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등학교 과학시간. 과학실의 테이블 위에는 실험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과학실험의 단골손님 중 하나가 바로 전선. 전선을 만드는 재료는 잘 알려져 있듯이 구리선이다.
구리는 전기저항이 있기 때문에 전선에 전류가 흐르는 동안 전력의 일부가 손실된다. 전기저항이 없는 물질로 전선을 만들면 어떨까. 매우 가는 전선을 통해 대량의 전류를 공급할 수 있고 손실되는 전력이 거의 없다면 전력장치의 성능이 훨씬 좋아질 것이다. KAIST 물리학과 염도준 교수가 이끄는 고온초전도체 연구실에서는 전기저항이 없는 물질을 연구하고 있다.
특정 온도 이하에서 저항이 없어지는 물질을‘초전도체’라고하며, 이물질의저항이0이되는온도를‘초전도 전이온도’라고 부른다. 1910년대에 전이온도가 절대온도 4.2K인 고체수은이, 1960년대에 전이온도가 17K인 니오븀화합물이 발견됐다. 절대온도 0K가 영하 2백73℃이므로 초전도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헬륨가스 냉동기로 온도를 매우 많이 낮춰야 한다. 그러나 헬륨은 지구상에 극히 소량 존재하므로 경제성이 없다. 상용화가 가능할 만큼 전이온도가 높은 고온 초전도체를 만드는 것이 관건이다.
1987년에 전이온도 90K의 고온초전도체가 등장했다. 이트륨과 바륨, 구리, 산소의 화합물인‘이트륨화합물’(YBCO)이그주인공. 이트륨화합물은 전류가 흐르지 않는 세라믹이지만 질소가스 냉동기를 사용해 온도를 90K로 낮추면 초전도체로 변한다. 지구 대기의 대부분이 질소이므로 경제성에 문제가 없다.
선 모양 합성이 난제
현재 병원의 자기공명영상장치(MRI)에 저온초전도체인 니오븀화합물이 사용되고 있다. 기초과학지원연구원이 소장하고 있는 핵융합장치에도 니오븀과 주석의 화합물인 저온초전도체가 사용되고 있다. 저온초전도체보다 비싸지 않은 고온초전도체가 상용화되면 의료기기나 대체에너지 개발 분야도 획기적인 발전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리 쉽지 않다.
전력장치에 사용되는 물질은 전선 모양으로 합성이 가능해야 한다. 이트륨화합물은 세라믹이므로 유연한 전선 모양으로 합성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이 필요하다. 대량의 전류가 흐르게 하려면 이트륨화합물의 결정이 한 방향으로 나란히 정렬돼야 하는데, 이는 매우 어렵다.
따라서 정렬하기 쉬운 니켈합금에 산화물을 입히고 그 위에 이트륨화합물을 합성한다. 이는 5단계 공정을 거쳐 이뤄지는데, 연구실에서는 이 과정에 사용되는 외국 기술을 개선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다. 그 결과 다수의 국내특허와 미국특허를 확보했다. 특히 과학기술부 21세기 프론티어사업에 참여해 국내 연구소, 기업체와 협력 연구도 진행 중이다.
이트륨화합물을 정렬할 때는 각 결정이 배치되면서 틀어지는 각도가 작을수록 좋다. 평행을 이루며 정렬돼야 많은 양의 전류가 끊어지지 않고 흐를 수 있기 때문이다. 틀어진각도가10。를 넘으면 성능이 많이 떨어지는데, 연구실에서는 8-9。각도로 정렬이 가능하다.
이트륨화합물의 합성이 어려운 또하나의 이유는‘보텍스’(Vortex)다. 고온초전도체에 전류가 흐르면 자기장이 생긴다. 이 자기장이 양자(알갱이)화된 것이 바로 보텍스다. 전류가 흐르면 일정한 방향으로 힘을 받게 되므로 보텍스, 즉 자기장이 움직인다. 이때 패러데이 법칙에 따라 전압이 유도돼 저항이 발생하면 초전도체로서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보텍스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초전도체 내부에 고정점 역할을 하는 원자구조가 있어야 한다. 연구실에서는 초전도체의 합성 기술과 함께 보텍스 운동과 같은 기초적 현상도 연구하고 있다.
참고로 이트륨 대신 비스무스와 칼슘이 첨가된 화합물도 고온초전도체로서 더 쉽게 전선 모양으로 만들 수 있다. 3-4년 전에 이미 일부 상용화된 바 있으나 성능이 불충분하고 값이 비싸 많이 사용되고 있지 않다.
산학협력이 상용화의 관건
약 5년 전부터 미국과 일본이 고온초전도체 합성 분야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일본이 지난해 먼저 10m를 합성한데 이어 미국에서도 같은 길이를 합성하는데 성공했다. 현재 연구실에서는 12m를 합성할 수 있으나, 성능 면에서 아직 미국과 일본을 능가하지 못한다. 염 교수는“12m는 아직 짧다. 수백m 정도 합성해야 상용화가 가능하다”고 말하면서 기업체가 연구를 이어받아 수행해야 할 시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우리나라 기업의 사정상 대학에서 개발된 기술이 이전되기 쉽지 않다”며 염 교수는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대학에서 도출된 아이디어를 실현 가능한 기술로 개발하고 이것이 상품화돼 시장을 확보해야 한다. 작은 아이디어라도 소중히 생각하는 태도와 시장에 대한 확신을 갖고 기술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실제 염 교수의 연구실에서도 초기에는“과연 저 생각이 실현될까”하며 의아해했던 아이디어가 좋은 연구성과로 나타나기도 했다.
염 교수는 학생 시절부터 초전도체가 전기∙전력∙전자 분야에 큰 기여를 하리라 확신했다. 미국 샌디에고소재 캘리포니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 부터 이 연구를 시작했고, 현재 염 교수의 연구실은 이 분야에서 국내 대학 중 유일하게 국가지정연구실로 지정됐다.“ 꿈을이루신것아닙니까”라는 질문에 염교수는“연구실에서 개발된 기술이 기업으로 이전되고 상품화된 후에야 내 꿈이 이뤄졌다고 말할 수 있다” 고 답했다. 현재 염 교수의 연구실은 박사후연구원 1명, 박사과정 4명, 석사과정 3명으로 구성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