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블은 대부분의 천문학 관찰을 윌슨산천문대에서 수행했다. 1919년 허블이 처음 그곳에 왔을 때 마침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망원경인 지름 100인치(약 2.5m)짜리 반사경이 달린 후커망원경이 설치돼 있었다. 이후 그는 이 망원경으로 우리 은하 밖 우주에 대해 많은 정보를 얻어내게 된다.
당시 천문학계에서는 우주의 크기와 모양에 관한 논의가 뜨거웠다. 미국의 천문학자 할로우 섀플리와 히버 커티스 사이에는 이 문제를 두고 유명한 논쟁이 벌어졌다.
1920년 4월 26일 섀플리는 미국 과학아카데미에서 우주가 우리 은하수 크기 정도라고 주장했고, 커티스는 우주가 그보다는 훨씬 더 크다고 반박했다. 4년 뒤 이 논쟁에 종지부를 찍은 인물이 허블이었다.
1923년부터 2년 동안 허블은 안드로메다자리의 거대 성운인 M31에서 세페이드변광성을 관찰했다. 1912년 하버드대 천문대의 헨리에타 리비트는 세페이드변광성의 변광 주기와 최대 광도 사이에는 일정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이는 변광성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중요한 발견이었다.
천문학자들은 변광성의 주기를 측정해 절대 광도를 계산했고 그로부터 별의 절대 등급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결과와 변광성의 겉보기 등급을 비교해 별까지의 거리를 추산할 수 있었다. 섀플리 역시 은하수를 둘러싼 구상성단의 거리와 크기를 결정하기 위해 이 방법을 사용했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허블은 나선성운 속에 있는 세페이드변광성을 관찰해 그 천체까지의 거리를 계산할 수 있었다. 당시 우리 은하의 지름은 10만광년이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허블의 계산에 따르면 놀랍게도 안드로메다성운이 약 90만광년 떨어진 은하수 너머 우주에 있었다.
1924년 12월 30일 미국 천문학회에서 섀플리와 커티스가 참석한 가운데 허블의 발견이 발표됐다. 두 사람의 논쟁은 끝이 났고, 커티스의 주장대로 우주가 생각보다는 매우 크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허블은 은하의 일반적인 구조와 우주에서 은하의 분포와 운동을 연구하기 위해 관측을 계속했다. 그는 성운의 특성에 대한 이해를 넓혔고, 그 결과 지금까지도 널리 사용되는 성운의 분류 체계를 세웠으며 우주가 팽창한다는 증거도 찾아냈다.
1920년대 말 허블은 후커망원경으로 외계 은하까지의 거리를 측정하는데 몰두했다. 이는 우주에서 은하의 분포를 이해하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허블이 관측해보니 거리가 멀어지면 제일 먼저 세페이드변광성이 보이지 않게 되고, 다음으로 불규칙 변광성이, 그리고 청색거성이 차례대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장 밝은 별들만 관측할 수 있었다.
허블은 나선은하에 있는 가장 밝은 별들을 관측한 결과 그들의 절대 광도가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 별들의 최대 광도는 무려 태양의 5만배에 달했다. 이로부터 허블은 별들의 겉보기 등급을 알아내 별까지의 거리를 추정할 수 있었고, 외계 은하까지의 거리를 600만광년까지 확장했다.
별까지의 거리를 더욱 확장하기 위해 허블은 처녀자리은하단의 나선은하에 있는 별들에 집중했다. 그 별들로부터 은하의 평균적인 특성을 알아내면 이를 토대로 더 멀리 떨어진 은하들까지의 거리를 추정할 수 있는 통계적 기준값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허블은 은하단에서 가장 밝은 은하에 주목했다. 은하단들이 모두 유사하다고 간주하고 한 은하단 속에서 가장 밝은 은하 10개의 평균 광도(또는 간단히 5번째로 밝은 은하의 광도)를 거리 측정의 척도로 사용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우주의 거리를 2억5000만광년까지 넓혔다.
1929년 허블은 고립된 은하 18개까지의 거리와 처녀자리은하단 중 은하 4개까지의 거리를 알아냈다. 다소 제한된 데이터이긴 하지만 이를 이용해 그는 마침내 자신의 가장 위대한 발견을 이뤄냈다. 바로 ‘허블의 법칙’이었다.
허블은 은하까지의 거리와 은하의 시선속도 사이의 그래프를 그린 결과 둘이 서로 비례 관계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때 비례 정도를 나타내는 비례상수가 허블상수(H)다.
1912년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로웰천문대의 슬라이퍼가 세계 최초로 M31의 시선속도를 측정한 이후 1929년까지 모두 46개 은하의 후퇴 속도가 알려져 있었다. 이로부터 허블은 600만광년 안에 있는 천체에 대해 속도-거리 그래프를 그렸고, 직선에 가까운 형태를 얻을 수 있었다.
지구에서 비교적 가까운 은하들의 경우 은하마다 갖고 있는 고유한 운동 때문에 서로 비교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허블은 멀리 떨어진 처녀자리은하단의 은하들에서 얻은 데이터를 사용했다. 그는 거리가 100만광년 늘어날 때마다 후퇴 속도가 대략 160km/s씩 증가한다는 결과를 얻었다. 이때 허블상수는 500km/s/Mpc(메가파섹, 1Mpc=106pc =106×3.26광년)였다.
허블의 발견은 매우 큰 의미를 지녔다. 우리 은하계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므로 모든 방향으로 은하가 동일한 속력으로 멀어지고 있다는 것은 우주의 모든 부분이 서로에 대해 상대적 거리가 증가하면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내포했기 때문이다.
이는 코페르니쿠스의 발견으로 우주의 모습이 뒤집어진 이래 우주에 관한 가장 중요한 개념 전환을 가져왔다. 우주는 변하지 않는다는 정적인 관점이 폐기되고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동적 관점이 채택됐던 것이다. 오늘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는 빅뱅 우주론도 여기서 시작됐다.
허블이 우주 팽창의 증거를 발견한 뒤 아인슈타인은 우주상수를 만들어 정적 우주를 유지하려고 했던 자신의 시도가 ‘생애 가장 큰 실수’라고까지 말했다. 아인슈타인이 1916년 발표한 일반상대성이론은 우주가 팽창하든지 수축해야 한다는 점을 암시했지만, 그는 정적 우주론을 고수하기 위해 일부러 우주상수를 만들어 자신의 방정식에 도입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1년 윌슨산천문대로 허블을 찾아간 아인슈타인은 허블이 현대 우주론의 경험적 기초를 제공했다며 그의 공로를 치하했다. 그러나 정작 허블 자신은 팽창 우주론에 다소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기도 했다.
에드윈 허블은
1889년 미국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시절 공부와 운동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냈다. 1906년 높이뛰기로 일리노이주 신기록을 세웠고, 대학 시절에는 헤비급 권투 선수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시카고대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공부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로즈 장학생으로 법률을 공부했다. 1913년 미국으로 돌아온 뒤 1년간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변호사로 일했다. 그러나 법률이 천직이 아니라는 생각에 1914년 시카고대에서 천문학을 공부했고 1917년 박사학위를 받았다. 곧 캘리포니아주 패서디나에 있는 윌슨산천문대의 설립자이자 대장인 조지 헤일로부터 연구원으로 초청받았다. 하지만 때마침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헤일에게 제대하면 가겠다는 전보를 보내고 보병으로 입대했다. 1919년 제대 후 약속대로 윌슨산천문대로 갔고 1953년 죽기 전까지 그곳에서 연구했다.
재 현 실 험
허블의 법칙은 천문학사에 한 획을 그을 만큼 중요한 발견이었다. 하지만 허블도 100% 정확하지는 않았다. 허블이 처음에 얻은 허블상수 500km/s/Mpc은 그가 거리를 잘못 추정해서 얻은 오차가 매우 큰 값이었다. 물론 이 때문에 은하의 거리와 후퇴 속도 사이에 존재하는 비례 관계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 허블상수를 좀 더 정확히 측정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이 고안됐다.
20세기 후반에는 허블상수가 50~90km/s/Mpc이라고 알려졌다. 1990년 허블우주망원경이 우주에 설치된 뒤 허블상수는 더욱 정확해졌다. 2001년 5월 허블상수는 72±8km/s/Mpc로 추정됐다. 2003년 2월에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에서 발사한 윌킨슨 탐사위성(WMAP)이 허블상수를 71±4km/s/Mpc로 계산하기도 했다. 두 값은 서로 다른 방법으로 측정됐고, 아직 어느 방법이 더 정확한지는 결정되지 않았다. 앞으로도 허블상수는 계속해서 정확해질 것이다. 하지만 우주가 팽창한다는 것만은 여전히 사실로 남을 것이다.
시선속도 | 천체가 시선 방향으로 멀어지거나 가까워질 때의 운동 속도. 대개 초속(km/s) 으로 나타내며 멀어지면 (+)로, 가까워지면 (-)로 표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