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영국 케임브리지의 우스터 주교부인은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맙소사. 인간이 원숭이의 자손이라니. 사실이 아니길 바랄 수밖에…. 그러나 사실이라면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기도를 드리자”라고 외쳤다. 우스터 부인의 당황하는 모습은 당시 신문과 잡지에 부풀려 소개되며 ‘인간은 원숭이의 자손’이라는 말을 사람들 사이에 퍼뜨렸다.
인간과 침팬지는 같은 뿌리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다르다. 널리 알려진대로 원숭이나 침팬지는 사람의 조상이 아니다. 침팬지와 인류는 약 6백만-8백만년 전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나온 이후 독자적으로 진화해 오늘날에 이르렀다. 흔히 하는 말로 인간과 침팬지는 ‘종’이 다르기 때문에 침팬지는 아무리 진화하더라도 인간이 될 수 없다. 분류학상 현생인류(Homo sapiens)는 영장목 인류과(Hominidae) 호모속(Homo)에 속하며, 침팬지(Pan troglodytes)는 영장목 유인원과(Pongidae) 판속(Pan)에 속한다. 생물을 분류하는 단계인 종, 속, 과, 목, 강, 문, 계 중 침팬지와 인간은 과(family)부터 다른 길을 걷는 것이다.
하지만 최근 기존의 이런 분류체계를 완전히 뒤바꿔놓는 새로운 연구결과가 발표돼 주목받고 있다. 지난 5월 19일, 미국 미시간주 웨인주립대 의대의 모리스 굿맨 박사팀은 침팬지를 현생인류와 동일한 인류과뿐 아니라 같은 호모속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골격 구조나 생리적 특징으로 생물을 분류하는 전통적 분류학에 따르면, 침팬지는 고릴라, 오랑우탄과 함께 유인원과에 속한다. 한편 인류과에는 흔히 듣던 네안데르탈인이나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등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멸종해 화석으로만 남아있고, 지구에 현존하는 호모속 동물은 사람이 유일하다.
굿맨 박사는 화석이나 골격 구조가 아니라 침팬지의 DNA를 이용해 실험을 했다. 연구팀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람과 침팬지, 고릴라, 오랑우탄, 원숭이 및 쥐의 97개 유전자 염기서열을 비교했다. 그 결과 인간과 침팬지는 99.4%의 확률로 동일한 유전자 염기서열을 갖고 있었다. 굿맨 박사는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한 논문에서 “이런 유사성으로 볼 때 침팬지는 기존의 형태학적 분류보다 인간과 훨씬 가까운 종인 것으로 드러났다”며 “이제는 침팬지도 사람과 같은 호모속으로 분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논문에 따르면 침팬지와 사람이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으며 고릴라, 오랑우탄, 원숭이 순으로 유전자 상동성이 떨어졌다. 대조군으로 이용된 쥐 유전자는 영장류와 아무런 유연관계도 보이지 않았다.
유전자 부위따라 달라지는 상동성
사실 이런 주장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1991년 생리학자이자 생태학자인 제레드 다이아몬드 박사는 인간을 ‘제3의 침팬지’라고 불렀다. 지구의 침팬지는 흔히 침팬지라 부르는 일반 침팬지와 피그미침팬지(Pan paniscus)라 불리는 보노보, 이렇게 두 종이 있다. 다이아몬드 박사는 인간을 여기에 포함시켜 제3의 침팬지로 부를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사실 그의 주장은 과학적 증거의 바탕이 없는 일종의 ‘캠페인’이었다. 유전자 비교로 발표된 이번 결과는 이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를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굿맨 박사의 결과에 대해 모든 과학자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미 캘리포니아공대(CalTech) 로이 브리튼 박사는 지난 2002년 9월 미과학원회보에 인간과 침팬지의 유전자 상동성을 95%로 발표했다. 그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근거로 “이번 결과는 너무 높은 확률을 보인다”며 “인간은 여전히 지구에서 유일한 종”이라고 말했다. 굿맨 박사는 이에 대해 “브리튼 박사의 결과를 부정하진 않지만, 유전자 상동성은 유전자의 어떤 부분을 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굿맨 박사팀의 ‘99.4%’는 유전자의 핵심 부위, 즉 특정 단백질을 지정하는 염기서열만 비교했을 때 나온 결과라는 말이다. 굿맨 박사는 “이번 연구는 유전자만을 대상으로 했지만, 유전자 이외의 부분, 즉 특정 단백질을 암호화하고 있지 않는 정크DNA에 대해서는 이 확률이 더 낮을 것”이라고 밝혔다.
연구팀은 인간과 침팬지의 분리시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굿맨 박사는 “유전자의 이런 미세한 차이는 8백만년보다는 비교적 최근인 6백만년 전 사람과 침팬지가 같은 조상에서 갈라져 나왔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석유통 굴려 무리의 대장 차지
그렇다면 6백만년 전 공통조상으로부터 갈라져 나온 침팬지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고 있을까.
침팬지의 골격구조는 사람과 비슷하다. 똑바로 서면 키가 1-1.7m 정도고, 몸무게는 40-50kg이니 사람으로 치면 날씬한 편이다. 하지만 2족보행은 그리 편하지 못하다. 나무에서 이리저리 옮겨다니고 땅에서 걸을 때는 네발을 사용하는 경우가 더 많다. 보통 50마리 이상이 집단을 이뤄 10-30㎢의 영역을 점유하며, 주 서식지는 아프리카 열대우림과 사바나 지역이다.
침팬지의 식성 또한 인간과 비슷하다. 침팬지 연구 초기에는 이들이 주로 과일이나 나뭇잎, 씨앗 등을 먹는 초식동물인 줄 알았다. 실제로 침팬지는 과일을 몹시 좋아해 먹는 시간의 4분의 3 이상을 과일을 먹으며 소비한다. 그렇다고 침팬지가 초식동물인 것은 아니다. 침팬지가 먹는 음식은 매우 다양하다.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열대우림에서 40년 간 침팬지를 연구·관찰한 제인 구달 박사는 자신이 관찰하던 ‘데이비드 그레이비어드’침팬지가 놀라운 행동을 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는 분홍빛의 무언가를 잡고 있었는데, 바로 새끼야생돼지였다. 이때가 1960년이었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침팬지가 육식을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후로 침팬지가 조그만 원숭이, 영양같은 것을 잡아먹는 모습이 관찰됐다.
한편 침팬지는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구를 사용하는 동물이다. 이 사실 역시 1960년말 데이비드에 의해 발견됐다. 그는 나뭇가지를 꺾어 잎을 모조리 딴 후, 흰개미집의 구멍을 쑤셨고, 흰개미들은 ‘침입자’를 물리치기 위해 나뭇가지를 물고 늘어졌다. 이때 그레이비어드는 나뭇가지를 흰개미집에서 빼낸 뒤 이를 입에 넣고 훑어 먹었다. 이는 인간을 제외하고 야생에서 도구를 사용한 생물의 첫번째 기록이다.
침팬지는 도구를 먹이사냥뿐 아니라 인간처럼 좀더 복잡한 계급투쟁에도 이용한다. 구달이 관찰하던 ‘마이크’라는 침팬지는 도구를 이용해 무리의 으뜸 수컷이 된 최초의 침팬지다. 마이크는 구달의 캠프에서 나온 석유통을 굴리면 큰소리가 난다는 사실을 알았다. 몸집이 작고 힘이 약해 무리 중 계급이 낮았던 마이크는 석유통을 굴리며 다른 수컷을 위협해 마침내 무리의 대장이 됐다. 동물사회에서 으뜸 수컷은 언제나 몸집이 크거나 힘이 센 것이라는 인간의 ‘상식’을 깨트린 사건이었다.
침팬지 ‘고블린’은 좀더 교묘한 방법으로 으뜸 수컷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분열시킨 후 정복하라’는 제국주의의 오랜 수법을 이용해, 경쟁 수컷을 분열시켜 다른 이와 동맹을 맺은 후 이들을 하나씩 제거하는 방법으로 무리의 대장자리에 올랐다.
있는 그대로의 관찰이 중요
침팬지는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집단생활을 한다. 하지만 침팬지의 방식은 조금 다르다. 대부분의 사회적 동물에서 수컷은 다 자라면 무리에서 추방된다. 이 수컷은 암컷 무리를 만나 생식을 위해 다른 수컷과 싸우고 다시 다른 무리를 찾아 떠난다. 하지만 침팬지 집단에서는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
수컷 침팬지들은 그들이 태어난 집단에 남아 보호자가 되고 새로운 후손의 아버지가 된다. 반면 암컷은 다 자라면 출생집단을 떠나 새로운 집단에 들어간다. 같은 집단의 다른 수컷은 그의 가까운 친척이다. 또한 어린 새끼들은 자신의 아들이거나 가까운 친척의 후손이다. 권오길 강원대 생물학과 교수는 “이런 사회 구조는 수컷 침팬지에게 진화적 이점을 부여한다”고 설명한다. 자신의 후손을 더많이 남기기 위해 다른 수컷과 싸울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침팬지는 보통 알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온순하지만은 않다. 침팬지 수컷은 자신의 영역을 순찰·경계하며, 영역에 들어온 다른 구성원을 쫓아낸다. 만일 수컷이 새끼를 데리고 있는 낯선 암컷과 만나면 그 새끼를 죽이기도 한다.
또한 다른 집단 수컷들과의 전쟁을 통해 그들을 죽이고 영역을 취하기도 한다. 침팬지 종족 간의 전쟁은 인간의 전쟁 못지 않게 잔인하다. 제인 구달은 1974년부터 4년간 치러진 침팬지 종족 간의 전쟁을 관찰한 후, 영국의 철학자 홉스가 인간을 묘사할 때 썼던 잔인하고 야만적이며 거칠기 짝이 없는 특성을 침팬지도 모두 지녔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최근 그의 관점은 바뀌었다. 구달은 한 인터뷰에서 “침팬지의 이런 면을 인간의 시각으로 재단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그들만의 방식이 있고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점이 중요하다”며 “어쩌면 내가 침팬지를 택한게 아니라 침팬지가 나를 택했는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염기서열 해독 끝난 22번 염색체
최근 침팬지 연구는 분자생물학적 도구를 이용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지난 2001년 3월, 한국과 일본, 독일, 중국, 대만을 중심으로 ‘침팬지게놈연구 국제컨소시엄’이 결성됐다. 컨소시엄은 그간의 연구결과를 정리해 지난 2002년 1월, 침팬지 전체 게놈을 BAC 클론(10만 염기쌍 정도의 작은 DNA조각)으로 나누는 방식으로 ‘침팬지게놈 물리지도’를 완성했다. 물리지도란 전체 게놈을 1천m 끈으로 보고 이 끈의 구성(염기서열)을 알기 위해, 10m 정도로 짧은 끈(BAC 클론)으로 나눠 작은 끈들의 상대적 위치를 결정한 것이다. 이렇게 잘린 BAC 클론의 위치는 각 조각의 말단염기서열을 알아내 어떤 조각이 어느 조각 다음에 오는지 정해진다. 이 방법을 통하면 침팬지 전체 게놈 중 일부분(BAC 클론 말단부분)의 염기서열을 알 수 있다. 컨소시엄은 이를 이미 100% 해독돼 있는 인간게놈의 염기서열과 비교해 과학전문지 ‘사이언스’ 1월 4일자에 발표했다. 논문에 따르면 침팬지 BAC 클론의 말단염기서열과 인간의 전체 게놈은 98.77% 동일했다.
컨소시엄의 한국대표를 맡고 있는 한국생명공학연구원의 박홍석 박사는 “사이언스의 연구결과를 챔팬지 전체 게놈의 염기서열이 밝혀진 것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며 “이번 연구결과는 침팬지게놈 연구의 초안을 마련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
물론 물리지도의 완성만으로도 침팬지와 인간게놈의 상동성을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마치 대통령선거에서 출구조사만으로 당선자를 예측하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박 박사는 “침팬지게놈의 전체 염기서열이 밝혀지기 전까지 어느 누구도 확신해서는 안된다”며 “지금까지 밝혀진 침팬지 염기서열은 전체의 2%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박 박사에 따르면 흔히 말하는 ‘침팬지와 인간의 DNA는 99%가 같다’는 말은 지금까지 밝혀진 2%의 침팬지 염기서열을 인간DNA와 비교한 결과다.
컨소시엄은 최근 인간의 21번에 해당하는 침팬지 22번 염색체의 전체 염기서열을 해독했다. 이 연구결과는 오는 6월말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게재될 예정이다. 인간 21번 염색체에는 모두 2백50개의 유전자가 있는데, 이 부분만 비교하면 99% 이상이 동일하다고 한다. 또한 일부과학자는 2백50개 유전자 중 일부 유전자는 사람에게만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특히 인간의 21번 염색체에 기억 담당 유전자가 있는 것으로 미뤄봐 침팬지의 22번에는 이 유전자가 다른 양상으로 존재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 부분은 앞으로 인간의 유일성을 설명하는 키워드가 될 것이다.
침팬지게놈연구는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인간게놈프로젝트의 결과처럼 침팬지 전체 게놈의 해독도 인류에게 큰 파장으로 다가올지는 두고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