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를 통해 다양한 정보를 주고받는 시대! 전세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돼 내가 필요한 정보는 각종 웹 문서와 파일을 통해 쉽게 구할 수 있다. 여기서 궁금한 점 한가지. 수많은 디지털 자료에 대한 주인은 누굴까. 만일 주인이 드러나 있지 않으면 내 것처럼 사용해도 문제가 없을까.
시각디자인을 전공하는 H양.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디지털 창작로고’ 과제 때문에 골치다. 적당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아 고심하며 ‘정보의 보고’라는 웹을 서핑한다. 갑자기 눈이 휘둥그레지는 그녀. 아, 이렇게 근사한 로고가 있다니! 누구의 작품인지 궁금해 뒤져봤지만, 작자에 대한 정보가 없다. 개인이 운영하는 홈페이지인 걸 보니 누군가 취미로 만든 작품인 것 같다.
H양의 머리 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더 고민할 필요 없이 이 로고를 약간 변형시켜 제출할까. 아니야, 그렇게 하면 남의 아이디어를 도용하는 범죄 아닌가. 글쎄, 똑같이 하는 것도 아닌데 별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 결국 그녀는 ‘작자미상’의 로고를 기반으로 새로운 로고를 ‘완벽하게’ 만들어낸다. 음, 너무나 훌륭한 작품이군. 친구들도 놀라는 걸 보니 A+는 문제없겠어.
며칠 후 H양은 제출한 과제물에 대해 낙제점을 받는다. 이유인즉 다른 사람의 작품을 베꼈다는 것. 이럴 수가! 교수님은 그 비밀을 어떻게 알아낸 것일까.
그야말로 온통 디지털 저작물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하지만 정작 그 ‘진짜’ 주인을 찾기란 쉽지 않다. 아니, 찾는다 해도 특별한 관심을 갖지 않는다. 디지털 저작물은 누구에게나 공개돼 있고 접근하기 쉬우며, 복사할 경우 또 하나의 원본이 금새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장점이 악용돼 원작자의 동의 없이 함부로 복제되고 표절되기 십상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가 담긴 데이터를 복제하거나 변형해도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하지만 내가 작성한 문서, 내가 창작한 그림과 사진 작품, 내가 만들어낸 음악은 그야말로 내 피와 땀이 서려있지 않은가. 나의 소중한 ‘지적 재산’에 내 것이라고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디지털 워터마크’다.
매스컴에서 자주 접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말 그대로 디지털 세상에 살고 있어서인지 ‘디지털’이라는 용어는 친숙하다. 하지만 ‘워터마크’는 조금 낯선 용어다. 워터마크란 무엇일까.
제지업에서 용어 유래
지금으로부터 약 7백년 전인 13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탈리아의 파브리아노 지방에는 수많은 제지공장이 있었다. 각 공장마다 생산되는 종이는 품질과 가격이 천차만별이었기 때문에, 제지업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상품임을 증명하기 위한 ‘특정 표시’가 필요했다. 지금 시점에서 보면 ☆☆ 제지, △△ 제지와 같은 일종의 ‘메이커’인 셈이다. 이것이 바로 워터마크의 시초다. 중세의 워터마크는 문자, 숫자, 그리고 십자가나 동물의 형상 등을 나타내는 상징적 의미의 마크가 사용됐다.
여기까지 알고 나니 이런 질문이 떠오른다. 왜 하필 워터마크(watermark)지? 종이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종이의 제작 단계에는 종이의 원료인 섬유질을 물에 불리고 표백한 후 압착하기 위해 틀을 사용하는 공정이 있다. 바로 이 단계에서 젖은 종이에 ‘숨은 그림’을 그린 후 말려내 최종 완성품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젖어있을 때 하는 표시’의 의미로 ‘워터마크’라는 용어가 탄생한 것이다.
현대에 사용하는 워터마크의 개념은 지폐 속에 숨어있다. 천원짜리 지폐 한장을 꺼내 불빛에 비춰보면 그냥 볼 때는 나타나지 않는 무늬가 훤히 드러난다. 지폐에 숨어있는 그림인 ‘은화’도 종이(섬유질)가 젖은 상태에서 인쇄하고 말린 후 다시 양면에 인쇄하는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다.
디지털에 포함시키는 암호
디지털 워터마크는 오프라인에서 볼 수 있었던 워터마크가 온라인으로 이동한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즉 웹에서 만날 수 있는 각종 문서와 멀티미디어 저작물에 자신의 소유 권리를 표시하는 일종의 ‘신호’를 삽입해서, 볼 수 있게 표시하거나 드러나지 않게 감춰놓는 기술을 ‘디지털 워터마킹’이라고 한다. 앞선 시나리오에 등장했던 H양은 웹에서 발견한 창작로고에 디지털 워터마킹이 돼 있다는 사실을 놓친 것이다.
이제 디지털 워터마킹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접근해보자. 디지털 저작물에 워터마킹이 삽입되는 기술적 원리는 공간에 삽입하는 기법과 변환 방식을 통해 특정 데이터로 바꿔 삽입하는 기법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공간에 삽입하는 워터마킹은 말 그대로 원본에 직접 워터마크를 삽입하는 기술이다.
쉽게 설명하면 원본을 작은 픽셀(공간) 격자로 쪼개서 나누고, 삽입하고자 하는 워터마크 역시 잘게 쪼갠 다음, 확보된 픽셀의 일부 공간에 쪼갠 워터마크를 삽입하는 것이다. 삽입하려는 정보를 공간에 흩뿌린 후 화면 픽셀값의 미세한 변화를 워터마크로 사용하기 때문에 인간의 육안으로는 식별할 수 없다(물론 ‘보이지 않는’ 워터마크의 경우다).
변환 방식을 통한 워터마킹은 원본에 직접 워터마크를 삽입하는 것이 아니라, 원본을 구성하는 특정 데이터를 찾아내고, 여기에 삽입하고자 하는 워터마크 데이터를 끼워 넣는 기술이다. 장미 이미지 파일을 예로 들어보자. 먼저 장미 파일 원본을 색깔, 명암, 밝기, 길이 등의 특정 데이터로 변환하고, 워터마크 역시 특정 데이터로 변환해 원본 데이터에 삽입한다. 이를 다시 역변환하면 원본과 똑같지만 워터마크가 삽입된 새로운 장미 이미지 파일이 만들어진다.
네이버컴의 백윤주 이사는 “두가지 기술 모두 장단점을 갖고 있지만, 최근에는 컨텐츠의 변형이나 손실, 또는 압축에 강한 내성을 갖는 변환 방식의 워터마킹 기술이 선호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공간에 삽입하는 워터마킹은 압축할 때 깨질 위험이 있다.
그림의 낙관과 지폐의 은화
디지털 워터마킹은 각 저작물의 형태에 따라 이미지, 오디오, 비디오 워터마킹으로 나눌 수 있으며, 가시성과 용도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먼저 가시성에 따른 분류를 살펴보면 보이는(또는 들리는) 워터마킹과 보이지 않는(또는 들리지 않는) 워터마킹이 있다. 예를 들어 화가가 그림에 찍는 낙관이나 서명은 보이는 워터마킹이며, 지폐에 숨은 은화의 경우 보이지 않는 워터마킹이라고 할 수 있다. 워터마크를 보이게 삽입하는 대표적인 사례는 광고에서 체험할 수 있다. 즉 광고 속에 드러나 있는 워터마크는 인터넷을 통해 고유의 이미지를 판매하고 게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그렇다고 꼭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사 고유의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보이지 않는 워터마킹으로 무장하면 타인이 함부로 도용할 수 없다.
하지만 보이는(또는 들리는) 워터마킹이라면 원저작물에 훼손이 가해지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자신이 만든 음악 파일에 내 것이라는 표시로 ‘들리는’ 워터마킹을 추가한다면, 그리고 그 들리는 워터마킹이 창작한 음악의 청취에 (극히 미세하더라도) 영향을 미친다면, 아무리 훌륭한 음악일지라도 좋은 창작물로 탄생할 수 없을 것이다. 멀티미디어 저작물이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현 시점에는 저작물을 원상태로 보호하기 위해 소유권을 가시적으로 표시하는 기술보다 원저작물과 차이를 느낄 수 없게 은밀하게 감춰놓는 기술의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mp3 파일에 숨어있는 비밀 문서
이제 용도에 따른 분류를 살펴보자. 디지트리얼테크놀러지의 워터마킹 연구팀에 따르면 워터마킹 기술은 용도에 따라 크게 네가지로 분류되는데, 이 중 가장 기본적인 것이 ‘로버스트’(Robust) 워터마킹이다. 로버스트 워터마킹 기술이 적용된 저작물은 그 마크를 변형시키거나 지우려고 시도해도 전혀 ‘끄떡없이’ 그대로 유지되는 강한 내성이 있다. 일단 원본 데이터에 마크가 삽입되면 끝까지 주인의 권리를 지켜주는 것이다.
하지만 복제해서는 안되고 복제할 필요성이 조금도 없는 자료라면 공격 자체를 아예 막아버려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프래질’(Fragile) 워터마킹은 이럴 때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병원의 임상 자료, 성적증명서, 은행이나 관공서의 비밀 문서 등에는 프래질 워터마킹이 적용되는데, 이들 자료의 수치를 조작하거나 일부를 잘라내려고 시도하면 파일이 전혀 알아볼 수 없게 깨지도록 설계된다. 즉 원본의 위조나 변조를 막기 위해 숨겨진 기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원리 때문에 계약서나 각종 예약 티켓을 인터넷으로 신청할 경우 발급 받는 것만으로 ‘원본’임이 증명된다.
이밖에 ‘핑거프린팅’(Fingerprinting)과 ‘스테가노그래피’(Steganography)라는 기술도 있다. 핑거프린팅은 일종의 ‘지문’처럼 고유한 정보를 디지털 저작물에 삽입하고, 그 정보를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기술이다. 현재 사용되고 있는 ‘바코드’와 유사한 개념으로, 핑거프린팅을 추적하는 기술까지 적용한다면 물류 사업에서 제품을 분류하거나 전송 경로까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스테가노그래피는 ‘감춰져 있다’는 뜻의 그리스어인 ‘stergano’와 ‘통신하다’라는 뜻의 ‘graphos’가 결합된 용어로, 정보를 숨기거나 다른 형태로 위장해 주고받을 때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암호 통신’기술이다. 이 기술이 적용돼 군사적인 목적으로 사용하는 ‘music.mp3’ 파일을 예로 들어 생각해보자. 확장자명(mp3)을 보면 음악 파일이지만, 이 안에는 작전에 필요한 비밀 문서나 암호가 숨어있다. 적군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음악 파일로 위장한 것이다. 음악 파일을 문서 파일처럼 꾸밀 수 있음은 물론, 그림 파일 속에 음악 파일을 숨기는 것도 가능하다. 보낸 자료의 내용뿐만 아니라 자료를 보냈다는 사실까지 감출 수 있다는 말이다.
암호를 풀지 않아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비밀 번호를 모를 경우 접근할 수 없도록 암호를 걸거나 방화벽을 설치하지, 굳이 워터마킹이라는 장치를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암호 기술과는 다른 ‘진보된’ 장점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일단 암호기술이 적용된 저작물은 암호를 해독하지 않으면 어떤 자료인지 알 방도가 없지만, 워터마크 기술이 적용된 저작물은 암호를 풀지 않아도 얼마든지 ‘감상’할 수 있다. 또한 암호 없이 보는 데이터도 원저작물과 차이가 전혀 없다는 장점이 있다(보이거나 들리는 워터마킹 기법이 적용되는 경우라도 원본과 큰 차이는 없다). 암호기술에서는 중요한 정보를 암호화 알고리즘을 이용해 일반적인 형태로 변형시키지만, 워터마킹에서는 아무런 상관없는 데이터 내에 중요한 정보를 숨길 수 있다. 스테가노그래피의 예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뿐인가. 위조와 변형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즉 암호기술이 적용된 데이터의 경우 사용자가 그 암호를 풀고 나서 데이터를 변형시키면 원작자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없어지지만, 워터마킹된 데이터는 위조나 복제를 할 경우 소유권의 증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자신의 소유임을 확실하게 증명할 수 있다.
이렇듯 디지털 워터마킹은 인터넷이 생활화된 현대에 저작권의 ‘파수꾼’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몇가지 우려의 목소리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 첫번째 문제점은 디지털 저작물의 재구성을 완전히 차단시켜 창작의 가능성을 제한한다는 것.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적절한 모방을 통해 더 나은 작품을 창조해 낼 수 있다면 디지털 워터마킹은 장애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저작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간도 문제다. 가령 원저작물의 저작권 보호 기간이 끝났다 해도 복제방지 장치가 계속 적용돼 있다면 그 데이터를 ‘건전하게’ 활용하고 싶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의도하지 않은 피해를 입힐 수도 있다.
워터마킹된 저작물에 추적 기능을 달면 불법 복제자를 쉽게 색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이를 역으로 생각해보자. 이 저작물을 통해 악의 없이 데이터를 사용하는 사람의 정보도 쉽게 알 수 있어 사생활을 침해할 가능성이 크다.
내 저작물에도 워터마킹을!
컨텐츠 유료화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면서 전세계가 디지털 저작권 보호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세계적인 워터마킹 업체인 디지마크사의 소프트웨어 픽처마크는 대부분의 이미지 포맷(TIF, JPEG, GIF, BMP)에 워터마크를 포함할 수 있는 기능을 갖추고 있고, 어도비 포토샵이나 코렐 드로우 등 이미지 편집 소프트웨어에도 플러그인 형태로 워터마크 기능이 배포돼 쉽게 사용할 수 있다.
국내에도 워터마킹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솔루션이 있다. 마크애니(www.markany.com)가 이미지, 비디오, 오디오 워터마킹 솔루션으로 선보인 제품은 각각 ‘마임’ ‘마오’ ‘마비’ 버전 1.0이며, 컨텐츠코리아(www. contents.co.kr)는 각종 멀티미디어 컨텐츠에 대해 저작권을 보호할 수 있는 ‘컨텐츠 가디언’을, 실트로닉테크놀로지(www.sealtronic.com)는 ‘매직태그’를 출시했다. 한편 디지털이노텍(www.digital-innotech.com)은 자체 개발한 워터마킹 솔루션 ‘카이마크’ 버전 1.0 데모판을 사이트에 공개해놓고 있으며, 디지트리얼테크놀로지(www.digitreal.co.kr)도 현재 판매중인 자사의 워터마킹 솔루션 ‘워터스탬프’의 테스트 버전을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각 제품의 사용법과 인터페이스는 매우 간단하다. 워터마킹 프로그램을 실행시키고 원본 데이터 파일을 불러온 후 워터마크 삽입을 위해 필요한 정보(암호키)와 워터마크 파일을 입력하면 곧바로 워터마크가 암호화돼 삽입된 결과 화면을 볼 수 있다. 삽입된 워터마크를 확인하고 싶은가.
역시 같은 방법으로 삽입할 때 사용했던 암호키를 입력하면 추출된 워터마크를 확인할 수 있다. 워터마킹 관련업체의 사이트에 접속하면 출시된 제품의 상세한 설명과 비주얼한 화면, 그리고 데모와 테스트 버전을 체험할 수 있다.
디지털 컨텐츠 보호시장의 규모는 해마다 커지고 있다. 하지만 ‘지키는 사람 열이 훔치는 사람 하나를 못 당한다’는 속담이 있듯, 아무리 기술이 진보한다 해도 그에 반하는 기술 또한 발전하기 마련이다.
재산보다는 인격, 물질보다는 정신을 중시하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디지털 워터마킹 기술의 발전 속도에 맞춰 지적 재산권에 대한 개개인의 인식 수준을 한단계 끌어올리려는 우리 스스로의 노력이 더욱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