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ur data show that consolidated fear memories, when reactivated, return to a labile state that requires de novo protein synthesis for reconsolidation. These findings are not predicted by traditional theories of memory consolidation.
우리 데이터는 강화된 공포 기억이 활성화(회상)됐을 때 불안정한 상태로 돌아가고 재강화되려면 새로운 단백질이 합성돼야 함을 보여준다. 이 발견은 기존의 기억 강화 이론이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다.
홍상수 감독의 2000년 작품 ‘오! 수정’은 ‘기억’과 ‘기억의 왜곡’에 관한 영화다. 돈 많은 미술가인 노총각 재훈(정보석 분)은 케이블방송국 PD인 선배와 만난 자리에 동석한 미모의 구성작가 수정(이은주 분)에 관심을 보인다. 그 뒤 둘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각자의 시각에서 그린 이 영화는 동일한 에피소드를 당사자들이 전혀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장면을 교묘하게 보여줬다. 영화는 5부로 나뉘는데 1, 2부는 재훈의 회상을 재구성했고 3, 4부는 수정의 기억을 따라갔다.
결국 이 영화는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기억이 함께 찍은 사진을 여러 장 뽑아 나눠 갖는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정말 ‘객관적’인 기억은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사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옛날 일을 두고 기억이 달라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도대체 우리 기억의 실체는 무엇일까.
뇌 속 기억과 하드디스크 데이터는 달라
미국 뉴욕대 신경과학센터 조지프 르두 교수팀은 ‘네이처’ 2000년 8월 17일자에 발표한 논문에서 일반인의 상식을 뒤엎는 기억의 ‘실체’를 보여줬다. 이들의 연구는 한 마디로 “기억은 회상할 때마다 흔들린다”는 것.
기억은 크게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으로 나뉜다. 친구의 바뀐 전화번호를 듣고 난 뒤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 수 있는 건 단기기억 덕분이다. 그런데 이런 기억은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그런데 바뀐 번호로 계속 전화를 걸다보면 어느새 번호를 외우게 된다. 장기기억으로 전환됐기 때문이다.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의 차이는 기억이 뇌의 시냅스에 저장돼 있느냐 여부. 컴퓨터로 문서를 작성한 뒤 그냥 전원을 끄면 문서가 사라지지만, ‘저장’을 누른 뒤 끄면 하드디스크에 담겨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장기기억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단백질이 만들어진다는 사실은 1960년대 밝혀졌다. 즉 단백질의 작용으로 기억을 저장하는 시냅스 부위가 형성되고 연결이 강화되는데 이 과정을 기억 강화라고 한다. 만일 단백질을 만드는 과정을 억제하는 물질을 뇌에 주사하면 어떤 상황을 경험해도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기억이 강화되면 언제든지 회상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드 디스크에 저장된 데이터를 아무 때나 열어볼 수 있는 것처럼.
그런데 르두 교수팀은 기발한 실험방법을 고안해 뇌의 기억과 컴퓨터의 기록(데이터)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보여줬다. 이들은 먼저 쥐에게 공포를 기억하게 했다. 즉 특정한 소리를 들려주고 전기쇼크를 주는 ‘학습’을 반복하면 어느 순간 쥐는 소리만 들어도 공포로 온 몸이 얼어붙게 된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속담에 해당하는 행동으로 이를 ‘공포조건화’라고 부른다.
연구자들은 이렇게 공포를 학습한 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쪽은 그냥 두고 다른 한쪽은 소리를 들려줘 공포반응을 유도했다. 그리고 이들 각각에 공포학습에 대한 기억이 저장되는 장소인 편도체에 단백질 합성 억제 약물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다음날 실험동물 모두에게 소리를 들려줬다. 기존 이론에 따르면 단백질을 못 만들더라도 이미 지니고 있는 기억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따라서 두 그룹 모두 소리에 공포로 몸이 얼어붙을 것이다.
전날 소리를 듣지 않은 채 약물을 주입받은 쥐들은 예상대로 소리에 공포로 몸이 얼어붙었다. 반면 전날 소리를 듣고 공포상태에 있을 때 약물을 주입받은 쥐들은 다음날 소리를 듣고도 몸이 얼어붙지 않았다. 연구자들은 “전날 소리를 듣고 나서 공포기억을 떠올릴 때 주입된 약물 때문에 기억을 재강화하기 위한 단백질을 만들지 못해 소리 뒤에 전기쇼크가 온다는 기억이 사라졌기 때문”이라며 “결국 어떤 기억이 회상된 뒤 다시 기억으로 남아 있게 하려면 이런 역할을 하는 단백질이 꼭 만들어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당시 르두 교수팀의 연구결과가 관련 전문가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이유는 기억을 없앨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어린 시절 안 좋은 기억이 있거나 잊어버리고 싶은 기억이 있을 때 이를 회상하게 한 뒤 순간적으로 단백질이 만들어지지 않게 하면 이 기억은 영영 사라져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르두 교수는 “전 부인에 대한 기억을 지우기 위해 그녀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단백질 합성을 차단하면 지울 수 있는지 묻는 전화를 받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기억은 업데이트 돼야
르두 교수팀은 2002년 신경과학 전문지인 ‘뉴런’에 발표한 논문에서 뇌에서 기억을 총괄하는 부위인 해마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즉 공포 기억을 회상한 뒤 재강화하려면 해마에서도 단백질이 합성돼야 한다는 것. 단백질 합성 억제 약물을 해마에 주사하면 역시 회상 뒤 기억이 사라진다.
그렇다면 기억 재강화 과정에 관여하는 단백질은 무엇일까. 영국 케임브리지대 실험심리학과 케리 토마스 교수팀은 공포 기억을 회상한 뒤 해마에서 Zif268이란 단백질이 늘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렇다면 이 단백질이 기억 재강화에 관여하지 않을까. 연구자들은 Zif268의 mRNA를 파괴하는 분자를 만들어 쥐의 해마에 주입하자, 공포 기억을 회상한 뒤 잊어버린다는 사실을 확인해 2004년 ‘사이언스’에 발표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기억 회상은 이런 번거로운 과정으로 진화했을까. 즉 회상을 할 때마다 어렵게 시냅스를 강화해 만든 기억의 집을 허물고 다시 짓는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게다가 이런 과정을 거치면 불가피하게 기억은 변형되고 원래의 기억은 사라진다. 답은 “기억의 변형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즉 기억의 변형은 ‘왜곡’이 아니라 ‘업데이트’이기 때문이다.
2003년 ‘네이처’에는 기억의 업데이트가 실제 어떻게 일어나는지 보여주는 재미있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정신과 로버트 스틱골드 교수팀은 손가락을 순서대로 움직이는 운동 기억력을 테스트했다. 참가자들(모두 오른손잡이)은 키보드의 1, 2, 3, 4 버튼 위에 왼손 손가락을 올려놓고 스크린에 보이는 순서대로 30초 동안 최대한 빨리 반복해서 버튼을 눌러야한다. 이런 과정을 12번 반복한 뒤 정확도와 속도를 분석했다.
참가자들은 첫날 ‘4-1-3-2-4’의 순서대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다음날 그룹을 나눠 A그룹은 다른 순서인 ‘2-3-1-4-2’대로 누르게 했고 B그룹은 ‘4-1-3-2-4’ 순서로 누른 뒤 바로 ‘2-3-1-4-2’ 순서로 누르게 했다.
그리고 셋째날 두 그룹 모두 첫 번째 순서와 두 번째 순서대로 버튼을 누르는 테스트를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4-1-3-2-4’ 순서를 첫날에만 경험한 A그룹보다 둘째날에도 해본 B그룹이 더 숙달됐기 때문에 이 순서의 성적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A그룹은 정확도와 속도 모두 향상된 반면 B그룹은 정확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B그룹은 둘째 날 ‘4-1-3-2-4’ 순서를 연습한 뒤 바로 ‘2-3-1-4-2’ 순서를 배우면서 기억이 업데이트됐기 때문이다. 즉 회상으로 운동 기억 시냅스가 약화된 상태에서 비슷한 동작을 하게 되자 기존 기억 회로가 재배치된 것이다.
춤이나 운동을 배울 때 처음엔 자세가 엉성하지만 동작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교정을 받다보면 결국 올바른 자세가 나오는 것도 운동 기억의 업데이트 과정이다. 저명한 신경과학자인 르두 교수는 2002년 펴낸 책 ‘시냅스와 자아’에서 “어쩌면 회상하는 뇌는 초기기억을 형성했던 바로 그 뇌가 아닐지도 모른다”며 “옛 기억이 현재의 뇌에서 의미를 가지려면 업데이트 돼야 한다”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