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천년 고도 경주에는 수많은 왕릉이 있다. 이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무덤은 천마도가 출토된 천마총. 목덜미의 갈기와 꼬리털을 휘날리며 하늘을 날아오르는 백마는 지금 봐도 그 생동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지만 이 천마도가 자작나무 껍질이 아닌 다른 곳에 그려졌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어찌된 사연일까.
1973년 여름 장마가 걷히고 오랜만에 화창해진 늦여름의 8월 20일, 우리나라 옛 무덤 발굴역사에 길이 남을 유물 하나가 처음 알려진다. 그냥 155호라는 번호만 붙은 이름 없는 무덤에서 1천5백년 세월을 견뎌온 컬러 그림 한점이 색깔도 선명하게 찬란한 모습을 내민 것이다.
나무 껍질 위에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 올라가 버릴 것 같은 천마(天馬)가 그려진 그림이었다. 덕분에 이 무덤은 155호분이라는 무명의 설움에서 벗어나 천마총이라는 영광의 이름을 갖게 됐다.
1970년대 초라면 우리나라가 한창 발전의 디딤돌을 놓던 시절이다. 고도 경주에도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미추왕릉지구에 있는 옛 무덤들 중 가장 큰 98호 무덤을 발굴해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그때 까지 이렇게 큰 고분을 발굴해본 경험이 많지 않았으므로 좀더 규모가 작은 155호 고분을 먼저 시험삼아 발굴하기로 하고 4월 16일 첫 삽을 떴다. 이름난 고고유물의 발굴이 대부분 우연히 이뤄지듯이 천마총 역시 시험발굴이라는 ‘연습게임’에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천마도를 품고 있음이 밝혀지게 된다.
나무껍질 누빈 위에 그린 천마
천마는 예부터 옥황상제가 하늘에서 타고 다닌다는 신령스러운 동물로 알려져 왔으며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비슷한 그림이 있다. 우선 천마도의 그림 상태를 좀더 상세히 알아보자. 크기는 가로 75cm, 세로 56cm, 두께 0.6cm로 대체로 중형TV의 화면 정도이고 쓰임새는 ‘말다래’였다. 장니(障泥)라고도 불리는 말다래는 말안장에서 늘어뜨려 진흙이 사람에게 튀는 것을 막는 장식품이다. 말안장의 좌우에 매달아 쓰는 것이므로 처음 발굴될 때는 2장이 겹쳐 있었다. 나머지 한장은 심하게 훼손돼 있으나 같은 그림으로 간주했다. 나무 껍질 위에다 거의 45도 각도로 14줄의 선을 서로 교차되게 누볐다. 마름모꼴의 격자가 오늘날의 누비이불을 연상케 한다. 마름로꼴 누빔은 아마 사용중에 껍질이 찢기고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함인 듯하다. 위쪽 가운데 부분은 반달 모양으로 얕게 패었고 바깥 둘레는 넓이 1.2cm의 얇은 가죽 단을 안팎으로 덧댔다. 말안장에 매달 수 있도록 좌우에 각각 2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그림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붉은색, 흰색, 검은색을 이용한 전체적으로 단아한 느낌이다. 색깔을 내는 칠감의 원료는 흰색이 호분(胡粉)이라는 돌가루이며 검은색은 먹이다. 그리고 붉은색은 주사(朱砂)와 광명단이라는 일종의 납 화합물로써 모두 옛 그림에 흔히 사용하는 천연무기물 물감이다. 표면 안쪽으로 폭 10cm 둘레에는 인동덩굴모양의 둥근 무늬가 가로 6개, 세로 4개씩 모두 20개의 띠를 돌렸다. 그리고 가운데에다 하늘을 나는 흰말을 그렸는데, 앞 뒤 발을 넓게 뻗었으며 벌린 입에서 긴 혀를 내밀고 있다. 목덜미의 갈기와 힘차게 뻗쳐 올린 꼬리털은 바람에 휘날린다. 날개가 있고 몸뚱이의 군데군데에는 반달 모양의 문양이 돋아 있다. 힘차게 하늘을 달리는 천마가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원숙한 그림 솜씨가 돋보인다.
이 천마도는 신라뿐 아니라 삼국시대 전체를 통틀어 벽화를 제외하면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천마총에는 이외에도 상서로운 새를 그린 서조도(瑞鳥圖)와 말 달리는 모습을 그린 기마인물도가 같이 출토됐는데, 천마도와 마찬가지로 나무껍질에 그렸다. 천마총은 이처럼 우리나라 옛 사람들의 회화 솜씨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그림이 여럿 나온 무덤으로 유명하다.
천연 방부제·방수제 갖춘 백화수피
천마도는 그림재료로 흔히 쓰는 천이나 비단, 가죽이 아닌 나무껍질을 캔버스로 이용했다는 점이 특별하다. 무슨 이유에서 나무껍질을 택했으며, 어떤 나무의 껍질을 이용했을까.
처음 발굴단에서는 눈으로 보아 백화수피라고 추정했고, 나중에 중앙 임업연구원에서 조사한 전문적인 검사에서도 역시 백화수피로 판정됐다.
‘백화수피’(白樺樹皮)의 백화는 자작나무를 뜻하는 말이니 글자 그대로 자작나무 껍질을 일컫는다. 왜 이 나무의 껍질을 옛 사람들은 귀중하게 쓰게 됐을까.
대부분의 나무껍질은 거북등처럼 갈라지고 깊게 골이 패이며 표면의 색깔이 흑갈색이다. 하지만 자작나무 종류는 독특하게 색깔이 하얗고 표면이 매끄러운 껍질을 갖는다. 그냥 하얗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담배 갑에 들어 있는 은박지 두께에 불과한 얇은 ‘종이 껍질’이 겹겹이 쌓여있다. 한장 한장이 잘 벗겨지고 매끄럽기까지 하다.
또 여기에는 큐틴이란 일종의 방부제가 다른 나무보다 많이 들어 있어 잘 썩지 않고 곰팡이도 잘 피지 않는다. 또 왁스 성분이 많아 물이 잘 스며들지 않는 높은 방수성도 갖는다. 그래서 수천년 땅 속에 묻혀 있어도 거뜬히 버틸 수 있는 능력을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았다.
자작나무 껍질에서 그림 그리기의 바탕인 껍질 판을 쉽게 만들 수 있다. 방법은 이렇다. 우선 껍질이 주위의 동료 나무보다 매끄럽고 더 흰 나무를 찾아 줄기에 가로로 칼자국을 돌려 넣는다. 필요한 길이만큼 줄기의 아래 부분에다 다시 같은 방법으로 칼자국을 넣은 다음, 위 아래 칼자국 사이에 세로로 직선 칼자국을 넣는다. 목질부와 껍질을 조심스럽게 좌우로 벌리면 필요한 껍질 판을 얻을 수 있다. 껍질 판의 길이는 필요에 따라 길거나 짧게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고, 너비는 나무둘레와 같으니 알맞은 나무를 고르면 된다.
천마도의 경우 지름 약 20cm의 나무에서 껍질을 벗겨 쓴 것으로 보이고, 나이는 30-40년 정도로 짐작된다. 자작나무는 종이가 흔해지기 전에는 천마도처럼 그림을 그리고 불경을 새겨 넣는 재료로 안성맞춤이었다. 최근 기원전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경이 발견됐는데, 이것도 자작나무 껍질에 인도의 옛 문자인 산스크리트어로 석가모니의 가르침과 시를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자작나무 껍질의 우수한 물막이 성질은 자작나무가 많이 분포하는 북부지방 사람에게 아주 유용하게 이용된다. 러시아 지방의 아무르 강, 우수리 강의 하류 유역에 거주하는 소수 민족인 나나이족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배를 타고 연어와 송어를 잘 잡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기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무대로 살아가는 여진족에게도 그대로 전수돼 우리 선조들이 골탕을 먹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세종 19년(1437) ‘평안도 연변 고을에서는 겨울철이 되면 도적들은 화피선(樺皮船)을 타고 강을 건너와서 노략질을 하나 우리는 배가 없어서 잡지 못한다’고 했으며 다음해인 세종 20년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이 외에도 활을 만들 때 손잡이 부분을 잡을 때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자작나무나 벚나무 껍질을 바른다. 하지만 벚나무보다는 자작나무가 더 고급품으로 여겨졌다. 자작나무는 껍질만큼이나 나무속도 황백색으로 깨끗하고 고르다. 추운 지방의 서민들은 나무를 쪼개어 지붕을 이었으며, 껍질로 시신을 싸서 매장했다. 또한 자작나무 수액(樹液)은 위장병을 비롯한 잔병을 낫게 하고 건강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예로부터 널리 이용됐다.
오늘날 우리는 천마도를 ‘자작나무 껍질 위에 그린 그림’이라고 알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결론부터 말하면 백두산에서 시베리아 벌판에 걸쳐 자라는 새하얀 껍질을 가진 바로 그 자작나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같은 품질의 신라 나무 이용한 듯
조금 전문적인 이야기로 들어가 우리나라에 자라는 자작나무의 족보부터 알아보자. 자작나무는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를 비롯해 박달나무, 물박달나무 등과 함께 자작나무과 자작나무속이라는 무리에 속한다. 이들 중 박달나무와 물박달나무는 껍질의 모양이 너무 다르니 더 따져볼 것도 없다.
반면에 나머지 셋은 모두 하얀 껍질이 그들의 트레이드마크라서 마치 일란성 세쌍둥이처럼 거의 비슷하다. 그래서 천마도를 그리는데 쓰인 나무껍질이 세나무 중 어느 것인지를 정확하게 알아내는 방법이 없다.
나무껍질을 이루는 세포형태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봐도 세나무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눈으로 봤을 때는 자작나무 껍질이 더 흰빛이고 잘 벗겨져서 품질이 좀더 낫다. 그러나 덧칠그림이 그려져 있고 땅속에 오랫동안 묻혀있어서 색이 변해버린 천마도의 경우, 눈에 보이는 이런 차이는 나무의 종류를 찾아내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마디로 세나무의 껍질은 어느 것이나 ‘백화수피’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고 쓰임새도 거의 다르지 않다.
이처럼 식물학적으로는 구분에 어려움이 있을 지라도 고고학적인 의미는 크다. 천마총이 만들어진 연대를 5-6세기로 추정하고 있으니 삼국통일 이전이고 자작나무가 자라던 곳은 고구려의 땅인 북한의 추운 지방이다. 반면에 거제수나무나 사스레나무는 남한의 태백산 줄기로 이어진 산에서는 지금도 흔히 만날 수 있다.
만약에 천마도를 그린 나무껍질이 자작나무라면 고구려 땅에서 가져온 것으로 봐야 하며 두 나라 사이에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실증적 증거가 된다.
그러나 앞뒤 사정을 따져보면, 천마도의 재료는 자작나무이기보다는 오히려 거제수나무나 사스레나무 껍질일 가능성이 더 높다. 왜냐하면 세나무의 껍질은 품질이 엇비슷하고 쓰임새도 같으므로 구태여 수입품을 쓰지 않더라도, 당시 신라의 영토 안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천마총에서 출토된 서조도, 기마인물도를 비롯해 금관총과 황남대총에서도 여러‘백화수피’제품이 출토됐다. 이로 미뤄봐 당시 신라에서는‘흰 나무껍질’의 수요가 많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모두를 고구려로부터 들여왔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처럼 나무로 만들어진 문화재의 나무 종류를 알아보는 일은 단순한 흥미차원이 아니라 당시의 국가 간이나 지역 간의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증거를 확보하는 일이다. 그래서 발굴 터에서 나오는 썩은 나무토막 하나라도 과학적인 분석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