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10층석탑. 국보 제2호인 이 석탑은 10년째 커다란 유리벽에 둘러싸여 있다.
햇빛이 반사돼 보기 불편하고 사진도 잘 찍기 힘들다. 그래도 유리벽을 설치해 두는 이유는 산성비와 새 배설물로부터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문화재를 훼손하는 대표적인 새가 바로 비둘기다.
오랫동안 ‘평화의 상징’으로 사랑받아 온 비둘기가 천덕꾸러기로 전락하고 있다. 급기야 환경부가 지난 5월 비둘기를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했다.
가축이냐 야생동물이냐
그동안 농민이나 문화재 관리자, 식품업자에게는 비둘기가 더 이상 평화의 상징이 아니었다. 식품공장이나 사료공장의 곡식 창고는 비둘기에게 그야말로 천국이다. 아예 가마니 속에 머리를 박고 곡식을 먹어 치우기 일쑤니 말이다.
비둘기 배설물이 문화재를 부식시키기도 한다. 배설물의 주요 성분인 요산이 강한 산성을 띠기 때문에 나무나 돌이 견뎌내기 어렵다. 고궁에 가보면 처마 밑에 쳐둔 철망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비둘기가 둥지를 틀지 못하게 막기 위해서다.
특히 피해가 큰 곳은 농가다. 과일을 비롯한 농작물을 비둘기가 떼로 달려들어 쪼아 먹는 통에 심하면 1년에 피해액이 수백억 원에 달하는 경우도 있다. 농작물 피해의 주범은 멧비둘기. 국내에 서식하는 5종의 비둘기(멧비둘기, 양비둘기, 흑비둘기, 염주비둘기, 녹색비둘기) 중 하나로 주로 산속에 산다. 멧비둘기는 이미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돼 있었다.
이번에 멧비둘기에 이어 유해 야생동물의 불명예를 안은 종은 집비둘기. 국내에서는 최근까지도 집비둘기가 가축으로 분류돼 있었다. 원래 야생에서 살던 비둘기를 사람이 사육하면서 개량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귀소본능이 강하고 고기 맛이 좋은 비둘기를 기르면서 연락책이나 식용으로 활용해 왔다. 이렇게 해서 개량된 집비둘기가 세계적으로 약 500종이나 된다.
그러나 공원이나 아파트단지 등으로 나와 독자적으로 살아가는 집비둘기가 많아지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비둘기가 가축이냐 야생동물이냐를 두고 논란이 생겼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더 이상 가축이 아니라고 주장했고, 환경부는 산이나 강이 아니라 도시에 살기 때문에 야생동물이 아니라는 입장을 고집했다.
지난해 11월 법제처는 “‘야생동물’은 인간이 소유해 기르지 않는 모든 동물을 총칭하는 개념”이라며 “도시에서 산다는 이유만으로 야생동물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렇게 비둘기는 가축이 아니라 야생동물이 됐다. ‘비운(悲運)’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젖’ 먹고 자라는 새
식품업계나 문화재 관계자들은 이미 예전부터 집비둘기 피해의 심각성을 강조하며 수차례 민원을 제기해왔다. 그러나 가축으로 분류돼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잡을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실정이었다.
야생동물 관리를 담당하는 환경부는 이번에 아예 ‘야생 동·식물 보호법 시행규칙’을 개정해 집비둘기를 유해 야생동물에 포함시켰다. ‘유해’하다고 판단되면 허가를 받아 잡을 수 있게 법을 바꾼 것이다. 비둘기는 이제 자신의 운명을 사람에게 맡기게 된 셈이다. 아무나 아무 때나 마구 비둘기를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비둘기 때문에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당 지역의 지방자치단체장에게 어떻게 얼마나 잡을 건지 허가를 받아 전문가나 관련 업체에 포획을 의뢰해야 한다.
다른 나라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미국과 프랑스도 이미 비둘기를 유해 야생동물로 지정했다. 일일이 잡아 불임시술을 해서 날려 보내거나 먹이에 불임약을 섞어 주는 방법도 고안되고 있다.
사실 비둘기 자체가 사람에게 해로운 건 아니다. 너무 많은 게 문제다. 수가 급증하는 바람에 배설물도 늘고 털도 많이 날리며 피해가 커진 것이다. 실제로 다른 새들에 비해 비둘기는 번식력이 특히 뛰어나다.
보통 새들은 1년에 1번 알을 낳는다. 애벌레 같은 먹이가 많은 봄에 주로 번식한다. 그러나 집비둘기는 사육되다 보니 늘 먹이가 풍부했다. 이 때문에 사시사철 알을 낳아 새끼를 키울 수 있게 진화했다.
희한하게도 비둘기는 어릴 때 ‘젖’을 먹으며 자란다. 알을 낳은 어미 비둘기는 목 안쪽의 주머니에서 젖을 분비한다. 새끼는 태어난 뒤 약 1주일 동안 어미 목에 부리를 넣고 젖을 빨아 먹는다.
호남대 생물학과 이두표 교수는 “비둘기 젖은 보통 우유보다 단백질 함량이 매우 높다”고 설명했다. 알에서 깬 직후의 새끼는 소화능력이 부족해 애벌레나 곡식을 잘 먹지 못하기 때문에 어미가 젖으로 고단백 영양을 공급해준다는 뜻이다. 이렇게 자란 새끼는 20일이면 성체가 된다.
인체 유해 여부는 미확인
‘유해’ 야생동물이라고 하니까 마치 비둘기 가까이만 가도 큰일 날 것 같은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그러나 아직까지 비둘기로 인한 피해는 농작물 감소나 건물 부식, 털 날림 등이 대부분이다. 사람의 건강에 직접적인 피해를 주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연구된 바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건양대 의대 지희윤 교수팀은 2003~2004년 서울에서 채집한 비둘기 배설물에서 곰팡이의 일종인 크립토코커스균을 검출했다. 이 균은 드문 경우 뇌수막염이나 폐질환을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 교수는 “비둘기 배설물이 마르면 크립토코커스균이 떨어져 나와 공기 중에 떠다니다 사람이 호흡할 때 폐로 침투할 수 있다”면서도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처럼 면역체계가 비정상적으로 약해진 사람에게만 문제가 될 뿐 건강한 사람은 아이나 어른이나 크게 우려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비둘기 배설물이라고 해서 다 이 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래된 배설물에서 주로 발견된다. 지 교수는 “배설물 성분 중 질소화합물이 크립토코커스균을 잘 자라게 하는 환경을 만드는 것으로 추측된다”고 덧붙였다.
비둘기가 평화의 상징에서 멀어진 지는 사실 한참 됐다. ‘돼둘기’나 ‘닭둘기’ 같은 굴욕적인 별명도 얻었다. 돼지처럼 뚱뚱해지고 닭처럼 날지 못할 정도로 비대해졌다는 뜻이다. 이것도 모자라 이제 유해한 동물까지 됐다.
하지만 인간도 책임을 면할 순 없다. 시도 때도 없이 먹이를 던져주며 번식력을 키워준 장본인이 바로 우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