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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말 위기 닥친 인류 문명의 요람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그리고 이슬람 유적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이라크는 흔히 ‘문명의 요람’이라 불린다. 이 나라 한가운데로 흐르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두 강이 가져다준 비옥한 충적토가 농경의 적지가 되면서 ‘메소포타미아’(그리스어로 두 강 사이란 뜻) 문명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독립된 하나의 문명이 아니다.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시리아 문명 등을 모두 일컫는 집합개념이다. 전쟁이 벌어진 이라크 땅에 숨쉬는 문명을 살펴보자.

에덴동산 있었던 곳으로 추정


4천2백년 전 축조된 우르의 지구라트. 원래는 4층 구조였 다고 하나 지금은 2층까지만 남아 있다. 용도는 신전이었 던 것으로 추정된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첫 주자는 미국의 고고학자 사무엘 크레머가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다”라고 표현한 그 수메르 문명이다. 그때가 기원전 3500년 경.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문명의 싹을 틔운 것이다. 수메르인들은 씨앗을 뿌리면 더 많은 수확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쐐기 문자를 이용해 거래내용과 재산상태를 기록했다.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기 위해 신전을 축조하는 등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갖췄다. 배와 바퀴도 발명해 원거리 무역을 했으며 영웅의 이야기를 그린 ‘길가메시 서사시’ 같은 문학작품도 내놓았다.

아직 국가 개념이 등장하기 전이라 도시 규모의 공동체가 유지됐는데, 제사권과 통치권을 한손에 쥔 루갈(왕)이라 불리는 우두머리가 다스렸다. 도시의 중심에는 최고신이자 도시의 수호신을 모신 지구라트(ziggurat)라는 피라미드 형태의 신전 건축물이 세워졌다. 번쩍거리는 황금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루갈은 모든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지구라트에서 제사를 올렸다. 이때에는 하프와 같은 악기도 동원해 음악을 들려줬다.

수메르 도시국가의 하나였던 우르는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3백50km 떨어져 있다. 이곳에는 허물어지긴 했으나 원래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지구라트가 아직 남아있다. 그 주위에선 신관들의 방, 왕궁, 왕묘, 창고, 문서보관소, 주거시설의 흔적들도 눈에 띈다. 20세기 초 이곳 왕묘에선 수많은 황금유물이 발견돼 우르의 번성을 증명한 바 있다. 수메르 시대엔 우르 외에도 우루크, 니푸르, 에리두, 키시, 와르카 등 도시가 여럿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지구라트의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수메르 땅은 구약 창세기에 인류의 고향으로 묘사된 에덴동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우르는 창세기에 ‘열국의 아비’로 등장하는 아브라함의 고향이기도 하다. 이곳이 창세기에서 말하는 ‘갈대아 우르’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 되던 해, 야훼(하나님)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하나님이 예비한 복된 땅을 향해 우르를 떠났다. 그것은 야훼만을 믿도록 하기에 여러 신들을 모시는 다신의 땅 수메르 지역은 적절치 못하다는 판단이 작용하지 않았나 보여진다. 아무튼 그는 우르를 떠남으로써 후일 유일신 종교인 유대교와 기독교, 이슬람의 조종(祖宗)이 됐다.

바벨탑에서 공중정원까지

잘 나가던 수메르 왕국은 기원전 1900년 경 북쪽에서 일어난 바빌로니아 제국에게 정복되면서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바빌로니아는 도시국가가 아니라 광대한 영토를 거느린 제국으로 왕의 권세는 대단했다. 성벽과 궁전, 신전은 수메르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으며, 성의 정문인 이시타르 성문은 광택 타일로 신성한 동물들을 새겨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신년행사 때에는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축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정의를 나라 안에 빛내기 위해서’로 시작되는 전문과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복수의 내용을 담고 있는 함무라비 법전(루브르 박물관 소장)을 편찬한 함무라비 대왕(기원전 1792-1750 재위). 창세기에 ‘신에 대한 모욕’ ‘인간 허영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는 바벨탑과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꼽히는 공중(空中) 정원을 건설한 네부카드네자르 대왕(기원전 605-561 재위). 이들은 바로 바빌로니아 제국을 통치했던 군주였다.

네부카드네자르 대왕이 산간 오지가 고향인 왕비의 향수를 달래주기 위해 에덴동산에서 힌트를 얻어 지었다는 공중정원의 곁에 세워진 왕궁은 기원전 539년 페르시아 군대에 의해 한차례 파괴됐다. 그런데도 동방원정 길에 이곳에 들렀던 알렉산더 대왕은 그 아름다움에 매료돼 오랫동안 머물렀고, 돌아오던 중 병을 얻었을 때도 이곳에서 요양하다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바빌로니아의 뛰어난 과학과 천문학, 건축술이 그리스로 전해져 서구문명의 기반이 됐다.

바빌로니아 제국과 거의 비슷한 시기 북부 메소포타미아에는 광대한 영토를 거느린 세계 최초의 대제국 아시리아 왕국이 있었다. 지금 이라크 제2의 도시인 모술 인근의 니네베 왕궁 터에선 “나는 강력하다. 정말로 강력하다. 모든 왕 중에서 나와 겨눌 자는 없다”며 자신만만했던 아슈르바니팔 대왕의 기세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아슈르바니팔 대왕의 사자 사냥도’(대영박물관 소장)가 발견됐다. 이 유물은 아시리아 제국의 뛰어난 사실적인 조각으로 자신의 예술적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런 사실적 기법은 왕궁의 정문에 쌍으로 세워놓은 ‘라마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람의 얼굴에 독수리의 날개를 단 거대한 황소상을 뜻하는 라마스는 한마디로 말해 수호신상이다. 많은 라마스가 19세기 유럽의 박물관으로 실려나갔지만 아직도 현장에 남아 있다. 아시리아인들은 또 쐐기문자 점토판을 무수히 만들어 자신들의 것은 물론 수메르와 바빌로니아의 이야기까지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노아의 홍수’ 원형으로 보이는 대홍수 이야기도 그 속에 담겨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 이슬람 성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있는 하트라 도시 유적.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약 3천년 간 지속되다 사라졌다. 그로부터 4백년 후 이라크 땅엔 로마제국과도 힘으로 맞섰던 무역국가 파르티아 제국이 들어섰다. 수도 크테시폰에는 왕궁으로 쓰였던 아치형 건물이, 하트라란 도시 유적에는 ‘디완’이라 불리는 건축구조를 기본으로 해 지은 신전과 신상 조각이 각각 남아있다. 하트라는 이라크에서 유일한 세계문화유산이기도 하다.

이슬람을 받아들인 뒤인 762년 이슬람의 두번째 왕조인 압바스 왕국이 이 땅에 들어섰다. 수도는 티그리스 강변의 바그다드. 압바스 왕국은 ‘아라비안 나이트’가 쓰여진 곳인데다 과학과 천문학, 수학, 의학, 문학이 발달해 이슬람 문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아울러 예언자 무하마드의 후계자인 후세인과 알리가 순교한 땅이라 시아파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당시 인구 1백만을 자랑하던 수도 바그다드는 1258년 몽고군이 쳐들어와 불을 지르는 바람에 인구의 절반이 사라지고 도시 전체가 초토화되는 아픔을 겪었다. 따라서 현재 바그다드에선 그 이전의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그 뒤로 비잔틴제국과 오스만제국, 영국의 지배를 차례로 받다 1932년에야 이라크로 독립했다. 이라크인들은 그때 자기네 문화유산을 보존하기 위해 주요 도시에 박물관을 세우기 시작했다. 바그다드의 이라크박물관은 이슬람권에선 카이로에 있는 이집트박물관에 이어 두번째로 크다.

황량한 사막인 듯 보이는 이라크 땅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인류의 문명사와 끊을 수 없는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 땅이 다시 전쟁을 맞았다. 지난 1991년 걸프전 때에도 여러 유적이 총격과 폭격을 받았는데, 이번에도 이런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지난 3월 22일 바그다드에 대한 융단 폭격의 결과 박물관이 파괴됐다는 보도가 있었다.앞으로 미국의 지상군이 바그다드로 직접 진격해 사담의 군대를 해체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오랜 세월을 견뎌온 인류의 고귀한문화유산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을 수있다. 인류 최초의 문명이 가공할 첨단무기라는 문명의 이기에 의해 파괴됐을 때, 우리는 문명이란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의문이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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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권삼윤 문명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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