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어느날, 친구를 기다리던 H양은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핸드백에서 ‘휴대용 컴퓨터’를 꺼낸다. 돌돌 말린 디스플레이에 립스틱 크기 만한 저장장치는 핸드백에 넣고 다니기에 안성맞춤이다. 전원버튼을 누르자마자 바로 뜬 화면에는 조금 늦겠다는 친구의 메일이 도착해 있다. 기다리기로 작심한 H양은 어제 못다 읽은 소설을 저장장치에서 불러내 읽기로 한다.
현재로서는 상상일 뿐인 이 얘기는 가까운 미래에 현실로 다가올지 모른다. KAIST 분자소재연구실에서 유기분자를 이용한 최첨단 정보통신 소자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빛을 내는 유기분자
요즘 흔히 쓰는 노트북과 이동전화의 화면은 액정화면(LCD)이다. 액정 화면에 쓰이는 분자는 자체적으로 빛을 내지 못한다. 액정 분자는 화면 안쪽의 형광램프에서 나오는 빛을 통과시키거나 차단시키는 역할만 할 뿐이다. 액정화면은 100% 빛 중에서 7-8% 밖에 통과시키지 못하고 빛을 자체적으로 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밝은 데서는 식별이 어려운 단점이 있다. 그리고 편광판과 같은 여러 판을 많이 쓰기 때문에 일정 각도를 벗어난 상태에서 바라보면 잘 보이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또한 TV 브라운관 같이 화면의 크기가 커지면 두께가 매우 두꺼워지는 경향이 있다.
최근 들어 이런 단점을 보완하는 차세대 디스플레이 소재로서 분자발광체 연구가 주목받고 있다. 특히 그 중에서 전기를 가하면 빛을 내는 전기발광(EL) 유기 디스플레이가 최대 관심거리다. 전기발광 유기 디스플레이는 전기를 가하면 빛을 내는 분자소재를 이용한다. 전기발광 유기분자는 스스로 빛을 내기 때문에 매우 밝고 응답속도가 빠르며 전체 칼라가 가능하다. 또한 모니터나 브라운관을 아주 얇은 판에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초박막형 TV를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전세계적으로 활발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분자발광체는 유기분자를 이용하기 때문에 고분자로 제작할 수 있다. 흔히 페트병에 쓰이는 재료와 비슷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다. 기존의 유리판 대신 이를 이용해 발광 디스플레이를 만들면 접거나 둘둘 말아 갖고 다닐 수 있는 모니터가 가능해진다.
사실 유기물질에 전기를 흘렸을 때 빛을 내는 발광 현상은 1960년대에 처음 발견됐다. 하지만 실용성이 없었다. 그런데 1990년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PPV라는 전도성 분자가 빛을 잘 낸다는 사실이 발견됐다. 이후로 분자발광체에 대한 연구가 매우 활발해졌다. 특히 최근에는 중금속을 포함하는 분자의 경우 훨씬 높은 효율을 낼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압력 변하면 파란 빛 발해
이 같은 사실을 바탕으로 분자소재연구실에서는 좀더 높은 효율의 발광 특성을 가진 분자 합성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전기뿐 아니라 압력의 변화에도 빛을 발하는 새로운 분자를 합성하는 쾌거를 거뒀다. 이번에 합성한 분자는 하프늄카보레인(Hafnium carborane)이라는 물질로, 카보레인 유기분자가 하프늄 금속을 양쪽에서 잡고있는 형태다. 이 유기분자에 압력을 가하면 분자 사이의 결합에너지가 흥분상태로 상승되며, 다시 바닥상태로 떨어질 때 그 에너지만큼의 파란 빛을 낸다. 특히 파란색 계통의 빛은 매우 중요한데, 도영규 교수는 “파란색은 녹색, 빨간색과 조화를 이뤄 모든 색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분자발광체 연구에서 기본이 되는 색”이라고 이유를 말한다. 전기뿐 아니라 압력에도 빛을 발하는 이 소재는 차세대 디스플레이 분야뿐 아니라 각종 센서나 첨단 압전소재로 쓰일 수 있어 그 응용분야가 무궁무진하다. 세계적 학술지 ‘어드밴스드 머티리얼’(Advanced Materials)지는 이같은 연구성과를 2001년 7월 18일자에 자세히 소개했다.
또한 이 연구실은 분자자성체 연구도 진행중이다. 분자자성체란 기존의 자석과는 달리 유기물을 포함하면서 자성을 띤 물질이다. 이를 이용할 경우 기존의 금속 산화물이나 합금을 이용한 정보저장소재의 정보 집적도를 획기적으로 증가시킬 수 있다. 기존 소재의 정보 집적도 한계는 40GB/inch2 (1GB=109byte)이나 분자자성체를 이용하면 이를 수십 TB(1TB= 1012byte)까지 올릴 수 있다. 또한 기존 자성체에 비해 가볍고 가공이 쉬워 원하는 모양대로 만들 수 있다.
한편 연구실은 기존 고분자 합성촉매의 한계를 극복하는 연구 열기도 뜨겁다. 바로 분자촉매 연구다. 특히 이 연구실 출신이 창업한 분자촉매 벤처는 국내 폴리에틸렌 중합용 촉매 분야에서 독보적 연구 업적을 내고 있다.
현재 연구실은 도영규 교수를 중심으로 박사과정 6명과 석사과정 4명이 기능성 유기분자 연구에 혼과 땀을 불어넣는라 여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