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확대현상을 발견하고 사물에 대한 시각을 점점 아래로 끌고 내려갔다.그리고 지금 원자현미경을 발명해 10억분의 1의 세계를 들여다본다.하지만 단순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원자현미경은 나노세계를 조작하는 능력까지 갖고 있다.
인류는 뛰어난 두뇌의 도움으로 다양한 도구를 개발해 왔고 이를 통해 새로운 미개척지를 찾아가면서 문명을 발전시켰다. 그렇다면 인류 문명의 역사 속에서 10억분의 1이라는 나노 미개척지를 열게 해준 뿌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에서 한참 아래인 나노세계. 이를 열기까지 기술은 어떻게 발전돼 왔을까. 가장 원초적인 기술은 바로 물체를 확대해보는 것이지 않을까.
고대 이집트인이 발견한 확대현상
물방울 아래에 놓여있는 물체가 더 커보이는 확대 현상은 기원전 1천5백년 전 고대 이집트인에 의해 발견됐다. 그러나 이 사실은 서기 1000년이 되기까지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확대현상은 무려 2천5백년 동안 잊혀져 있었다.
서기 1000년, 사람들은 확대시키는 물체의 모양에 따라 확대비율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로부터 2백년이 지나 안경이 등장했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실질적인 도움을 준 최초의 현미경은 1590년에서야 만들어졌다. 즉 제1세대 현미경인 광학현미경이 출현한 것이다.
제1세대 현미경은 과학자에게 식물과 동물의 세포를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실제로 세포가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광학현미경은 오늘날 생명과학의 기초를 마련해준 셈이다.
그러나 광학현미경이 들여다볼 수 있는 미시 세계는 0.0004mm까지로 제한돼 있다. 이는 빛의 파장보다 더 작은 범위의 영역을 관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후 더 작은 세계를 들여다보려는 인간의 노력은 20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이어졌다. 그 결과 1933년 광학망원경을 뛰어넘는 현미경이 개발되기에 이른다. 이것이 바로 제2세대 현미경인 전자현미경.
전자현미경의 발명은 19세기 말 전자의 발견으로 가능해진 일이다. 질량을 가진 전자의 물질파(de Broglie wave)의 파장은 전자를 가속시킴으로써 쉽게 줄일 수 있다. 가령 1만볼트로 가속된 전자는 약 0.01nm (1nm=10-9m)의 파장을 갖는다. 이렇게 가속시킨 전자빔을 물체에 초점을 맞춰 쏘아 물체를 확대시킨다. 따라서 빛을 전자빔으로 대체했을 뿐 광학현미경과 원리는 비슷하다.
전자현미경의 특징은 가속시킨 전자빔의 에너지가 높을수록 초점을 작게 만들 수 있어 해상도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현재 전자현미경의 해상도는 나노미터 수준에 이른다. 최초의 나노세계는 전자현미경에 의해 드러난 것이다. 전자현미경은 의학, 생물학 등 고배율의 현미경이 필요한 분야에서 현재 널리 쓰이고 있다.
대조적인 성격 지닌 2명의 발명가
전자현미경이 나노세계를 들여다보는 도구는 되지만 현재의 나노과학을 열었다고 말하기 어렵다. 나노과학은 20세기 마이크로 소자(컴퓨터 속에 있는 각종 반도체 칩이 바로 마이크로 소자에 속한다)보다 더 앞선 나노미터 규모의 미세 장치를 개발하고자 등장했다. 따라서 의학이나 생물학 분야에서 관찰용으로 사용되는 전자현미경보다 더 획기적인 새로운 장치가 등장해야 했다.
스위스 취리히 근처 뤼실리콘이라는 자그마한 마을에는 세계적인 컴퓨터 회사인 IBM의 유럽 연구소가 위치해 있다. 때는 1982년. 이곳에서 거드 비니히와 하이니 로러라는 물리학자는 자신들이 직접 만든, 아주 날카로운 바늘 침이 달린 새로운 장치로 실리콘의 표면 영상을 측정하고 있었다.
두사람은 여러모로 아주 대조적이다. 비니히는 35살로 기타와 바이올린을 즐기는 조금은 날카롭게 보이는 인상이다. 이에 반해 운동과 캠핑을 즐기는 로러는 50살로 하얀 수염을 기른 마음씨 좋은 이웃집 아저씨와 같이 편안한 성격을 지녔다.
이 두사람은 몇해 전부터 터널링이라는 양자현상을 이용한 새 장비를 개발해 물질의 표면 영상을 얻는 연구를 수행해 왔다. 터널링 현상은 이런 것이다. 만약 바닥에 놓인 뚜껑없는 상자에 탁구공을 넣어뒀다고 가정하자. 이 탁구공이 상자 바닥에서 슬슬 굴러다니다가 스스로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상자의 옆면에 구멍이 나지 않는 한 결코 이러한 일은 벌어질 리 없다. 탁구공이 상자의 벽을 넘으려면 충분한 에너지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나노세계의 입자는 상자 밖으로 나올 수 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터널링’이라고 한다.
비니히와 로러는 몇개의 원자로 구성된 텅스텐 탐침을 금속 물질 표면에 근접시키고, 이 둘에 전압을 걸어주는 장치를 만들었다. 탐침과 금속 사이의 거리가 수nm이면 터널링 현상에 의해 전자가 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 즉 전류가 흐른다는 말이다.
전류는 탐침과 물질 사이의 거리가 짧아질수록 지수적으로 커진다. 탐침을 시료표면 위로 0.1nm만큼 더 가까이 가져가면, 터널링 전류는 10배 늘어난다. 마치 짧은 시내가 건너기 쉬운 것처럼 말이다. 만약 터널링 전류를 일정한 값으로 유지시킨다면, 탐침과 물질 사이의 거리는 일정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탐침을 표면 위에서 움직이면 탐침은 표면의 미세한 윤곽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게 된다. 이 탐침의 미세한 움직임을 측정하면 원자 수준으로 물질의 정체가 드러난다.
부도체 시료까지 확장
이것이 바로 나노과학을 연 제3세대 현미경 중 하나인 주사터널링현미경(Scanning Tunneling Microscope, STM)이다. STM의 해상도는 0.001 nm. 전자현미경으로는 희미했던 원자 하나하나를 선명하게 볼 수 있는 정도다. 비니히와 로러는 이 STM으로 실리콘의 표면 영상을 얻었다.
이 실리콘의 표면구조는 1959년 발견된 7x7이라는 주기성만 알려진 채 24년동안 누구도 실제 구조를 알지 못했다. 그동안 무수한 추측을 낳게 했던 그 구조를 STM를 이용해 처음으로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감격적인 순간이었다. 이후 STM의 소문은 전세계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1986년 비니히와 로러는 STM 개발의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처럼 탐침을 이용해 표면을 더듬는 방식으로 표면윤곽에 대한 정보를 얻는 제3세대 현미경을 ‘주사탐침현미경’(Scanning Probe Microscope, SPM)이라고 부른다. 개개의 원자를 볼 수 있어 ‘원자현미경’이라는 다른 표현도 있다. 하지만 최초의 원자현미경인 STM은 탐침과 시료 사이에 전류가 흘러야 하기 때문에 부도체인 시료는 영상을 얻을 수 없다. 이같은 이유로 1987년 또다른 SPM이 개발되기에 이른다. 이때도 비니히가 큰 역할을 했다.
비니히는 1987년 미국 스탠포드대에서 방문 연구자로 1년을 보낸다. 여기에서 STM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고 있던 비니히는 전도성이 없는 물질의 영상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그러다가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시료의 원자와 탐침의 원자 사이의 힘을 이용한다면? STM과 마찬가지로 탐침을 물체의 표면에 근접시키면 이들 간의 거리에 따라 끌어당기거나 밀치는 힘이 작용한다. 탐침을 캔틸레버라고 불리는 다이빙보드처럼 잘 휘는 물체에 붙이면 탐침의 원자와 시료의 원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에 의하여 캔틸레버가 쉽게 휜다. 만약 캔틸레버의 휜 정도를 알아내면, 시료의 윤곽을 파악할 수 있다. 이때 휜 정도는 캔틸레버에 레이저를 쏘아서 반사되는 각도를 통해 측정한다.
바로 이것이 STM과 더불어 대표적인 SPM인 원자력간현미경(Atomic Force Microscope, AFM)이다. AFM은 터널링 현상에 의한 전류 대신 원자와 원자간에 미치는 힘을 조절하기 때문에 세라믹과 같은 물체뿐만 아니라, 세포와 같이 부드러운 물체에도 사용이 가능하다. 때문에 AFM이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다.
‘전자’가 ‘원자’에 밀려난 이유
하지만 SPM이 전자현미경보다 해상도가 높고 영상을 얻는 방법이 다르다는 점만으로 나노과학의 개척도구로 평가받기는 어렵지 않을까. 전자현미경과는 다른 뭔가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놀라운 해상도는 SPM의 여러 기능 중 하나일 뿐이다. 그렇다면 전자현미경이 결코 모방할 수 없는 기능은 무엇일까.
전자현미경은 단지 표면의 2차원 영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SPM은 탐침을 위와 아래, 앞과 뒤, 그리고 양옆으로 이동시키기 때문에 한번에 물체 표면의 3차원 정보를 알 수 있다. 또한 전자현미경의 경우 전자빔이 시료까지 도달하고, 측정해야 하는 전자가 다시 전자 검출기까지 도달해야 하기 때문에 측정을 위해서는 시료와 전자총, 그리고 전자 검출기 사이에, 방해가 되는 기체분자가 거의 없는 진공상태가 확보돼야 한다.
반면 SPM은 진공과 대기 중에서 모두 가능하다. 심지어 액체 속에서도 측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그동안 고배율로 관측하기에 힘든 시료도 관측이 가능해졌다. 아울러 측정에 의한 시료의 손상이나 변화가 매우 작아졌다. 전자현미경은 수십만-수백만볼트의 전압으로 가속된 전자를 이용하기 때문에 측정과 동시에 시료가 쉽게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AFM은 겨우 원자 몇개 사이의 매우 작은 크기의 상호작용을 이용하기 때문에 거의 손상 없이 측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SPM의 독특한 기능은 물질을 관측한다는 수동적인 현미경을 뛰어넘는다는데 있다. SPM은 탐침으로 시료 표면의 원자를 들어올리거나 원하는 위치로 옮길 수 있다. 이를 통해 특정한 구조나 모양을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SPM으로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구조를 직접 만들어서 어떤 물리적인 현상을 보이는지 동시에 관찰할 수 있게 됐다. SPM은 초소형 로봇인 셈이다.
하드디스크의 자기정보 관찰
이 외에도 SPM은 종류에 따라 자기장, 전기장, 마찰력, 온도, 그리고 경도 등 물질 표면의 다른 여러 특성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이는 STM과 AFM의 기능을 부분적으로 수정함으로써 얻어진다.
예를 들어 SPM의 한종류인 자기력현미경(Magnetic Force Microscope, MFM)은 자기매체의 자기적 성질을 수십nm의 해상도로 측정한다. AFM 탐침에 코발트나 크롬과 같은 자성물질을 입히면 캔틸레버는 시료와 탐침 사이의 원자간 힘과 자기력의 영향을 동시에 받는다. 그런데 원자간 힘은 탐침이 시료와 비교적 가까운데서 크게 작용하지만, 자기력은 상대적으로 먼 곳까지 미친다. 따라서 표면 윤곽을 얻을 때보다 탐침과 시료 사이의 거리를 떨어뜨려 측정하면 자기력에 의한 캔틸레버의 휜 정도를 측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표면 자기분포도를 얻는다. 따라서 컴퓨터의 하드디스크, 각종 신용카드나 통장에 붙은 자기띠 등에 새겨진 자기적 정보가 어떤 모양인지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방면의 기능을 가진 SPM은 다른 어떤 도구도 따라잡기 힘든 나노과학의 강력한 도구가 되고 있다. 경이로운 나노세계의 눈뿐 아니라 손발이 되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