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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 꿀벌 초유기체


“왱~ 왱~ 왜애앵~.”
셀 수 없이 많은 꿀벌(Apis mellifera, ‘꿀을 나르는 벌’이라는 뜻)들이 날아다녀 귓가에서 러시아 작곡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왕벌의 비행’이 연주되고 있는 듯한 이곳은 경기 수원시 서둔동에 있는 농촌진흥청 국립농업과학원이다. 일렬로 길게 늘어선 작은 냉장고만 한 상자 안에는 널빤지 모양의 벌집이 책처럼 꽂혀 있다. 상자 한쪽 아래에 뚫린 작은 구멍으로 수많은 꿀벌들이 기어 나오거나 날아 들어가고 있다. 이 구멍은 꽃꿀이나 꽃가루를 채집하러 가는 벌과 이미 채집하고 돌아온 벌이 집으로 드나드는 대문이다. 상자 하나에는 얼핏 보기에도 7장쯤 돼 보이는 벌집이 꽂혀 있다. 벌집 한 장마다 많은 벌들이 잔뜩 달라붙어 있는데, 자기 집이 어딘지 방은 어디에 붙어 있는지 혼동하지 않고 잘도 찾아간다.

국립농업과학원 잠사양봉소재과 이만영 박사는 국내에 몇 안 되는 꿀벌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양봉용 망사 옷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도 사진을 찍으려고 꺼낸 맨손이 벌에 쏘일까 봐 잔뜩 긴장한 기자와 달리, 이 박사는 평상시 차림대로 벌집 상자를 열어 벌집을 한 장씩 보여주며 벌들을 쓰다듬는다. 크고 납작한 집마다 꿀벌 수만 마리가 득실득실하다. 이 박사가 손으로 살살 건드리자 벌들이 ‘아빠’를 알아보는지 슬슬 피한다. 그가 손으로 벌들을 헤친 공간에는 방마다 맑고 끈끈한 꿀이 가득하다. 주변 방에는 꿀 안에 작고 하얀 쌀알 같은 것이 하나씩 들어 있다. 통통한 구더기처럼 생긴 꿀벌 애벌레다. 아까 득실거리던 벌 무리는 방을 하나씩 차지하고 있는 애벌레들에게 꿀과 꽃가루를 먹이는 ‘유모’였던 것이다.

애벌레에게 로열젤리 먹이는 ‘포유동물’


“꿀벌 사회에는 계급이 있고, 날갯짓을 하거나 페로몬을 분비해 서로 의사소통을 합니다. 인간 사회처럼 각자 역할이 있어 개체 수가 수만 마리에 달하더라도 질서정연하죠.” 이 박사는 꿀벌 무리가 모인 곳마다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무슨 상황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다 똑같아 보이는 방에 똑같은 벌 무리처럼 보이지만 방에 저장된 물질이나 벌들이 하고 있는 일은 모두 다르다. 벌에는 여왕벌과 수벌, 일벌 등 3개의 계급이 있는데, 여왕벌과 수벌은 알을 낳아 자손을 번식하는 데에만 전념하며 일벌은 꿀벌 사회에서 필요한 그 외의 모든 일을 수행한다. 미국 생물학자 윌리엄 윌러 박사는 “꿀벌 사회 전체는 척추동물 1마리와 마찬가지”라며 “여왕벌과 수벌은 각각 암수 생식기관, 일벌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메커니즘을 담당하는 온몸”이라고 설명했다. 어느 날 무리 하나가 몽땅 사라진다면 꿀벌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칠 만큼, 꿀벌은 서로 유기적으로 관계 맺으며 사회를 유지하고 있다. 윌러 박사는 꿀벌 사회의 이런 특성을 ‘초유기체(superorganism)’라고 정의했다.


똑같이 생긴 수천 마리의 벌 가운데 어떤 한 마리가 눈에 확 들어온다. 바로 여왕벌이다. 일벌은 배가 짧고 뭉툭한 반면 여왕벌은 배가 길고 뾰족하다. 산란관이 발달해 배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여왕벌은 평생 알 낳기에만 전념한다. 집짓기에 참여하지 않으며, 먹이를 구하러 나가지 않고, 자신이 낳은 알과 애벌레를 돌보는 일조차 하지 않는다. 역시 생식만 담당하는 수벌 5~10마리와 함께 여왕벌은 20~30m의 공중에서 짝짓기(신혼비행)를 한다.

나머지는 모두 일벌이다. 일벌은 여왕벌이 낳은 알에서 애벌레가 건강하게 부화하도록 보살피고, 애벌레에게 줄 먹을거리를 채집한다. 애벌레가 번데기를 거쳐 튼튼한 벌이 되도록 키우는 것도 일벌이며, 벌집 곳곳을 청소하는 일도 일벌의 몫이다.


독일 꿀벌생물학자인 위르겐 타우츠 박사는 그의 저서 ‘경이로운 꿀벌의 세계’에서“꿀벌 초유기체는 척추동물 중에서도 포유동물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어미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듯이 일벌도 머리에 든 먹이샘에서 분비한 로열젤리를 애벌레에게 먹이기 때문이다. 일벌들은 새로 태어난 애벌레들에게 유기산과 지방으로 이뤄진 로열젤리를 3일간만 먹이고 4일째부터는 꿀과 꽃가루를 먹이는데, 장차 ‘여왕’이 될 애벌레에게는 성체가 될 때까지 로열젤리를 준다.

먹이를 구하러 떠났던 벌들이 돌아왔다. 저마다 양쪽 뒷다리에 둥글고 커다란 뭉치(12∼29mg)를 달고 있다. 샛노란 뭉치는 꽃가루 덩어리이며, 약간 투명한 갈색을 띠는 뭉치는 나무 진액(프로폴리스) 덩어리다. 벌은 꽃가루를 앞다리와 중간다리로 단단히 뭉쳐 뒷다리에 달린 털에 매달아 나른다. 또 꿀을 자기 무게의 절반(36∼52mg)만큼이나 챙길 수 있는데, 꽃에서 꿀을 빨아들인 뒤 위장의 일부인 ‘꿀주머니’에 담아 나른다. 집에 도착해 꿀을 입으로 다시 뱉어낼 때 효소와 섞여 미네랄이 풍부해진다. 꿀 1kg을 모으기 위해 일벌 5000마리가 10번이나 왕복해야 한다.

꿀벌이 모으거나 만드는 물질은 이뿐이 아니다. 일벌은 복부 7마디 중 3~6마디에서 생산하는 밀랍으로 집을 짓는다. 벌집에 있는 방은 육각형 모양인데, 일벌과 수벌, 여왕벌이 지내는 방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 일벌의 방(지름 약 5mm)보다는 수벌의 방(지름 약 6.25mm)이 약간 크고, 두 종류의 방 입구가 옆을 향하는 것과 달리 왕대라 불리는 여왕벌의 방(길이 약 25mm)은 손가락 모양으로 돌출돼 입구가 땅을 향한다.

원형춤, 떨기춤 추고 페로몬 내는 의사소통법


대문으로 기어 들어가던 꿀벌들이 갑자기 멈춰서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집 안으로 영 들어가지를 않아 자세히 살펴보니 복부에 하얀 선이 굵게 나타나 있다. 이만영 박사는 “일벌들이 복부 6∼7마디(나사노프샘)에서 페로몬을 발산해 동료에게 집을 알려주는 것”이라며 “배에 나타난 흰 띠가 증거”라고 설명했다. 꿀벌은 위험한 상황을 알릴 때도 페로몬을 발산한다. 큰턱샘에서 적의 공격을 알리는 ‘경보 페로몬’을 내거나, 자기 벌침을 적에게 쏘면서 ‘벌침 경보 페로몬’을 내 동료에게 경고 메시지를 날린다. 여왕벌은 같은 암컷인 일벌의 산란관이 발달하는 현상을 억제하기 위해 큰턱샘에서 ‘여왕벌 페로몬’을 낸다.

재미있는 사실은 꿀벌이 공중에서 ‘춤’을 추는 방법으로 동료에게 메시지를 전한다는 점이다. 독일 생물학자 칼 폰프리시 박사는 일벌이 동료에게 꿀이 많은 꽃(밀원)의 위치를 알려주는 춤을 발견했다. 벌집으로부터 밀원이 10m 안에 있을 때는 공중에서 원을 그리고(원형춤) 10∼100m 안에 있을 때는 초승달을 그리며 100m 밖에 있을 때는 숫자 8을 그리는 춤을 주로 춘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벌은 집 안이 더러울 때 나선형을 그리거나 불규칙적으로 이리저리 뛰면서 배를 좌우로 힘껏 흔든다. 꿀과 꽃가루가 가득해 기분이 좋을 때 일벌은 앞다리를 다른 동료의 몸에 올리고 5~6회 정도 배를 상하좌우로 흔든다.

지난 2월에는 꿀벌이 동료에게 경고 메시지를 보낼 때도 페로몬을 발산하는 동시에 떨기 춤을 춘다는 연구 결과가 생물학 분야 국제저널 ‘커런트 바이올로지’에 실렸다. 벌은 0.1초간 몸을 약 38번이나 떨어 동료들이 위험한 곳에 다가가지 못하게 알리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국 샌디에이고대 생물학과 제임스 니 교수는 “지금까지 과학자들은 꿀벌이 날갯짓으로 긍정적인 신호만 전한다고 알고 있었다”며 “날갯짓으로 부정적인 신호를 내보낸다는 사실을 처음 밝힌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벌집 하나에는 꿀벌 집단이 여러 개 형성돼 있기 때문에 각자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긍정적, 부정적인 신호를 내보낸다”고 덧붙였다. 초유기체를 유지하기 위해 꿀벌은 각자 역할에 충실할 뿐 아니라 춤을 추고 페로몬을 발산해 의사소통을 하는 셈이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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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이정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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