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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인구달 인간과 동물의 경계 허물다

침팬지는 자연이 보내온 홍보대사

타잔에게는 제인이란 이름의 애인이 있다. 그런데 영화 속 정글이 아닌 실제 정글에도 같은 이름을 가진 여성 과학자가 있다. 바로 영국 출신의 제인 구달 박사다. 그에게는 침팬지 친구가 여럿 있다. 그 중 죽마고우는 침팬지 피피. 구달 박사가 아프리카에서 처음 피피를 만났을 때 1살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피피의 나이도 마흔을 훌쩍 넘었다.

침팬지도 이름이 있어야 하는 이유


제인 구달 박사는 40년이 넘도 록 아프리카에서 침팬지들과 살면서 그들의 소리와 몸짓을 면 밀히 관찰하고 기록했다.


제인 구달 박사는 우리 나이로 내년이면 칠순이다. 그는 26세 때부터 43년 동안 탄자니아의 곰비 국립공원에서 침팬지와 함께 지내며 그들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했다. 험난한 정글 속에서 야생동물과 살았다기에 거칠고 투박한 인상의 여류 과학자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난 11월 8일 한국영장류연구소와 한국과학문화재단 초청으로 방한한 구달 박사를 서울 힐튼호텔에서 처음 만난 순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키가 1백70cm 넘어 보이는 그의 첫인상은 차분한 목소리의 인자하고 푸근한 이웃 할머니였다.

구달 박사가 야생 침팬지를 연구한 결과가 처음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게재됐을 때 사람들은 표지에 실린 그의 외모에만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만 해도 침팬지를 직접 따라다니며 그들이 내는 소리나 몸짓을 기록하는 연구 방식은 학계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구달 박사는 곰비에서 만난 침팬지들에게 일일이 이름을 지어주었다. 당시 과학자들은 동물에게 번호를 붙여 구분했다. 대학 교육도 받지 않은 채 아프리카 정글에 뛰어든 그가 이런 학계의 관례를 알 턱이 없었다. 지금도 구달 박사는 동물에 번호를 붙이는 것이 그들을 함부로 대하는 근거가 된다는 신념에 변함이 없다.

웰컴 투 더 정글


구달 박사와 성격이 비슷하다 는 암컷 침팬지 그램린(가 운데). 그녀는 쌍둥이 골든과 글리터의 엄마다.


어릴 적 제인은 다리도 없는 지렁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궁금해서 손안에 가득 지렁이를 쥐고 방안에 들어왔다. 이를 본 어머니는 방안에 두면 죽으니 밖으로 나가 함께 관찰하자고 했다. 다른 어머니 같으면 징그러워 내다버리라고 했을텐데 말이다. 동물에 대한 제인의 호기심을 키워주고 과학자로서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이끌어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8살 때 야생동물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한 제인은 고등학교 졸업 후 식당에서 일하며 여비를 마련해 1960년 마침내 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고생물학자인 루이스 리키 박사는 제인이 진심으로 동물을 이해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탕가니카 호수 근처에 사는 침팬지를 연구할 기회를 줬다. 침팬지들은 제인을 보면 숲속으로 도망치기 바빴지만 결국 몇년이 지나자 그의 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제인은 침팬지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인간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서로 만나면 껴안고 키스하고 등을 두드린다. 또 주먹이나 몸을 흔들기도 한다.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서로 털을 다듬어주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몸이 아프면 좋은 잠자리를 만들어 일찍 자고 늦게 일어나며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는다. 어떤 때는 약초를 찾아 스스로 먹어 치료하기도 한다.

때때로 극도의 잔인함을 보이는 것도 인간과 비슷하다. 원숭이에게로 돌진해 붙잡은 다음 갈기갈기 찢어 먹는다. 침팬지 무리 간에도 종종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때 어린 침팬지가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다. 어쩌면 이런 참상에 그가 실망했을 법도 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면 부모를 잃어 고아가 된 어린 침팬지를 다른 어른 침팬지가 입양하기도 하는 모습에서 다시 그들을 연구할 이유를 찾는다.

뭐니뭐니해도 제인이 발견한 가장 놀라운 사실은 침팬지도 도구를 쓸 줄 안다는 점이다. 침팬지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와 골리앗은 흰개미굴에 나뭇가지를 넣고 거기에 붙어나오는 흰개미를 훑어먹었다. 뿐만 아니라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잎들을 떼어내 사용하기도 한다. 또 침팬지 에버레드는 나뭇잎을 한줌 집어 입안에서 잠깐 씹다가 나무 구멍 속으로 밀어넣었다. 다시 꺼냈을 때 나뭇잎 뭉치는 물에 흥건히 젖어 있었고 에버레드는 이를 빨아먹었다. 스펀지를 만든 것이다. 침팬지는 도구를 단순히 ‘사용’하는 것을 넘어서 ‘제작’할 줄 안다는 사실이 증명된 셈이다.

침팬지는 화가 나면 나뭇가지를 잡아 막 흔들어댄다. 하루는 화가 난 침팬지 마이크가 나뭇가지를 흔들다가 손에 바나나를 들고 있는 제인을 봤다. 마이크는 나뭇가지를 일부러 떨어뜨리고 다시 좀더 긴 나뭇가지를 주워 흔들다가 제인의 손을 쳤다. 그 바람에 제인이 떨어뜨린 바나나를 잽싸게 가져갔다. 마이크가 바나나를 차지하기 위해 ‘생각’을 한 것이다.

제인은 이처럼 침팬지를 통해 인간이 지능, 개성, 마음, 감정을 가진 유일한 동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침팬지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자연이 인간에게 파견한 홍보대사”라고 말한다.

제인의 연구성과를 인정한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는 1965년 동물행동학 박사 학위를 수여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키우던 동물이 어떤 상황에서 특별한 행동을 했거나 특이한 반응을 보였다는 등의 사소한 일화를 비과학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러가지 일화가 축적되면 동물의 행동을 파악하는 근거가 된다. 여러 종의 동물이 같은 행동을 보인다든지, 한 동물이 같은 행동을 여러 장소나 특정한 시기에 반복한다든지 하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관찰한 일화가 모여야 알아낼 수 있다. 티끌이 모이면 태산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에버랜드 오랑우탄이 꿀 먹는 방법

구달 박사는 침팬지가 있는 동물원이라면 세계 어느 곳이라도 찾아간다. 바쁜 방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그가 11월 11일 오전 경기도 에버랜드의 동물원을 찾은 이유다.

실내에 있는 침팬지 우리에서 구달 박사는 암컷 침팬지 갑순과 갑경을 만났다. 그는 이들이 매우 건강해 보이지만 몸집에 비해 우리가 너무 작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한마리의 엉덩이가 빨갛다. 암컷 침팬지는 발정기가 되면 엉덩이 부분이 부풀어오른다. 사람이 임신할 수 있는 시기에 엉덩이가 부풀어오르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싶다.

침팬지네 옆집에는 오랑우탄 부부가 산다. 얼마 전에 태어난 새끼 ‘알리’가 어미에게 안겨 재롱을 부리고 있다. 바로 그때 수컷이 나뭇가지를 주워 나무 속 구멍으로 넣고 꿀을 찍어먹는다.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를 넣기 전에 끝을 이빨로 씹어 솜처럼 만든다. 꿀이 좀더 잘 묻도록 하기 위한 지혜다. 구달 박사는 오랑우탄이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장면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977년부터 미국, 탄자니아, 영국, 독일, 캐나다 등 곳곳에 세워진 제인구달연구소에서는 ‘침팬주’(chimpanzoo)라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세계 여러 동물원에서 침팬지를 관찰한 결과를 모으기 위해서다. 구달 박사는 에버랜드 동물원과도 침팬주 프로그램을 통해 함께 일하고 싶다는 바램을 나타냈다.

내가 가야할 길을 갔을 뿐

20여년 전부터 구달 박사는 더 바빠졌다. 연구 대상이 없어지면 연구 자체도 의미가 없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고 환경보호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아프리카 환경은 점점 나빠지고 있다. 목재회사들이 나무를 베어가 길이 생겨 사냥꾼들이 쉽게 침입한다. 정부에서조차 침팬지 어미는 고기로, 새끼는 애완용으로 팔기도 한다. 심지어 원주민인 피그미족에게 돈을 주면서 사냥을 해오도록 부추기는 사람도 있다.

또한 어떤 연구자들은 과학의 발전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동물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11월 8일 서울대 생명과학부 최재천 교수와의 대담에서 구달 박사는 왜 그래야만 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휴대폰이나 노트북과 같은 첨단제품을 만들어낸 놀라운 지능을 활용하면 동물을 희생하는 잔인한 방법을 택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구달 박사는 문제가 있으면 어려움을 이겨내고 해결책을 찾는 인간의 능력과, 기회만 주면 다시 인간에게로 돌아오는 자연의 위대함을 믿는다. 그가 1991년부터 펼치고 있는 ‘뿌리와 새싹’ 운동도 같은 맥락이다. 생명의 시작인 새싹은 비록 연약하지만 벽돌도 뚫을 수 있는 힘을 가졌다. 뿌리는 그 새싹이 자랄 수 있는 튼튼한 기반이다. 사회의 모든 문제를 뚫을 수 있는 주인공은 바로 젊은이들이라는 의미다.

구달 박사는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통해 이런 희망을 전달한다. 1년에 3백일 이상을 외국에서 보내기 때문에 본거지가 ‘비행기’라고 대답할 정도다. 왕복표를 끊지 않고 다니다보니 구달 박사를 모르는 공항 직원이 테러리스트로 오해한 적도 있다고 한다.

11일 오후 서울대 문화관에서 ‘침팬지와 나의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구달 박사의 강연이 진행됐다. 침팬지 언어로 첫인사를 한 그는 고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피곤한 기색이 없다. 박사와 성격이 비슷한 침팬지도 있냐는 초등학생의 질문에, 인내심이 강하고 똑똑하며 온화한 성품이 자신을 꼭 닮은 침팬지의 이름이 그램린이라고 대답했다. “환경을 파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 각자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주역이고, 가장 중요한 사람임을 일분일초도 잊지 말았으면 한다”는 말로 작별인사를 했다.

“가야할, 안가고는 못배기는 길이 어느 순간 열려 있었고, 나는 그 길을 따라왔을 뿐”이라고 자신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구달 박사의 모습에서 ‘과학’보다는 ‘인간’의 진면목을 먼저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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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임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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