다. 해외 과학자도 이런 방식을 선택했다. 네덜란드 연구팀은 모형열차의 양 옆에 귀처럼 고리를 달아 와이어 2개에 연결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큰 고리가 와이어를 타고 달리기 때문에 공기역학적으로 정확한 결과를 얻기 어렵다. 김동현 박사는 열차 가운데로 와이어를 관통시켜 열차가 와이어를 타고 달리도록 만들었다. 에어건 방식을 이용하며 와이어 1개에서 주행하는 실험 장치가 있는 곳은 철도연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와이어를 고정해 레일을 만드는 데에도 고유기술이 필요했다. 열차가 달릴 때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방지하려면 와이어를 최대한 당겨야 한다. 철도연 연구팀은 1.2mm 홈이 파인 두 장의 금속판을 맞대 와이어를 단단히 고정하는 기술을 개발했다. 진공터널 안으로 공기가 새어 들어가지 않게 에어건을 와이어와 직각으로 장착한 것도 연구팀의 독창적인 아이디어였다.
진공터널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열차가 달리는 터널은 진공(0기압) 상태가 아닌 아진공 상태(0기압~1기압 사이)다. 연구팀은 터널 속 기압을 1.00~0.21기압으로, 열차의 추진력을7.04~17.83kg/cm2로, 열차의 속도(대기압에서)를 시속 189~514km로 다양하게 변화시키면서, 어느 조건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달리는지 관찰했다. 터널 속 진공도가 10% 올라갈 때마다 열차의 속도는 시속 15km씩 올라갔다. 그 결과 모형열차가 달리기 가장 좋은 조건은 0.21기압이었다. 이때 시속 514km로 달리는 모형열차는 진공터널에서 시속 684km로 달렸다. 김동현 박사는 “모형이 아닌, 실제 열차로도 실험 때 얻었던 속도만큼 달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자기부상+직선거리=해저 장거리가 유리
진짜 진공튜브열차는 어떻게 달릴까. 현재 과학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진공튜브열차의 에너지원은 전기다. 하지만 바퀴가 레일에 직접 닿아 달리면 마찰력이 커지기 때문에 초고속열차를 버틸 수가 없다. 전문가들은 열차가 시속 500km 이상으로 달리려면 자기력으로 선로 위로 떠서 달려야 할 것으로 보고 있다(자기부상열차).
진공튜브열차가 자기부상열차의 형태로 탄생하면 바퀴뿐 아니라 모형열차에 사용한 와이어나 에어건, 덤프탱크, 제동시스템도 필요 없어진다. 압축공기를 발사하지 않고 전류만 흘려보내도 열차가 출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동 장치가 없어도 자기력을 반대로 하면 열차가 멈춘다.
김동현 박사는 “기존과는 다른, 진공튜브열차를 위한 기찻길을 구축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은 모든 기찻길에 터널을 짓고 진공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는 뜻만은 아니다. 김 박사는 “열차가 초고속으로 달리면 지금처럼 구불구불한 길은 달리기가 어렵다”며 “커브가 거의 없는 직선으로만 달릴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모든 기찻길을 새로 짓는 것은 어렵다. 터널을 짓는 데에는 엄청난 양의 콘크리트와 인력, 시간, 그리고 진공 상태를 유지하는 전력이 들기 때문이다.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지는 셈이다. 자기부상열차는 가속시키는 데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기 때문에 단거리 운행에는 오히려 휠레일(바퀴) 방식이 유리하다. 전문가들은 시내 같이 짧은 거리에서는 기존 지하철 노선에서 휠레일 방식으로 운행하고, 국제선 같이 긴 거리는 땅속이나 해저를 뚫어 자기부상열차 방식의 새로운 기찻길을 짓는 방법을 생각해냈다.
땅속이나 해저는 거의 직선으로 터널을 뚫기가 편하고 아진공 상태를 유지하기가 유리하다. 그래서 일찍부터 해외 전문가들은 영국 런던과 미국 뉴욕 사이, 즉 대서양 아래로 다니거나 중국이나 러시아 대륙을 지하로 횡단하는 진공튜브열차를 상상한다. 김 박사는 “경남이나 호남에서 해저(지하)를 지나 제주까지 닿는 노선도 상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비행기처럼 안락, KTX처럼 안전
진공튜브열차를 타면 어떤 기분이 들까. 너무 빨리 달리는 탓에 머리가 멍해지거나 심한 멀미가 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아침에 먹은 식사 메뉴를 다시 꺼내봐야 할지도 모르겠다.
전문가들은 진공튜브열차가 비행기처럼 편안하고 아늑하면서도 그보다 더 안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비행기처럼 에어포켓이나 제트기류를 만나지 않아 심한 진동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엔진 소음이 심하게 나지 않는데다 KTX처럼 외부와 내부를 완벽하게 단절할 수 있어 소음이 나더라도 열차 내로 들어오지 않게 할 수 있다. 터널 내를 달리기 때문에 주변 민가에 소음 공해도 일으키지 않는다. 또 진공튜브열차는 지상과 가까워 사고가 나더라도 비행기에 비해 안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다. 공기가 희박한 곳에서 속도를 높이는 원리를 적용한 비행기를 생각하면 된다. 비행기는 공기 저항을 줄이기 위해 연료가 가장 적게 드는 높이(경제고도)까지 올라간 뒤 수평비행을 한다. 대개 10km로 약 0.26기압이다. 김동현 박사가 실험으로 밝힌, 진공튜브열차가 달리기에 가장 적합한 터널 내 기압 조건과 비슷하다.
김 박사는 “진공튜브열차를 타면 비행기를 탈 때처럼 열차 안팎의 기압이 달라 비행기와 마찬가지로 실내 압력을 조절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승객들이 역에 도착해 대기압 환경으로 나갔을 때 귀가 멍멍해지고 소리가 잘 안 들리거나, 귀가 아플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열차가 사고 났을 때 사람들이 공기가 거의 없는 공간에 노출되는 것은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김 박사는 “터널 내에 외부 공기를 제공하는 시스템을 설치해, 사고를 감지하면 ‘사람이 숨을 쉴 수 있을 만큼’만이라도 공기를 들여보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화재가 날 경우 공기가 희박해 불이 잘 번지지 않아 오히려 대참사를 막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열차를 좀 더 빠르게 달리게 하고 건설비를 줄이기 위해 터널의 단면적을 줄이는 한편, 사고가 났을 때 사람들이 대피할 수 있는 경로나 시스템을 만드는 방안도 연구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빠른 속도에 비해 안전한 진공튜브열차가 탄생하면 비행기와 경쟁 관계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 박사는 “세계 최초로 모형 진공튜브열차를 초고속으로 달리게 하는 실험에 성공한 만큼, 상용화에 한발 앞섰다는 자부심이 든다”면서 “앞으로 자기부상 같은 초고속 열차 기술과 탄탄한 안전시스템을 개발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 철도연은 매우 작고 가벼운 잠자리가 강풍 속에서도 자세를 제어하고 비행할 수 있는 비결이 공기역학적으로 잘 진화했기 때문이라는 가정 하에 잠자리 날개처럼 일정한 패턴의 망사로 도배한 모형열차가 더 빨리 달릴 수 있는지 실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