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도로나 공원같이 사회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이용하는 시설이나 투자를 ‘공공 재화’(Public Goods)라고 한다. 공공 재화는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돈을 걷어 만들어지는데, 투자를 하지 않은 구성원이라고 해서 이를 이용 못하는 것은 아니다. 탑골 공원을 만드는데 돈 낸 사람만 그 공원에 입장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이다. 실제로 공공 재화는 국가의 세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개인이 투자할지 말지를 결정할 사항은 아니다.
하지만 공공 재화의 투자 여부 권한이 개인에게 주어진다면 어떻게 될까. 공공 재화에 투자하지 않고 이를 이용하려는 이기심이 발동하기 마련이다. 그러다 아무도 투자하지 않게 되면 공공 재화를 통한 편리는 사라진다.
오늘날 세금으로 공공 재화가 유지되기 때문에 이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주변에서 공공 재화에 속하지 않지만 비슷한 문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연립주택의 청소 문제
여러 가족이 한 건물을 이용하는 연립주택의 청소 문제를 살펴보자. 많은 사람이 오고가는 복도나 현관을 어느 집에서 청소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시간과 땀을 들이지 않고도 깨끗한 환경이라는 이득을 얻는다. 따라서 청소를 하지 않고 이득만 챙기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것은 당연하다. 만약 모든 거주자들이 이같은 유혹을 받으면, 누가 청소를 해서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을까. 이처럼 우리 주변에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일을 해줌으로써 자신에게 이익이 생기는 일들이 많다.
이같은 상황을 모사(模寫)하는 놀이가 있다. 이것은 참가자들이 은행에 투자할지 말지를 선택해서 돈을 불리는 놀이다. 각 사람이 투자할 수 있는 금액은 정해져 있다. 은행은 개인이 투자한 돈을 2배로 불려주는 역할을 한다. 이 게임의 중요한 규칙은 게임 참가자의 투자 여부와 상관없이 은행은 2배로 늘어난 돈을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나눠준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5명의 참가자가 있는데, 3명이 투자를 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투자금액을 1이라고 해보자. 그러면 3명이 투자한 돈 3이 은행에서 6으로 불려지고, 게임 참가자 5명은 1.2를 나눠 갖는다. 그 결과, 투자한 세사람의 경우 자산이 0.2만큼 늘어나지만, 투자하지 않은 2명의 경우 자산이 1.2나 늘어나는 재미를 본다. 여기에서 은행에 돈을 투자해 나눠 갖는 전략을 선택한 사람을 ‘협력자’, 투자하지 않고 그냥 돈을 나눠 가진 사람을 ‘배반자’라고 부르기로 한다.
만약 당신이 이 놀이에 참가한다면?
물론 놀이의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충분히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은행에 투자할 것인가, 말 것인가. 이 놀이에서는 투자를 하지 않는 전략을 취하면 이익이 더 많다. 때문에 참가한 사람들이 모두 같은 생각을 갖고 투자를 거부한다면 전원은 아무런 이득이 없다. 이 놀이는 ‘공공 재화 게임’(Public Goods Game)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인간과 동물들의 세계에서 협력현상이 일어나는지를 연구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모델이다.
수많은 입자들의 협력현상으로
공공 재화 게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이기적인 행동은 결국 자신들에게 손해를 끼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협력하면 나름대로 자산을 부풀려가면서 다 잘 수 있지만,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기심은 결국 투자를 거부하게 만들어버린다.
이와 같은 딜레마가 존재하는 인간 사회나 동물의 세계에서 협력이 이뤄지는 이유가 무엇일까. 이기심이 결국 자신을 망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잠깐 생각해보면 이것은 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배반자가 되고자 하는 유혹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기적인 개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협력을 이끌어낸 것일까. 이 점을 이해하기 위해 생물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물리학자들이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 독자는 물리학자가 이 연구를 한다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도대체 물리학자들이 사회나 동물 세계의 협력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리학의 역사는 궁극의 것에 대한 추구에서부터 시작됐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뉴턴이나 상대성이론의 아인슈타인에서 알 수 있듯이, 물리학자는 물질 세계를 움직이는 기본 원리를 찾는 작업을 해왔다. 현재 자연계에 존재하는 네가지 기본 힘을 통합하는 대통일이론(grand unified theory)을 추구하고 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물리학자들이 대부분 이런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 오해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대통일이론을 얻는다 해도 이 세계를 정말 다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많은 입자 사이의 상호작용(협동)에 의해 나타나는 고온 초전도와 같은 현상이 곧바로 이해되지는 않는다.
여기에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많은 입자들로 구성된 계(system)에서 나타나는 현상, 예를 들어 철과 같은 물체가 높은 온도상태에서 점점 내려가면 어느 순간 자석의 성질이 나타나는 것이나, 꽃가루를 물 속에 넣으면 격렬하게 불규칙한 운동을 하는 것과 같은 현상에 대한 연구에는 통계적인 방법이 동원된다. 바로 이 분야가 통계역학이다.
안정적인 이득 챙기는 전략 등장
물리학자는 인간이나 동물의 협력을 설명할 단초를 바로 통계역학에서 찾았다. 협력은 작은 그룹 내에서 발생하기 어렵다. 협력 현상이 나타나는 집단은 많은 개체들로 이뤄져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많으면 다르다”(More is different)라는 저명한 물리학자 앤더슨 교수의 말처럼 많아서 협력현상이 생기는 건 아닐까 의심해볼 만하다. 바로 이 점을 알아보기 위해 물리학자는 협력현상을 통계물리학에서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연구해본다.
실제로 캐나다 밴쿠버의 브리티시 컬럼비아대 하우어트 박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공학물리 및 재료공학 연구소 자보 교수와 함께 많은 개체들로 이뤄진 모델 사회에서 발생하는 협력현상에 대해 통계역학적인 방법을 이용해 연구한 결과를 지난해 9월 물리학저널인 ‘피직스리뷰레터스’에 발표했다.
하우어트와 자보는 공공 재화 게임을 변형한 모델을 이용했다. 물론 이 모델은 아주 간단해서 실제 세계를 그대로 반영했다고 할 수 없다. 게임에 참여하는 개체들은 2차원 네모 살창(square lattice)에 각각 한 자리를 차지한다. 이 경우 모든 개체는 동서남북의 네방향에 이웃이 살고 있다. 그리고 공공 재화 게임은 어떤 한 개체(A라고 해두자)와 그의 4명의 이웃, 즉 총 5명이 참여한다.
이 게임에서 A의 점수는 그의 전략이 무엇이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는 게임에 참가해 협력자 또는 배반자의 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
하지만 하우어트와 자보는 아예 게임에 참가하지 않는 전략을 새로 도입했다. 이처럼 게임에 참가하지 않는 이를 불참자(Loner)라고 하는데, 그는 게임의 진행상황에 상관없이 항상 일정량(그 증가량을 σ라고 하자)의 수입에 만족하는 사람으로 기술된다.
하우어트와 자보의 모델에서 불참자의 등장으로 매번 게임에서는 참가자의 수(협력자의 수 + 배신자의 수)가 바뀌게 된다. 참가자의 수를 N이라고 하고 이 중 협력자의 수를 C라고 하자. 그렇다면 A는 전략에 따라 자산이 어떻게 달라질까.
A가 협력자를 선택했다면, 그의 자산은 r$\frac{C}{N}$ - 1(투자량은 항상 1로 정해져 있고, r은 은행에서 불려주는 재산의 증가비율이다)만큼 증가한다. 반대로 배반자를 선택했다면 r$\frac{C}{N}$ 의 이득을 얻게 된다. 그러나 A가 게임에 참여하지 않고 불참자의 전략을 선택했다면 그의 재산 증가는 σ로, 주변의 전략분포에 상관없이 고정돼 있다.
이렇게 게임을 한번하고 나서 A는 자기의 이웃 중 하나(예를 들어 B라고 하자)의 결과를 살펴본다. A는 자기가 얻은 이익을 B를 중심으로 펼쳐진 게임에서 얻은 B의 이익과 비교해본다. 만약 B의 이익이 더 크다면 A는 다음 게임에서 B의 전략으로 바꾸게 된다.
여기서 참가자 모두다 협력자라면 전원은 r-1의 이득을 얻게 되는데, 이 값은 최소한 불참자의 이득보다 많아야 협력을 기대할 수 있다. 즉 r과 σ는 r >; σ + 1의 관계를 지니고 있어야만 한다.
은행 이율이 높아지면 불참자 사라진다
이 모델을 컴퓨터에서 실험해본 하우어트와 자보는 불참자의 유무가 협력현상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알아냈다. 우선 불참자가 하나도 없는 경우에는 은행에서 부풀리는 이율이 상당히 높아지기 전까지는 모든 개체들이 배반자의 전략을 선택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즉 협력현상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은행에서 많은 이율을 창출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불참자가 등장하면 적은 이율에도 불구하고 r >; σ + 1의 관계만 만족시키면 협력자의 전략을 선택하는 개체가 언제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 이유는 협력자, 배반자, 불참자 사이에 형성된 가위-바위-보 같은 분위기 때문이다.
협력자가 많아지면 불참자들은 협력자가 자기보다 이익을 더 얻는다는 사실을 알고 협력자로 전략을 바꾼다. 반면에 배반자와 만난 협력자는 배반자가 이득이 더 많다는 점을 알아차리고 배반자로 변신한다. 이렇게 배반자가 점점 늘어나다가 어느 순간 배반자가 불참자와 만나게 되면, 배반자는 불참자가 최소한의 이득을 챙기지만 그들끼리 이뤄진 집단에서는 더이상 이득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결과 배반자들이 불참자로 변신하게 된다. 그러다 다시 불참자가 많아질 경우 협력자와 만난 불참자는 협력자로 변신하게 된다. 즉 처음의 상태로 다시 돌아오고 이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서로서로 긴장한 분위기 속에서 협력자, 배반자, 불참자가 모두 공존하는 경우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모습도 r의 값에 따라 달라진다. r이 충분히 클 경우에는 협력자들이 설사 배반자들과 만난다 하더라도 협력자 주변에는 협력자가 많다. 그리고 배반자 주변에 협력자가 적을 경우 협력자가 배반자보다 더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다. 이때는 게임 참자가들의 이득이 불참자보다 많아지므로 모든 불참자들이 협력자 또는 배반자로 전략을 바꾸게 된다.
결국 불참자를 전략으로 갖는 개체는 사라지고 안정적으로 협력자와 배반자가 공존하는 현상이 발생한다. 즉 r값을 조금씩 올리다보면 어느 순간부터 불참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다.
전염병의 전파와 비슷한 상태 변화
공공 재화 게임에서 불참자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물리학에서 높은 온도 상태의 철이 온도가 내려가면서 어느 순간부터 자석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과 같은 상전이(phase transition) 현상에 해당한다. 상전이는 물질이 온도나 압력과 같은 외부 환경을 바꿔줌에 따라 다른 상태로 변화하는 협동현상을 말한다.
물리학자는 공공 재화 게임에서 나타나는 상전이 현상이 관련이 없어보이는 다른 분야의 상전이 현상과 똑같은 양태를 보인다는데 주목한다. 그 한 예가 사스와 같은 전염병이 퍼져나가는 현상이다. 전염병은 병의 원인이 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의 전파확률에 따라 계속 퍼져나가든지, 아니면 어느 순간에 사라지는 흡수 상전이 현상을 보인다. 공공 재화 게임에서도 이같은 상전이 현상을 볼 수 있다. 바로 이 점은 물리학이 인간이나 동물 세계에서 나타나는 협력현상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제시해 수 있음을 암시한다.
협력현상을 나타내는 공공 재화 게임의 모델이 인간이나 동물세계에 대한 정확한 기술이라고 말하기에는 아직까지 부족한 점이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우선 인간이나 동물의 협력이 보상이나 벌칙이라는 외부적 요인에 의거하지 않고, 불참자의 등장이라는 내부적 요인에 의거해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이다. 또다른 점은 협력현상에 대한 연구에 물리학적 방법론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더이상 물리학은 물질세계에서만 국한된 연구에서 벗어나, 생태계에서 발생하는 현상, 경제현상, 사회현상 등 수많은 미지의 세계로 그 발을 뻗고 있다. 현재 많은 물리학자들이 경제문제, 교통문제, 네트워크와 같은 다양한 사회현상과 관련된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