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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날의 검’ 항생제

세균 감염으로부터 인류 구한 항생제의 불편한 진실

1928년 9월 3일 6주간 여름휴가를 지내고 돌아온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은 깜짝 놀랐다. 샬레에는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었고, 포도상구균은 모두 죽어 있었다.
그가 실수로 샬레 뚜껑을 덮지 않고 휴가를 가는 바람에 곰팡이가 날아와 포도상구균을 전멸시킨 것.
페니실린은 그렇게 탄생했다.
플레밍의 ‘실수’로 페니실린이 발견된 지 80년이 지났다.
페니실린은 포도상구균을 물리치며 맹활약했지만 세균도 가만있지는 않았다.
페니실린의 ‘약발’이 듣지 않는 강력한 세균들이 등장했고,
이제는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슈퍼박테리아가 판치고 있다.
슈퍼박테리아를 잡을 묘안은 없을까.
슈퍼박테리아를 뒤쫓는 슈퍼항생제를 만나보자.

감기에 걸리면 약을 먹어야 낫는다? 지난 6월 EBS는 다큐프라임 ‘감기’편에서 미국이나 영국 의사들은 초기 감기 환자에 약을 처방하지 않지만 한국 의사들은 적게는 2개에서 많게는 10개의 약을 처방했다고 보도했다.

2000년 의약분업이 시작됐지만 약에 의존하는 사회분위기는 여전하다. 한국은 노약자들에게 장티푸스나 식중독을 일으킬 수 있는 황색포도상구균의 항생제 내성률이 70%로 세계에서 가장 높다. 사람들 사이에는 항생제에 관한 부정확한 지식과 추측이 떠돈다. 항생제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항생제에 숨겨진 진실을 파헤쳐 보자.

감기에 항생제는 무용지물?
항생제(antibiotics)는 항(anti)과 생명(bios)의 합성어로 곰팡이나 박테리아(세균)가 만드는 화학물질 중에서 다른 미생물의 발육을 억제하거나 죽게 만드는 물질이다. 그렇다면 EBS 다큐프라임 ‘감기’에서처럼 감기에 항생제를 처방하면 효과가 있을까?

감기는 항생제를 먹어도 낫지 않는다. 감기의 원인은 박테리아가 아니라 바이러스이기 때문이다.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는 전혀 다른 생명체다. 현재까지 발견된 감기 바이러스는 약 100종. 독감을 일으키는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성인들이 잘 걸리며 코감기를 일으키는 ‘리노바이러스’, 목감기를 일으키는 ‘아데노바이러스’ 등이 있다.

바이러스는 생물과 무생물의 중간단계에 속한다. 유전물질을 전달하는 핵산(DNA 또는 RNA)이 있기 때문에 생물처럼 유전과 증식을 하지만 숙주세포 밖에서는 무생물인 결정체로 존재한다. 구조도 매우 단순하다. 바이러스는 핵산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단백질 껍질이 전부다. 세포가 아니라 입자다. 따라서 박테리아와 달리 세포막과 세포벽이 없고 물질대사에 필요한 단백질을 스스로 합성하지 못한다. 생존에 필요한 모든 물질을 숙주세포에서 얻기 때문에 항생제가 듣지 않는다.

2000년 의약분업이 시작된 뒤 단순한 감기에 항생제를 먹는 일은 많이 줄었다. 현재 시중에 판매되는 종합감기약에는 항생제가 들어있지 않다. 항생제를 투약하려면 전문의의 처방이 필요하기 때문에 개인이 임의로 항생제를 구입하기도 쉽지 않다. 중앙대 약대 최광훈 교수는 “감기의 합병증으로 세균성 편도선염이나 폐렴 같은 염증이 생겼을 때에만 항생제를 처방해야 한다”며 “단순한 감기는 충분한 휴식을 취하면 낫는다”고 말했다.

박테리아는 터져 죽는다?
항생제는 박테리아를 어떻게 죽일까. 항생제에는 박테리아를 죽이는 살균제와 박테리아의 증식을 억제하는 정균제, 살균과 정균 작용을 모두 하는 항균제가 있다. 항생제가 박테리아를 ‘처치’하는 방식은 크게 네 가지. 가장 많이 쓰이는 방식은 박테리아의 세포벽을 터트리는 방법이다. 풍선에 바람을 계속 불어 넣으면 부피가 커지며 막이 얇아지다 결국 풍선이 터지듯 세포벽이 터지면 박테리아도 죽는다.

페니실린 계열 항생제는 세포벽을 만들 때 필요한 물질을 모아 짜 맞춘 뒤 세포벽으로 운반하는 페니실린 결합 단백질(PBP)이라는 효소를 중간에 차단한다. 페니실린 계열 항생제의 화학구조가 세포벽을 구성하는 물질의 구조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페니실린이 PBP에 달라붙으면 세포벽 합성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 세포벽이 매우 약해진다.

보통 세포액의 농도가 세포 밖 농도보다 높기 때문에 외부에서 세포로 끊임없이 물이 들어간다(삼투현상). 이때 세포벽은 더 이상 물이 들어오지 않도록 부피를 유지시키는데, 항생제로 세포벽이 약해져 있어 삼투압을 견디지 못하고 터진다.
한편 박테리아의 단백질 합성을 억제하거나 세포막을 망가트리는 방법도 있다. 일반적인 감염질환에 많이 쓰이는 항생제 테트라사이클린은 리보솜에 달라붙어 tRNA가 아미노산을 mRNA에 전달하는 과정을 막는다. 그 결과 리보솜에서 만들던 펩티드 사슬에 아미노산이 공급되지 않아 단백질 합성을 하지 못하고 박테리아는 더 이상 증식하지 못한다.

대장균이 일으키는 패혈증을 치료하는 항생제 폴리마이신은 세포막을 변성시켜 대장균의 생장에 필요한 이온이나 핵산, 단백질 같은 세포의 내용물이 외부로 빠져나가도록 해 박테리아를 죽인다.

골수염이나 관절염 같은 질병을 치료할 때 쓰이는 ‘퀴놀론’ 계열의 항생제는 핵산 합성을 억제하는 항균제다. 퀴놀론 계열의 항생제는 DNA가 복제될 때 이중나선의 꼬임을 느슨하게 만드는 기라아제(gyrase)를 무력화시킨다. 기라아제가 차단되면 이중나선이 풀어지지 않거나 두 가닥의 DNA 사슬이 엉켜 DNA가 합성되지 않는다.

내성도‘감염’된다?
사실 항생제가 박테리아를 모두 죽이는 것은 아니다. 항생제가 안듣는 박테리아도 있다. 박테리아가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것. 왜 그럴까.
식품의약품안전청 식품미생물과 곽효선 연구관은 “박테리아는 자신이 만든 물질에 대한 방어 기능을 갖는데 이로부터 항생제 내성유전자가 생기는 것으로 추측된다”며 “이 내성유전자가 다른 박테리아로 옮겨져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새로운 박테리아가 탄생한다”고 말했다. 사람이 말과 글로 정보를 교환하듯 박테리아는 유전정보를 교환하면서 새로운 형질을 획득해 진화하는 셈이다.

박테리아가 항생제 내성을 쉽게 갖는 또 다른 이유는 분열속도가 빠르기 때문이다. 박테리아는 세포의 크기가 약 0.2~5μm(마이크로미터, 1μm=10-6m)에 불과하다. 반면 사람의 세포 크기는 약 17μm이다. 세포 크기가 작을수록 단위 부피 당 표면적이 넓기 때문에 그만큼 물질대사가 빨리 일어난다.

식물이나 동물세포는 분열하는 데 약 8~20시간이 걸리지만 대장균은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없다면 약 20분마다 2배로 분열해 하루에 총 72번 분열을 한다. 대장균 1마리가 하루가 지나면 272개(4.7×1021)개로 분열하는 셈이다. 이정도면 대장균의 무게가 약 454t으로 보잉 747 비행기 1대와 맞먹는다.

그런데 분열속도가 빠를수록 DNA 복제과정에서 돌연변이가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복제과정에서 한 마리라도 내성을 갖는 돌연변이가 생기면 그 개체가 살아남아 번식한다.

선천적으로 박테리아가 특정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경우도 있다. 박테리아마다 세포벽의 구조와 물질대사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세포벽을 잘 투과하지 못하는 세파마이신 같은 항생제는 세포벽이 두꺼운 포도상구균이나 폐렴균에 잘 듣지 않는다. 포도상구균이나 폐렴균은 세포벽을 이루는 펩티도글리칸이란 물질로 된 층이 살모넬라균과 콜레라균보다 약 5배 두껍다. 항생제가 세포벽을 잘 통과하지 못하니 항균력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항생제보다 센 박테리아 있다?
박테리아 중에 가장 센 녀석이 슈퍼박테리아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듯 항생제 내성을 갖게 된 박테리아는 세포분열로 자손들에게 내성유전자를 전달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성유전자가 다른 박테리아에게 전달돼 모든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슈퍼박테리아가 탄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MRSA)이 가진 내성유전자 mecA는 1960년대 초반 처음 발견된 뒤 20년도 안 걸려서 전 세계로 퍼졌다. 그리고 1996년 미국과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개발된 항생제 중 가장 강력한 반코마이신으로도 죽지 않는 슈퍼박테리아인 VRSA(반코마이신 내성 포도상구균)가 나타났다. MRSA가 장구균(VRE)으로부터 반코마이신 내성유전자(vanA)를 넘겨받아 슈퍼박테리아로 진화한 것이다.

그런데 MRSA는 어떻게 반코마이신 내성유전자를 갖게 됐을까. 일부 박테리아는 플라스미드라는 원형의 DNA를 이용해 유전자를 주고받는다. 박테리아는 섬모(필리)로 서로를 연결한 뒤 세포질을 연결해 DNA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든다. 이때 플라스미드가 이 통로를 통해 다른 박테리아에게 내성유전자를 전달할 수 있다.

박테리아에 기생하는 바이러스인 박테리오파지가 다른 박테리아에게 내성유전자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박테리오파지는 제한효소로 박테리아의 DNA를 자른 뒤 자신의 DNA와 결합시켜 새로운 바이러스 게놈(재조합 DNA)을 만든다. 그 뒤 다른 박테리아를 감염시킬 때 내성유전자가 포함된 재조합 DNA가 전달된다.

항생제가 사람을 공격한다?
항생제는 단세포인 미생물을 죽이는 독성물질이지만 다세포인 사람도 공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패혈증을 치료하는 폴리마이신은 박테리아의 세포막뿐 아니라 사람의 세포막도 파괴할 수 있다.

사람을 포함한 동물은 세포벽이 없기 때문에 세포벽 합성을 막는 페니실린 계열의 항생제는 독성이 없다. 그러나 페니실린을 투약한 환자 5000명 중 1명은 과민반응을 일으키고 심할 경우 목숨까지 잃기 때문에 주사하기 전에 반드시 민감성 검사를 해야 한다. 민감한 사람은 음식에 남아 있는 미량의 페니실린에도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 때문에 항생제는 의사의 처방에 따라야 한다.

또 최초의 합성 항생제 클로람페니콜은 장티푸스나 폐렴에 큰 효과를 보이며 값도 매우 싸다. 하지만 재생 불량성 빈혈을 일으킬 수 있어 우리나라에서는 1990년대 초 사용이 금지됐다.

곽 연구관은 “내성을 갖는 박테리아가 늘어날수록 치료제를 선택하기 어렵고 더 강한 항생제가 필요하다”며 “내성 박테리아를 죽일 수 있는 강한 항생제는 사람에게도 위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테리아를 억제하기 위해 만든 항생제가 ‘양날의 검’이 돼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박테리아가 내성을 갖는 과정

1 섬모(필리)가 두 박테리아를 연결하면 세포를 끌어당긴다.
2 세포질을 연결해 DNA가 지나갈 수 있는 통로를 만든다.
3 플라스미드의 DNA를 복제한 뒤 기다란 DNA 사슬로 전달한다.
4 박테리아에서 플라스미드 합성이 끝나면 세포질이 분리된다.
5 내성을 갖게 된 박테리아는 또 다른 개체에게 같은 과정으로 내성유전자를 전달한다.

항생제와 박테리아의 쫓고 쫓기는 싸움

포도상구균과 메티실린, 메티실린 내성 황색포도상구균과 반코마이신, 그리고 슈퍼박테리아와 슈퍼항생제.
항생제의 역사는 항생제에 내성을 가진 박테리아와 이를 쫓는 항생제의 싸움이다.

1928.09.03
페니실린 발견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곰팡이 페니실리움 노타툼으로부터 페니실린 발견.

1940.05
페니실린 최초 생산
플레밍의 논문을 본 영국 옥스퍼드대의 생화학자 에른스트 체인 박사와 병리학자 하워드 플로리 박사가 페니실린을 약품으로 만드는 데 성공.

1942
페니실린 대량 생산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자 약 20개 제약회사가 페니실린을 대규모로 생산.

1940년대 후반
페니실린 내성 포도상구균 출현
2차 대전 동안 페니실린이 남용되며 곧 페니실린 내성균 등장.

1960
메티실린 개발
페니실린에 내성 가진 포도상구균을 잡는 메티실린 개발.

1961
메티실린 내성 포도상구균 출현
메티실린 내성 포도상구균(MRSA)이 가진 내성유전자 mecA는 1960년대 초 처음 발견된 뒤 20년 만에 전 세계로 퍼짐.

1966
반코마이신 개발
반코마이신으로 MRSA 치료.

1966
슈퍼박테리아 출현
MRSA가 반코마이신 내성유전자를 전달받아 슈퍼박테리아로 진화.

2020
슈퍼항생제
개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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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 이준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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