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음료시장의 트렌드는 단연 식초다. 식초를 마시면 온갖 질병이 사라지고 심지어 다이어트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식초의 효능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쏟아져 나오면서 식품업계는 앞다퉈 새로운 식초음료를 내놓고 있다. 식초와 식초음료에 대해 뭔가 알아야 마실지, 마시지 않을지 소신있게 정할 수 있지 않을까.
식초의 변신은 무죄?
식초를 뜻하는 프랑스어 비네그르(vinaigre)가 와인(vin)과 시다(aigre)의 합성어라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 식초는 보관하던 술이 변해 만들어졌다. 구약성경에도 등장하는 식초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조미료 중 하나다.
식초의 신분이 조미료에서 식품으로 급상승하게 된 계기는 먹기 편한 식초음료가 개발되면서다. 우리 몸에는 기본적으로 음식이 상할 때 내는 ‘신맛’을 경계하는 코드가 숨어있기 때문에 식초를 마신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시장에 나온 다양한 식초음료는 농도를 낮춰 신맛과 식초 고유의 강한 향을 많이 줄였다.
식초는 매우 다양한 재료로 만든다. 사과, 감, 포도, 매실, 석류, 오미자, 복분자 등의 과일로 식초를 만들 수 있고, 쌀, 보리 등의 곡물도 식초의 재료가 된다. 일본의 유명한 ‘흑초’는 현미식초를 6개월 이상 숙성시켜 만든다. 최고급 식초로 알려진 이탈리아의 ‘발사믹 식초’는 포도를 참나무통에 1년 숙성시켰다가 밤나무통이나 앵두나무통에 옮겨 3년 이상 더 숙성시켜 만든다.
식초 문화가 일찍 발달한 일본에는 마시는 식초는 물론이고 식초로 만든 케이크와 초콜릿도 있다. 심지어 주점에서 식초를 넣어 만든 칵테일도 판다고 하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국내에서는 1986년 물에 희석해 마시는 식초가 처음 등장했지만 당시엔 별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해 10월 TV 프로그램과 언론을 통해 식초의 효능이 널리 알려지면서 식초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올 초부터 6월말까지 식초음료의 매출은 이미 250억원을 넘어 작년 같은 기간보다 7배나 성장했다. 도대체 식초에 무슨 비밀이 숨어 있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열광하는 것일까.
피로회복과 혈관질환에 효과?
해성한의원 신재용 원장은 ‘천연식초건강법’에서 “식초는 스트레스 해소, 동맹경화·고혈압 예방, 출혈성질환 방지, 해독작용, 빈혈해소, 간 보호, 식욕증진에 좋다”며 “이같은 식초의 효능을 살펴볼 때 가히 만병통치약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극찬했다.
식초가 유익하다는 임상실험 결과도 있다. 작년 10월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방영된 계명대 김기진 교수팀의 실험에서 운동한 뒤 현미식초를 마신 사람이 마시지 않은 사람보다 더 빨리 피로를 회복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격한 운동을 하면 근육에는 우리 몸이 피로할 때 생기는 젖산이 쌓인다. 그 뒤 휴식을 취하면 젖산 농도가 점차 낮아지는데, 혈액의 젖산 농도를 측정해 피로가 회복되는 정도를 알아낼 수 있다. 휴식을 취한지 30분 뒤의 측정결과 현미식초를 마신 사람의 젖산 농도가 마시지 않은 사람보다 약 25% 낮았다.
식초가 가진 또 다른 효능은 콜레스테롤을 낮춰 혈관질환을 예방한다는 점이다. 일본 쇼와대 나카야마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식초는 몸 곳곳에서 간으로 콜레스테롤을 운반하는 단백질(고밀도지단백질, HDL)은 늘리는 한편, 간에서 몸으로 콜레스테롤을 운반하는 단백질(저밀도지단백질, LDL)은 줄여 혈액 내 콜레스테롤 수치를 낮춘다고 한다.
한의학에서는 신맛의 음식이 간을 도와 근육을 튼튼하게 한다고 본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식초는 ‘종기를 제거하고 어지러움을 치료한다’고 한다. 민간요법으로 요통, 위장병, 당뇨병, 지방간 치료와 기미 제거에 식초를 널리 사용한다.
‘몸에 좋은 식초’ 과학적 근거 빈약
식초가 유익하다는 임상실험 결과는 아직 정확한 메커니즘을 모르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 사실 식초가 유익하다는 최근의 주장은 과학적 근거가 빈약하다. 식초 자체의 유익은 별개로 하고 접근 방식에 문제가 있다.
식초가 몸에 좋은지 알려면 먼저 성분을 봐야 한다. 식초의 주성분은 아세트산(CH₃COOH)이지만 만드는 재료에 따라 아세트산 이외에 독특한 유기산이 만들어진다. 또 재료에 이미 들어있는 성분도 식초에 고스란히 남는다. 예를 들어 사과로 만든 식초에는 사과산이, 감으로 만든 식초에는 탄닌 성분이 들어있다. 하지만 모든 식초에 공통적으로 들어있는 성분은 물과 아세트산뿐이다.
서강대 화학과 이덕환 교수는 “식초의 효능을 증명하려면 공통으로 들어있는 아세트산의 기능을 밝혀야 한다”며 “탄닌이나 사과산처럼 일부 식초에만 들어있는 성분으로 식초가 유익하다고 설명하는 것은 비논리적”이라고 했다. 감식초의 항암작용이 감에서 나온 것이라면 굳이 식초를 먹을 필요 없이 감을 먹으면 된다는 논리다.
아세트산이 몸의 대사 과정에 어떻게 쓰이는지는 아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식초가 유익하다고 주장하는 TV방송, 책, 인터넷 사이트는 한 목소리로 ‘식초연구가 3번이나 노벨상을 받았다’고 말한다.
첫째는 아세트산이 에너지를 발생시키는 원동력이라는 주장이고, 둘째는 아세트산이 세포 안 대표적인 에너지 대사인 TCA회로(tricarboxylic acid cycle)의 구성물질로 쓰여 에너지를 만들고 젖산을 제거한다는 주장이며, 셋째는 아세트산이 부신피질호르몬 생성에 쓰여 통증과 스트레스를 줄인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KAIST 생명과학과 강창원 교수는 “미생물이나 식물은 아세트산을 이용하는 대사회로를 갖고 있지만 동물은 없다”고 했다. 아세트산이 동물에서 에너지원이 될 수 없다는 의미다. 이덕환 교수는 “아세트산이 TCA회로에 들어간다는 말은 처음 듣는 소리”라며 “식초의 주성분인 아세트산과 활성아세트산(acetyl-coA)을 혼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둘은 다른 물질이다”고 말했다.
부신피질호르몬을 만드는데 쓰이는 물질도 아세트산이 아닌 활성아세트산이다. 노벨상 수상자들은 생체 내의 에너지 대사를 연구했을뿐 ‘식초연구’를 하지 않았다. 주장에 힘을 싣기 위해 사용한 ‘틀린 과학’이 일파만파로 퍼진 것이다.
식초가 유익하다 한들 모든 사람에게 유익한 것은 아니며, 만병통치약처럼 받아들여져서는 더욱 곤란하다. 특히 시중에 조미료로 팔리는 식초는 원액 그대로 마시면 몸에 해롭기 때문에 최소 5배 이상 희석해서 마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