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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왕의 등장 알리는 징표 말

백마띠 드세다는 속설 근거 없어

여섯 마을의 우두머리들이 한자리에 모여 중요한 일을 의논하고 있었다. 이때 하늘에서 갑자기 신기한 빛이 내려오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너무 놀라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함께 가보자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빛이 가리키는 지역을 향해 정신없이 달렸다. 빛은 한우물 옆을 비추고 있었는데, 다시 한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천상에 사는 듯한 흰말 한마리가 커다란 알을 향해 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윽고 말은 하늘로 날아 올라갔고, 그 알에서는 어린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우리 민족의 고대사를 장식했던 신라의 건국신화 얘기다. 흰말이 절하고 있던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 바로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다. 고구려의 건국신화에도 이와 비슷하게 말이 등장한다. 고구려 시조 주몽은 혓바닥에 바늘이 박혀 초라해보였던 명마 덕분에 부여에서 도망칠 수 있었고, 나중에는 기린이라는 천상의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다. 이렇듯 말은 우리나라에서 제왕의 징표로 사용된 신성한 동물이다.
 

국보 207호로 지정돼 있는 신라의 천마도.



하늘 오가는 천상의 동물

신성한 동물 말이 우리 조상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었는지는 예술작품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고구려 무용총의 수렵도와 같은 고분벽화에서부터 신라의 기마인물상처럼 말은 예술작품에 자주 등장한다. 이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신라의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다. 국보 207호인 천마도는 자작나무 껍질에 그려져 있는 회화작품인데, 천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하늘에 올려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잘 표현돼 있다.

말을 신성시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다. 서양의 그리스 신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이 바로 말이다. 태양신 헬리오스는 4마리의 신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하늘을 달렸고, 벨레로폰은 천마 페가수스를 타고 공중을 날아 괴물 키마이라를 퇴치할 수 있었다. 이후 페가수스는 제우스의 마구간에서 지내다가 죽은 후 하늘로 올라가 아름다운 별자리가 됐다. 가을철에 북쪽 하늘에서 볼 수 있는 페가수스자리다.

별자리 중 켄타우로스자리(센타우로스자리라고도 함)도 말과 관련된다. 켄타우로스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허리 아래는 말이고 위는 사람인 반인반마의 괴물 일족이다. 말썽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았지만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를 길러낸 케이론처럼 의술, 예언, 사냥, 음악에 뛰어났다고 한다.

말에 관한 서양의 대표적인 전설은 일각수에 관한 것이다. 유니콘이라고도 불리는 일각수는 무적의 힘을 과시하지만 처녀 앞에서는 잠들어버린다는 흥미로운 전설을 갖고 있다. 대영제국을 상징하는 영국 왕실의 문장에서부터 최근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헤리포터’에까지 신성한 동물로 일각수가 등장한다. 서양인들이 말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볼 수 있는 내용이다.

‘말’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나라가 중국이다. 나관중이 지은 삼국지연의는 온갖 말들의 각축장이다. 조조의 애마인 절영은 그림자가 안보일 정도로 빨리 달렸다고 한다. 조조 휘하의 장군 왕쌍이 타고 다닌 대완마는 피와 땀을 흘릴 때까지 멈추지 않고 달린다는 한혈마다. 조운이 도적 장무를 죽이고 빼앗아 유비에게 바친 말 적노는 기수의 목숨을 빼앗아가는 불운의 명마로 유명하다. 하지만 역시 최고는 온몸이 타는 듯 붉었다고 전해지는 적토마다. 적토마는 천리(약 3백93km)를 쉬지않고 달릴 수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 잘 닦여진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전설의 명마 적토마는 관우가 죽은 후 먹이를 먹지 않고 울부짖다가 사흘만에 죽었다고 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천상의 말 페가수스.



조선시대 말띠 왕비 많아

임오년인 올해 태어나는 아이는 모두 말띠가 된다. 그런데 열두 띠 동물 중 말은 그리 인기를 끌지 못하는 듯하다. 특히 여성의 경우 말띠는 팔자가 드세다는 속설이 있다. 말을 신성시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을 생각하면 이상한 대목이다.

말띠 여성이 팔자가 드세다는 속설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자. 말띠 중에서도 백마띠가 팔자가 가장 드세기 때문에 제일 찬밥 신세라고 한다. 그런데 말띠에도 종류가 있는 것일까. 백마띠란 또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해의 간지는 갑을병정무기경신임계로 이뤄진 10간과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로 이뤄진 12지가 조합돼 만들어진다. 10간과 12지는 해마다 하나씩 뒤로 밀리는데, 올해의 경우에는 10간 중 임이 12지 중 말을 뜻하는 오와 만나 임오년이 된 것이다. 그런데 10간이 모두 오와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0간과 12지가 모두 짝수이기 때문이다. 짝수 위치에 있는 오는 짝수 위치에 있는 갑, 병, 무, 경, 임하고만 조합될 수 있다. 따라서 말의 해는 갑오, 병오, 무오, 경오, 임오 다섯가지가 존재한다.

갑오, 병오, 무오, 경오, 임오는 청색, 적색, 황색, 백색, 흑색이라는 고유의 색깔을 갖고 있다. 이 다섯가지 색깔은 동서남북 방향과 중앙을 뜻하는 색깔로 흔히 오방색, 또는 오색이라 불린다. 오색에 따라 말띠를 분류하면 갑오년은 청마띠, 병오년은 적마띠, 무오년은 황마띠, 경오년이 백마띠, 임오년은 흑마띠가 된다. 따라서 임오년인 올해는 흑마띠이고, 12년 전인 1990년이 바로 백마띠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말띠가 드세다는 속설이 원래 우리나라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얼마전 한 민속학자가 조선시대 왕비의 띠를 조사했다. 그 결과 성종, 인조, 효종, 현종, 고종의 부인이 모두 말띠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예전에는 말띠가 전혀 흉이 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사실 백마띠가 문제인 나라는 바로 이웃나라 일본이다. 일본에서는 백마띠인 해에는 딸을 낳아서는 안된다고 소동이 벌어지고, 또 백마띠를 가진 여성이 결혼하지 못해 사회문제가 된 적이 있을 정도다. 일본은 말의 해에 출산율 자체가 확연히 떨어질 정도로 기피하고 있다.

일본의 속설은 일제시대에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으로 생각된다. 말의 역동적인 모습 때문에 여성에게 어울리지 않아 보여 쉽게 정착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비슷하게 열두띠 동물 중 호랑이와 용의 경우에도 여성에게 좋지 않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다른 나라에서 들어온 엉뚱한 속설이 우리나라에서 계속 기세를 펼치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 결혼 정보회사가 미혼 남성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16.3%가 말띠 여성은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들은 말띠 여성이 기가 드세다는 생각 보다 어른들이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들었다. 말띠의 잘못된 편견이 올해에는 없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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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01월 과학동아 정보

  • 김홍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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