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인류의 식량원인 동시에 청정한 환경을 위해서도 필수적이다.인간게놈프로젝트에 비해 널리 알려져 있지는 못했지만, 1990년대 초반에 시작한 애기장대 게놈프로젝트가 올해 말이면 그 결과를 드러낸다.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다양한 식물게놈프로젝트를 만나보자.
1999년은 우리 인류가 60억을 돌파한 기념비적인 해이다. 1900년에 16억에 지나지 않았던 인류가 오늘날 60억에 도달할 수 있게 된 것은 1960년대를 전후해 진행됐던 녹색혁명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녹색혁명의 핵심은 농작물의 품종개량과 관개시설을 통한 농법의 개선, 그리고 비료와 농약의 개발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농업전문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세계 4대 작물인 쌀, 옥수수, 밀, 감자의 생산량 증가율이 현저히 둔화되고 있다. 지금 추세라면 2020년에는 세계인구를 충분히 먹여 살리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20년 후에는 시체말로 녹색혁명의 약발이 더 이상 먹히지 않는 ‘녹색혁명의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녹색혁명은 인류에게 환경문제라는 부담을 지우고 있다. 과도한 관개 및 농약의 사용은 물부족과 환경악화를 가져온다. 이러한 식량 및 환경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 식물게놈프로젝트로 대표되는 농생명공학(agrobiotech)이다.
의약품 50% 이상 제공
식물은 지구생태계에서 유일한 생산자이다. 빛에너지를 화학에너지로 전환하는 식물의 광합성에 의해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가 유래했다. 식물은 식량원인 동시에, ‘지구를 푸르게’라는 모토에서도 보듯이 청정한 환경을 위해서 필수적이다.
또한 식물은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의약품의 50% 이상을 제공한다. 세계인구의 75% 이상이 식물을 병의 치료에 활용하고 있으며, 선진국에서는 25% 이상의 의약품을 식물에서 추출해 쓰고 있다. 이와 같이 식물은 우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식량, 환경, 건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를 쥐고 있다.
게놈(genome)은 한 생물종이 가진 유전정보의 총합을 말한다. 박테리아를 포함해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의 유전정보는 A, G, C, T 네가지 염기로 구성된 DNA의 염기서열 형태로 저장돼 있다. DNA 염기서열은 20종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되는 단백질을 생산하는 일종의 명령어다. 서로 다른 DNA 염기서열은 서로 다른 아미노산 서열을 가진 단백질 생산을 명령해 각기 다른 기능을 가진 단백질을 생산한다. DNA 염기서열 중에서 단백질 생산에 직접 사용되는 부분이 바로 유전자이다.
단백질은 생물체 내에서 일어나는 대사과정에서 촉매작용을 한다. 또 운동과 신경작용, 면역 그리고 광합성과 물질수송 등 모든 생명현상을 가능케 한다.
게놈프로젝트는 한 생물종 속에 들어있는 게놈의 염기서열을 밝히는 작업이다. 그러나 염기서열을 밝힌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각 유전자의 기능이 해명되지는 않는다. 게놈 염기서열은 그저 따분한 A, G, C, T의 반복적인 나열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게놈 염기서열에는 단백질의 명령을 담당하는 유전정보 외에 전혀 상관없는 염기서열(혹자는 이를 쓰레기 정보라 한다)이 무수히 반복돼 있다.
하지만 이와 같이 난해한 유전정보는 유전학 연구의 기초다. 예를 들어 눈이 발생하지 않는 돌연변이체를 얻어서 그 원인이 되는 유전자를 찾아야 그 유전자의 염기서열에 들어있는 정보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방법을 취하는 학문을 분자유전학이라 한다.
잡초를 선택한 이유
식물게놈프로젝트의 첫번째 대상으로 선정된 식물은 애기장대라는 십자화과 식물이다. 십자화과에 속하는 식물에는 애기장대 외에 배추와 무, 부르콜리, 그리고 유채꽃 등의 채소작물이 있다. 그런데 왜 하필 잡초라고 일컬어지는 애기장대를 선택했을까. 유용한 농작물을 대상으로 삼는 것이 응용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애기장대는 전형적인 쌍떡잎식물로 크기(폭 5cm, 키 20cm 정도)가 작아 좁은 공간에서 많은 수를 재배할 수 있다. 또 다량의 종자를 생산하고, 재배가 쉬우며, 불과 한달 반 정도의 기간 후에 다음 세대를 얻을 수 있다. 더구나 애기장대의 게놈은 약 1억2천 염기쌍으로 구성돼 있는데, 이는 배추의 1/3, 담배의 1/30, 인간게놈의 1/20에 해당하는 작은 크기다.
작은 게놈의 크기에도 불구하고 애기장대는 쌍떡잎식물이 가진 모든 기관을 갖추고 있고, 그 유전자의 수는 다른 쌍떡잎식물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게놈 염기서열 내에 불필요한 쓰레기 정보가 매우 적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애기장대는 분자유전학 연구를 위해서 이상적인 재료인 동시에 경제적이다. 만약 애기장대 게놈프로젝트를 위해 3천억원의 경비가 든다면 담배 게놈프로젝트를 위해서는 그 30배인 9조원의 경비가 들고, 실제 얻는 유전정보의 양에서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또한 유용한 유전자는 그것이 잡초에서 나왔건 농작물에서 나왔건 그 기능이 다르지 않다. 예를 들어 애기장대의 돌연변이 연구를 통해서 미국 소크연구소의 바이글박사는 LEAFY라는 유전자가 식물의 꽃발달을 명령하는 기능이 있음을 알아냈다. 그는 애기장대에서 얻은 LEAFY 유전자를 포플러에 도입해서 개화시기를 현저히 단축시키는 획기적인 결과를 얻었다.
다른 예로 녹색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통일벼는 비바람에 쉽게 쓰러지지 않고, 많은 낟알이 맺혀도 튼튼히 지탱한다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현재 통일벼는 농가에서 거의 재배되지 않는다. 밥맛이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에 통일벼의 특징을 갖게 하는 유전자(gai)가 애기장대에서 분석됐고, 이 유전자를 밥맛이 좋은 벼에 도입하면 밥맛이 유지되면서 통일벼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품종개량이 가능하다.
돌연변이체를 얻는 것이 쉽고, 그로부터 유전자를 분석하는 것이 편한 애기장대가 식물게놈프로젝트의 첫 대상으로 선정된 것은 당연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애기장대에 대한 연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결국 1991년 ‘다국적 애기장대 게놈프로젝트 컨소시움’(MCAGP)이 구성됐다.
올해 말 첫 서열 밝혀져
미국, 일본, 유럽연합체가 적극적으로 참여한 국제컨소시엄은 2000년 말에는 식물에서 처음으로 애기장대에 대한 전체 염기서열을 공표할 예정이다. 그런데 애기장대 게놈에 관해 지금까지 축적된 정보를 들여다보면 몇가지 특징적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우선 애기장대는 약 2만5천개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초파리의 1만3천개에 비하면 훨씬 많은 수다. 애기장대의 세포, 조직, 기관이 초파리에 비해 매우 단순하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잘 납득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결과는 한 장소에 뿌리박혀 생활하는 식물이 변화무쌍한 환경으로부터 적절하게 대처하고 적응하기 위해서 다양한 유전자원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그리고 동물과 식물의 게놈상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동물과 식물은 진화적으로 약 16억년 전에 갈려져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서로 다른 진화과정을 통해 오늘날의 생물체로 발전했다. 생물체의 생명활동에는 세포내 신호전달이라는 메커니즘이 중요한데 이러한 신호전달을 담당하는 유전자로 동물은 두가지 타입의 유전자군을 가지고 있다. 흥미롭게도 식물에서는 한가지 타입의 유전자군만 발견된다. 이는 동물과 식물의 공통 조상이 한가지 타입의 유전자만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케 해주는 결과다.
또한 애기장대 총 유전자중 약 60%는 다른 박테리아나 동·식물에서 발견된 유전자와 부분적으로 유사한 염기서열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애기장대 게놈을 통해 다른 생명체의 기능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애기장대 게놈프로젝트는 채소작물을 포함한 거의 모든 쌍떡잎식물의 연구에서도 중요한 기초정보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애기장대와 배추는 진화적으로 가까운 친척이지만 그 형태는 서로 다르다. 그 차이가 나타나는 원인을 알아내는데 애기장대의 게놈정보는 유용하게 활용된다. 다른 쌍떡잎식물의 게놈연구를 위해서도 애기장대의 게놈정보는 기준틀로 활용될 것이다. 모든 쌍떡잎식물의 유전자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
외떡잎식물의 대표주자는 벼
인류의 주곡인 쌀, 옥수수, 밀 등의 경우 애기장대 게놈정보가 제한적으로만 적용될 수밖에 없다. 벼, 옥수수, 밀 등은 외떡잎식물이기 때문이다.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은 약 1억4천만년 전에 갈라져 서로 다른 경로를 거쳐 진화했다고 생각된다.
유전자 총수에서 쌍떡잎식물은 2만-2만5천종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데, 외떡잎식물은 3만-3만5천종 정도의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즉 애기장대의 게놈이 외떡잎식물의 게놈 전체를 포괄하지는 못하고 있고, 외떡잎식물에서 더 많은 새로운 유전자원이 발견될 것이다. 이러한 생각에 입각해 시작된 것이 바로 ‘벼 게놈프로젝트’이다.
벼는 현재 알려진 외떡잎식물 중 게놈 크기가 가장 작은 식물로서 약 4억 염기쌍을 가진다. 이는 옥수수의 1/6, 밀의 1/37에 해당하는 작은 크기로 게놈프로젝트에 이상적인 조건이다. 벼는 특히 아시아권에서 중요한 작물이다.
벼 게놈프로젝트는 일본이 초기부터 주도권을 가지고 활발하게 추진했다. 일본은 1990년 초반부터 벼 게놈연구를 집중 지원했고, 1998년 한국, 중국, 대만, 인도, 태국, 미국 등을 포함한 11개국은 벼 게놈연구 국제컨소시엄을 구성했다. 국제컨소시엄을 구성하면서 일본은 1억달러의 연구비를 쾌척했고, 여타 국가에서 약 1억달러를 지원해 순조롭게 게놈프로젝트가 진행되는 듯했다.
당초 국제컨소시엄은 2008년까지 벼 게놈 염기서열을 완전히 해독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다국적 농생명공학 회사인 몬산토사가 2000년 4월 1차적으로 벼 게놈서열의 분석을 완료했다고 발표했고, 미국 생명공학 벤처회사인 셀레라사가 인간게놈프로젝트에서 능력이 입증된 샷건방식으로 단시간 내에 벼 게놈분석을 완료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다급해진 일본은 4천만달러를 추가로 게놈프로젝트에 투입해 완료시점을 2004년으로 앞당기게 됐다.
6배 바가지 쓰는 미국
벼 게놈프로젝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상당히 흥미롭다. 당초 미국은 벼 게놈연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미국은 1997년 옥수수 재배농들의 압력에 의해 ‘옥수수 게놈프로젝트’를 의회에서 승인해 1억4천만달러의 재원을 마련했다.
그러나 옥수수 게놈 염기서열을 모두 해독하겠다는 발상은 사실 터무니 없었다. 옥수수는 벼에 비해 게놈이 무려 6배나 크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는 벼 게놈연구에 비해 6배의 연구비가 더 들어가야 한다.
하지만 벼, 옥수수, 밀 사이에는 엄청난 게놈 크기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유전정보에서는 거의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심지어 유전자의 배열 순서조차 거의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이를 신테니(synteny)라고 한다. 즉 벼의 특정 염색체상에 A, B, C, D 유전자가 이 순서로 배열돼 있다면 옥수수나 밀에서도 유사 유전자가 A', B', C', D'의 순서로 배열돼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벼 게놈연구에서 얻게 되는 정보와 옥수수 게놈연구에서 얻어지는 정보 사이에는 거의 차이가 없다.
미국의 경우 똑같은 물건을 6배나 비싸게 바가지를 쓰며 사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미국 과학자들은 마련된 연구비를 벼 게놈프로젝트에 투자해야 한다고 정책입안자를 설득했다. 그런데 과학재단의 담당자를 설득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옥수수 재배농을 설득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결국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약 1천3백만달러의 재원이 벼 게놈프로젝트에 인색하게 투자됐다. 현재 미국은 옥수수 게놈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옥수수에서 돌연변이체을 만들고 관련 유전자를 분석하는 등 기초 다지기 작업을 하고 있다.
무궁무진한 유전자원
지구생태계 내에는 25만종의 식물들이 서로 다른 환경조건에서 자라고 있고 이들은 각기 특별한 기능을 가진 유전자들을 가지고 있다. 질병에 대한 저항성을 제공해주는 유전자, 의약품에 이용될 대사물질의 생산을 담당하는 유전자, 성장속도를 빠르게 해주는 유전자,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게 하는 유전자, 오염된 환경을 정화해주는 유전자 등 인류의 필요에 따라 활용할 수 있는 무궁무진하게 많은 유전자원들이 그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애기장대와 벼 등 모델식물에 대한 게놈정보가 이해되면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식물의 게놈연구로 범위가 확장돼야 한다.
다행히 지난 10년 간 게놈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컴퓨터공학과 기계공학 등을 활용한 게놈분석 기술들이 빠른 속도로 발전했다. 덕분에 과거보다 게놈분석에 드는 경비가 훨씬 적게 들면서도 더 빠르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이미 미국은 옥수수, 독일은 감자, 영국은 양배추 게놈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등 선진국에서는 모델식물을 넘어서 분석이 까다로운 농작물로 확장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러한 추세에 맞춰 국내에서도 21세기 뉴프론티어 정책을 입안해 배추, 고추, 인삼 등의 게놈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미국 농촌을 배경으로 한 영화를 보면 가끔 농부들이 자신이 생산한 농산물을 가지고 나와 누가 더 크고 보기 좋은 농산물을 생산했는지 비교하는 경연대회를 벌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경연대회를 통해 녹색혁명에 의해 품종개량이 이루어진 지난 30년간 단위 면적당 옥수수 최고 생산량을 기록한 최고치를 보면 단위 면적당 항상 20t으로 일정하다.
이 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단위 면적당 20t은 현재의 품종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 생산치에 해당한다. 녹색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농작물의 평균생산량은 꾸준히 증가해 왔지만 최대 생산치는 결코 변하지 않았다. 그 품종의 태생적 한계 때문이다.
농생명공학은 지구상의 다양한 식물이 가진 유전자원을 활용해 농작물의 품종을 개량함으로써 식량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대안으로 보인다.,또한 농생명공학은 비료나 농약의 살포가 없이도 잘 자라는 품종을 개발해 더 청정한 지구생태계를 보장해줄 것이다.식물게놈프로젝트는 농생명공학에 활용할 유용한 유전자원을 확보하게 해주는 동시에 식물의 생리와 발생,그리고 유전의 원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