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이르러 암과의 전쟁은 새로운 전환기에 들어섰다. 암세포의 생태를 지배해 온 비밀의 뚜껑이 조금씩 열리면서 좀더 근본적인 암치료의 길이 열렸다. 암세포와 직접 싸우는 재래식 전투가 아니라 최첨단 미사일과 세세한 군사 정보를 바탕으로 암의 지휘소, 유전자를 파괴하는 유전자 치료법이 그것이다.
암은 우리 몸의 세포가 유전적 결함 또는 돌연변이 등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성장을 계속하거나 분열하는 현상이다. 현재 암은 심장질환 등과 더불어 인류의 최대 질병 중 하나로 꼽힌다. 의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암의 원인을 아직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며, 치료방법도 뚜렷하지 않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3대 암치료법은 1950년대에 시작된 수술요법, 1960년대의 방사선요법, 1970년대의 화학요법 등이다. 각 치료법마다 제 나름의 약점을 안고 있기 때문에 흔히 세가지 방법을 복합적으로 사용한다. 그러나 세가지 치료법을 모두 동원해도 암을 완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장 최근에는 면역학적 방법을 활용해 암을 치료하려는 암백신 요법이 개발돼 이용되고 있다. 제4의 암 치료법이라 불리는 암백신은 기존의 바이러스 백신과 유사하게 특정 암에 대한 항암 면역반응을 유도, 암을 예방하고 치료하는 것이다.
하지만 암백신 방법에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암백신 요법이란 특정 암에 대해 그 암세포를 물리칠 수 있는 인체 내부의 면역시스템을 활성화시켜 암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암의 종류에 따라 인체의 면역시스템을 활성화시키는 물질을 외부에서 투여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암은 그때그때마다 면역시스템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다시 활동을 시작한다. 마치 계엄령이 풀리기만 숨죽이고 기다리는 테러리스트같은 모습이다.
암의 이같은 교묘한 생존전략 때문에 외부에서 암세포를 무력화시킬 수 없자 의학자들은 전혀 새로운 방법을 고안했다. 암세포 자체에서 면역시스템 활성화 물질을 분비시킨다면? 또한 암 발생 원인 유전자를 원천적으로 봉쇄시킨다면 어떨까. 이 같은 생각을 실현시키고 있는 것이 바로 암의 제5세대 치료법인 유전자치료법이다.
암과의 치열한 첨단 전쟁
암의 유전자치료법은 최근 폭발적으로 발전하고 있는 분자생물학의 기술에 힘입은 바 크다. 과거에는 유전질환(유전자의 결함으로 기인된 질환)을 염색체의 수에 이상이 있거나 멘델의 법칙에 따라 후손에게 형질이 전해지는 희귀질병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암이나 심장 혈관질환과 같은 병의 발생 원인에도 유전자의 변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암도 넓은 의미의 유전질환으로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질환의 치료전략도 결함유전자로 인한 이차적 현상만을 치료의 대상으로 하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결함유전자 자체를 공격목표로 하는 새로운 치료법이 개발되고 있다.
수술, 방사선치료, 항암화학요법 등 기존의 암 치료법은 암의 원인보다는 이미 발생된 암 현상을 치료의 대상으로 삼는다. 반면 유전자치료는 암이 유발된 원인 중 하나인 유전자 이상을 직접 교정하고자 하는 시도다. 즉 암세포를 잘라내고, 죽이고, 태우는 종래의 개념에서 벗어나 암이 발생하게 된 원인 유전자를 직접 교정하거나 암과 싸울 생체 면역기능을 강화시키려는 전략이다. 종래의 치료법이 적군(암)과 전선에서 맞붙어 암세포들과 죽고 죽이는 재래식 전투라면, 유전자 치료는 최첨단 미사일과 적에 관한 세세한 군사지도에 근거해 적군의 지휘소(유전자)를 파괴하는 것이다.
유전자 치료는 전혀 새로운 발상인 만큼 그 가능성도 열려있다. 이 같은 이유에서 유전자치료는 암치료의 제5세대 치료법으로 불리고 있다.
10억 세포 직접 조작하기는 무리
암의 유전자치료는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암의 발생에 관여하는 유전정보의 이상을 교정하고자 하는 직접적인 공격전략과 암에 대항하는 인간의 면역체계를 강화하도록 유전자를 조작해 암을 퇴치하는 간접적 면역요법으로 구분될 수 있다.
암은 암을 일으키는 발암유전자(oncogene)가 활성화되거나, 암 억제유전자(tumor suppressor gene)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따라서 암 조직을 정상적으로 만들려면 발암유전자를 무력화시키거나 암 억제유전자의 기능을 회복시키면 된다. 현재까지 밝혀진 암 관련 유전자는 1백여 가지가 넘는다. 그 중에서 적어도 36종이 인간의 종양 발생에 중요한 의의를 갖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일부는 발암유전자이며, 나머지는 암 억제유전자이다.
유전자치료의 직접적인 공격전략을 예를 통해 알아보자. 폐암 중에는 비소세포폐암이란 것이 있다. 중금속인 비소(As)가 폐 속의 K-ras라는 발암유전자를 활성화시켜 암을 일으키는 것이다. 따라서 이 환자에게는 K-ras와 화학결합을 해 그 기능을 억제할 수 있는 유전자(antisense)를 이입하면 발암유전자의 기능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또한 인체 내에는 p53이라는 암 억제유전자가 있는데, 이 유전자의 발현을 촉진시키는 물질을 폐 세포 속에 직접 주입해 암을 정상조직으로 바꾸려는 임상시도도 추진중이다.
그 외의 직접적인 방법으로는 정상세포의 약제에 대한 감수성을 변화시켜 항암제에 대한 효과를 높이려는 시도들이 진행중이다. 기존의 항암제는 대체적으로 암세포에 대해 작용을 하지만 정상적인 세포에도 영향을 미쳐 그 부작용이 심각했다. 대부분의 항암제는 인체 내부에서 세포분열이 활발히 이뤄지는 곳을 찾아 그곳의 세포를 파괴하는 기능을 갖는다. 암세포는 끊임없이 분열하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체 내에서는 암조직 외에도 세포분열이 활발한 곳이 있다. 적혈구와 백혈구, 혈소판 등을 끊임없이 만드는 골수 내의 조혈모세포와 머리카락의 성장을 담당하는 모낭세포가 바로 그곳이다. 이 때문에 항암제를 투여하면 머리카락이 빠지며 적혈구가 제대로 생산되지 못하는 부작용이 있다. 하지만 유전자치료법을 이용하면 이런 부작용을 어느 정도 막을 수 있다.
한 예로 골수의 조혈모세포가 항암제에 의해 손상받는 것을 방지하지 위해 조혈모세포 내에 다양한 약품에 대해 내성을 갖는 다약제 내성(multi-drug resistance)유전자를 발현시키는 전략이 추진되고 있다. 이 시도가 성공적으로 이뤄질 경우 골수 조혈모세포의 손상 없이 고농도의 항암화학요법이 수행될 수 있어 기존의 항암화학요법의 효과를 향상시킬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직접적인 유전자치료의 전망이 그리 밝은 것만은 아니다. 직접적인 공격전략은 실험실에서는 쉽게 이뤄질 수 있을지 모르나, 인체 내에서는 그 효과가 아직 미비하다. 지름이 1cm의 암조직이라도 10억개 이상의 암세포로 구성돼 있기 때문에 모든 종양세포의 유전정보를 조작해 암을 퇴치하려는 시도는 기술적으로 쉽지 않다. 또 인체 내에서 정상세포에 손상을 주지 않고 암세포의 유전자만 조작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직접적인 공격전략이 성공적으로 임상에 이용되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다.
암괴사인자를 암조직에 전달하라
직접적인 공격전략의 문제점을 극복하고 임상응용의 가능성을 높인 유전자치료법은 면역요법을 이용한 치료전략이다. 이는 환자의 자기방어능력인 면역기능이 암을 파괴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과정에 유전공학의 기법을 응용하는 방식이다. 현재 진행중인 암 유전자치료법의 주요한 흐름은 면역학적 방법이다. 암 조직의 일부세포에만 유전자조작이 이뤄지더라도 잇달아 촉발되는 면역반응이 대부분의 암세포를 파괴할 수 있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면역학적 방법으로 암을 치료하려는 유전자치료는 1980년대 미 국립암연구소의 로젠버그 박사에 의해 처음 시도됐다. 그는 암세포에만 선택적으로 침투하는 림프세포(TIL)에 암괴사인자의 유전자를 삽입시켰다. 암괴사인자는 인체 내의 면역세포인 T세포 등을 활성화시킬 뿐 아니라 직접 암세포를 사멸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다. 암괴사인자의 뛰어난 항암효과는 동물실험을 통해 증명됐다. 하지만 임상시험에서는 심한 부작용 때문에 한번에 필요한 양 만큼 투여하지 못했다. 항암효과를 낼 수 있는 양은 조직 1kg당 하루에 4-5백g 정도인데, 실제로는 부작용 때문에 5g 정도밖에 투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한 암괴사인자는 그 양이 반으로 줄어드는 기간이 짧아 한번 주입으로 지속적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이런 단점을 보완하고자 로젠버그는 암괴사인자를 암세포에만 이동시키기 위해 TIL을 전달수단으로 이용했다. 암괴사인자를 생산하는 유전자를 TIL 유전자에 삽입시킨 것이다.
암괴사인자가 이입된 TIL은 종양으로 이동해 종양부위에만 고농도의 암괴사인자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다. 이때 전신적 부작용이 없는 항암효과를 낼 수 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암괴사인자가 주입된 TIL의 극히 일부(0.005%)만이 종양부위에 도달했으며, 그나마 암조직으로 도착한 TIL도 처음 예상과는 달리 암괴사인자를 제대로 발현시키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면역체계 일깨우는 사이토카인
로젠버그의 실패를 교훈으로 요즘은 다양한 각도에서 유전자조작을 통해 면역반응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이 이뤄지고 있다. 이 중 가장 관심을 끌고 있는 분야는 ‘사이토카인 유전자치료법’(cytokine gene therapy)이다(그림). 사이토카인이란 인체의 면역세포를 활성화시키는 물질로 이는 암세포와 싸울 수 있는 T세포 같은 면역세포에 힘을 불어넣어준다. 여기에는 인터루킨-2, 인터루킨-4, 인터루킨-7, 인터루킨-12, 암괴사인자, 감마 인터페론, GM-CSF, G-CSF 등이 포함된다. 이 물질들을 만들어내는 유전자를 암세포에 주입한 후 체내에 접종하면 몸 안에서 면역시스템이 활성화돼 암에 대한 면역반응이 유도된다. 이때 만들어진 암세포는 체내 암조직에 비교적 많은 양이 도달한다. 암세포끼리는 그들만의 신호가 있어 서로 뭉치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이 바로 사이토카인 유전자치료법이다. 미국 등지의 여러 연구소에서 동물실험 결과 뛰어난 항암효과를 나타내 차세대 유전자치료법으로 주목을 끌고 있다.
실제 사이토카인 유전자치료법은 수술로 큰 암덩어리를 제거한 후 남아있는 미세한 잔여암세포를 파괴하려는 목적으로 많이 이용된다. 위암환자의 경우 위암 절제술을 시행한 후 암세포를 분리해 여기에 사이토카인 유전자를 주입, 유전적으로 개조한 암세포를 얻는다. 이를 환자에게 다시 투여하면 사이토카인 유전자를 갖고 있는 암세포는 인체의 면역시스템을 유발하게 되고, 이 면역반응으로 잔여 미세암세포들이 파괴돼 재발을 방지할 수 있다.
이렇듯 사이토카인 유전자치료법은 체외에서 암세포를 조작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개별환자로부터 각각의 암세포를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보통의 경우 인간의 암세포는 실험동물의 암세포와는 달리 실험실에서 얻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 볼 때 이미 많이 진행된 암에 대해서는 큰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따라서 당분간 암의 치료법은 기존의 수술, 방사선 및 화학요법과 병행해 유전자치료를 사용하는 방식이 돼야 할 것이다.
아직 넘어야 할 산 많아
유전자치료는 아직 임상실험 단계에서 그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는 초기단계다. 지난 10여년간의 임상연구에서 문제점도 많이 발견됐다. 1999년 9월 미국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유전자치료를 받은 환자가 사망해 안전성에 문제가 제기되면서 ‘유전자치료가 과연 기존의 치료법을 능가할 수 있는가’하는 의구심이 일고 있다. 현재로서는 어느 유전자치료도 기존의 다른 치료법을 대체할 만한 성적을 보이고 있지 못하다.
여러가지 기술적인 한계점이 있는데 이 중 가장 어려운 점은 원하는 유전자를 원하는 암조직에 주입시키기가 쉽지 않다(낮은 이입율)는 점이다. 낮은 이입율과 함께 일단 이입된 유전자가 지속적으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점도 문제다. 또한 원하는 유전자를 암조직에 실어다주는 ‘스마트탄’인 벡터도 기능이 좀더 향상돼야 한다. 지금은 보통 바이러스를 벡터로 쓰고 있다.
현재 각 나라마다 국책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는 인간게놈프로젝트가 성과를 거둬 인체의 유전자에 대한 좀더 광범위한 이해가 가능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치료유전자의 개발이 진척되고, 이렇게 발견된 치료유전자를 환자의 필요한 부위에 주입해 적절히 발현시키는 벡터 시스템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다면 DNA 자체가 암과 같은 난치병을 치료하는 중요한 치료제로 사용될 날이 올 것이다.
암세포가 면역세포의 공격을 받지 않는 이유
우리 몸에는 외부에서 적이 침입했을 때 이를 막기 위한 방어수단인 면역시스템이 있다. 바이러스 등이 체내에 침투하면 특이한 항원-항체 반응이나 T세포, 킬러 세포 등의 면역성 세포가 활발히 반응해 이를 퇴치한다. 그러나 몸 안에서 비정상적 조직인 암세포는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으로부터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는다. 암세포가 생체 내에서 계속 성장하는 것은 암세포를 찾아내 파괴할 수 있는 T세포가 없어서가 아니라 암세포가 우리 몸의 면역시스템을 교묘히 피해가는 여러가지 재주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생체의 면역시스템에 일단 포착되면 자신이 파괴된다는 사실을 암세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면역시스템에 발각되지 않으려고 암세포들은 여러 위장 방법을 동원한다. 암세포의 입장에서 보면 ‘비장한’생존전략이다. 암세포는 다음의 네가지 방법으로 면역시스템을 무력화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첫째로 T세포가 암세포를 찾아낼 때 흔히 사용하는 분자(암 특이 항원 등)의 생성을 방해하고, 또 이 분자들이 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함으로써 T세포가 암세포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둘째로 암세포가 면역시스템 전반을 흔들어 놓음으로써 이른바 면역억제상태를 유도한다. 셋째로 어떤 암세포는 점액성 단백질(mucoprotein, sialomucin)을 자신의 표면에 뒤집어 써 T세포의 가시권에서 벗어난다. 넷째로 이른바 방해 항체(blocking antibody)를 만들어 자신(암세포)에게 붙임으로써 면역시스템의 눈에 띄기 쉬운 염증반응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서 T세포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암세포들의 생존비결을 우리는 역이용할 수 있다. 암세포의 항원에 대한 생체의 면역반응을 효과적으로 극대화해 T 세포가 꼭꼭 숨은 암세포를 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돕는다면 암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