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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파는 신호일까 잡음일까?

컴퓨터 형사 가제트가 로보캅과 다른이유

컴퓨터 형사 가제트는 사이보그다. 평범한 경비원이던 그는 폭탄 테러를 당한 후 최첨단 기계장치와 잡동사니 일상용품들로 온몸이 채워지게 된다. 다리는 스프링처럼 늘어나고 머리에 달린 프로펠러로 하늘을 날 수도 있다. 몸에서 초강력 미사일을 발사하기도 한다.

이런 가제트는 사이보그 동료 형사인 로보캅과 작동원리에서 다른 점이 있다. 로보캅은 대뇌에서 지시를 내리면 그 내용이 신경을 통해, 신체(기계)의 각 부분으로 직접 전달된다. 반면 가제트는 뇌파를 이용한다. 생각을 하는 동안 수십만개의 신경세포들이 주고받은 전기 신호는 모두 더해져 ‘뇌파’라는 아주 독특한 전기적 리듬을 만들어낸다. 뇌파는 머리의 표면(두피)에서 측정 가능할 뿐 아니라 미약하게나마 외부로도 전달된다. 가제트의 온몸에는 뇌파를 감지하는 센서가 달려있어서, 만약 다리를 움직이고 싶다고 생각하면 이때 발생된 뇌파가 다리를 움직이도록 조종하는 것이다.

명상시 알파파, 중풍시 델타파 발생
 

뇌파는 신호일까 잡음일까?


​생체 시스템에 관한 연구와 로봇 공학의 발전이 전문가들의 예측을 훨씬 앞질러가고 있는 오늘날 언제쯤 가제트 형사의 등장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 오늘이라도 당장 가제트를 만드는 일에 과학자들이 몰두할 수 없는 데에는 한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가제트의 작동원리 속에는 “머릿속에서 생각이 달라지면 뇌파의 모양이나 특징도 그때마다 달라져야 한다”는 가정이 담겨있다. 그렇지 않으면 “가제트 만능 팔!”하고 외쳤을 때 엉뚱하게 미사일이 발사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뇌파가 뇌의 정보처리 과정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 ‘의미있는 신호’인지, 아니면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소음’에 불과한 것인지에 대해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뇌파는 1929년 독일의 정신과 의사인 한스 베르거(Hans Berger)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이후 현대 정신의학에서 중요한 생체 신호로 연구돼왔다. 한스 베르거와 다른 동료들은 대뇌 상태에 따라 뇌파의 파형도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후 많은 생리학자들이 뇌파 연구에 달려들었고, 1960년대 주파수 분석법이 도입되면서 뇌파의 파형에 대한 연구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뇌 활동에 문제가 있는 뇌질환 환자들의 뇌파는 질병의 종류에 따라 여러 비정상적인 유형으로 만들어진다. 그 중에서도 간질 환자를 검사하거나 수면 장애 환자의 수면 상태를 진단할 때, 뇌파는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뇌파는 얕은 잠을 잘 때의 뇌파보다 서서히 변화하며, 간질 환자의 뇌파는 정상인에 비해 훨씬 주기적이다. 또 눈을 감았을 때나 편안한 상태에서 뇌파는 열심히 산수 문제를 풀 때보다 그 값이 크고 상대적으로 규칙적인 파형을 그린다. 알츠하이머 환자의 경우 델타파(1-4Hz 정도의 낮은 주파수를 가진 뇌파)가 증가한다든가, 명상 상태일 때 알파파(8-13Hz)가 늘어난다는 얘기를 가끔 들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난 80년대 중반까지 많은 신경생리학자들이 대뇌 활동과 뇌파 변화와의 상관관계를 찾기 위해 많은 시도를 했으나 대부분 실패하고 만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버클리 소재) 월터 프리먼 교수를 비롯해 몇몇 신경물리학자들이 간단한 모델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그다지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그 이유 중에는 뇌파를 만드는데 관여되는 신경세포들의 수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최소 수만 개에서 많게는 수백만 개의 신경세포들이 동작하며 만들어내는 뇌파의 의미를 이해하기에는 현대 과학은 너무나 모자란 수준. 뇌파의 움직임을 기술하려면 신경세포의 개수만큼 많은 변수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경생리학자들은 뇌파를 대뇌의 복잡한 사고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발생하는 ‘소음’이라고 간주해왔다. 마치 냉장고가 작동을 하면 ‘윙~’하고 소리를 내는 것처럼 말이다. 냉장고 전문가들은 냉장고 소리만 들어도 이 냉장고가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혹은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를 대충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의사들도 뇌파 분석을 통해 부족하게나마 뇌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정도로 생각해왔다. 냉장고 문처럼 머리에 뚜껑을 달아 열어볼 수도 없으니, 뇌파라도 측정해 분석해볼 수밖에.


다양한 뇌파 형태^무엇을 하는지,무슨 질병을 가지는지에 따라 뇌파 형태는 달라진다.불규칙적이고 복잡해 보이지만 차원은 10여개로 유한하다.


뉴턴과 확률 사이 세계, 카오스

그러던 중 일련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카오스’라는 개념이 과학계에 도입되면서 뇌파 연구는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20세기 중반까지 물리학자들의 머리 속에는 크게 두 종류의 우주가 들어있었다. 뉴턴에 의해 만유인력의 법칙이 발견된 이후, 물리학자들은 우주를 잘 짜여진 법칙들에 의해 정교하게 돌아가는 ‘거대한 톱니바퀴’라고 생각했다. 간단한 법칙들이 주어지고 초기 조건만 안다면, 이 세상의 어떠한 운동도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고등학교 물리시간에 ‘어느 방향과 어느 속도로 공을 떨어뜨렸을 때 몇초 후 공은 어디에 있을지’를 계산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다가 18세기 무렵, 백만장자를 꿈꾸던 도박사들의 후원을 받아 ‘주사위 던지기’와 ‘카드 섞기’를 연구하던 물리학자들은 ‘예측 불가능한 시스템’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던져진 주사위나 마구 섞여진 카드들도 분명히 우주의 법칙들로부터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러나 워낙 많은 변수들이 관여되기 때문에 예측이 불가능한 복잡한 패턴을 그리게 되는 것이다. 소음 같은 무작위 신호도 여기에 속한다. 대신 이런 시스템은 확률 개념을 이용해 통계적인 방법으로 기술할 수 있다. 두 개의 주사위를 던졌을 때 어떤 값이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눈의 합이 7이 나올 확률은 계산할 수 있지 않은가.

20세기 중엽이 돼서야 그들은 뉴턴식 우주와 확률론적 우주 사이에서 ‘카오스’라는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1963년 MIT의 기상학자 로렌츠는 유체의 대류 현상을 기술하는 간단한 방정식(살츠만 방정식)의 해를 컴퓨터로 계산하던 중, 어느 한 부분의 결과 값을 다시 얻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다시 계산을 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까, 중간의 한 값을 초기 조건으로 대입해 계산을 시작했다. 그랬더니 전혀 엉뚱한 결과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중간 값을 대입할 때 계산의 편의를 위해 소수점 아래 자리를 반올림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살츠만 방정식은 비선형 항이 포함돼 있어서 소수점 아래의 작은 값들이 증폭돼 나중에는 큰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후 10년 동안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이 논문은 이론 물리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돼 새롭게 각광받게 된다. 뉴턴식 우주처럼 설령 간단한 법칙이 존재하는 시스템이라고 해도 비선형 항이 포함돼 있으면 초기 조건이 조금만 달라져도 전혀 엉뚱한 결과를 나타낼 수 있으며, 그 운동 궤적은 확률론적 시스템처럼 굉장히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해 보이지만 법칙이 존재하는 이런 시스템을 그들은 ‘카오스 시스템’이라고 불렀다. 정교하게 기술되는 대류 현상과 날씨 현상은 대표적인 ‘카오스 시스템’이다. 내일 날씨는 대개 잘 들어맞지만, 일주일 후의 일기예보를 통 믿을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무한에서 10여개 유한차원으로

‘카오스’라는 개념이 등장한 이후, 각 분야의 과학자들은 ‘혹시 그 동안 불규칙적이고 복잡하기만 한 소음이라고 여겼던 신호들이 사실은 간단한 비선형 방정식에 의해 기술되는 카오스 시스템이 아닌지’를 알아보는 연구에 착수했다. 1985년 네덜란드의 여성 물리학자 바블로얀츠는 사람의 수면 뇌파가 ‘카오스’라는 사실을 물리학 저널에 발표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보기에는 소음처럼 매우 불규칙적이고 복잡해 보이지만 그 차원(뇌파의 변화를 기술하는 데 필요한 변수의 개수)을 구해보면 무한대가 아닌 5-6 차원이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또 깊은 수면 상태일수록 뇌파의 차원이 떨어진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 논문은 물리학자들과 신경생리학자들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만약 뇌파가 5-6개의 변수로 이루어진 방정식으로 기술될 수 있다면, 뇌를 해부하지 않고도 뇌의 사고 과정을 추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뇌의 작동원리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뇌파가 카오스라는 사실에 과학자들은 혼돈 속에서 질서의 그림자를 발견한 것처럼 들떴다.

그로부터 5년간 미국과 유럽에서는 여러 상태에서 측정된 뇌파에 대한 카오스 분석 결과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간질 환자의 뇌파는 겨우 2-3개의 변수로 기술될 수 있는 신호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질병에 따라 뇌파의 차원과 ‘복잡한 정도’(complexity)가 달라진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정상인의 뇌파를 기술하기 위해서는 약 10-12개의 변수가 필요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신경 물리학자들의 기쁨도 잠깐. 1990년대에 들어서자 그들의 연구 결과에 찬물을 끼얹는 논문들이 미국 물리학자들에 의해 하나씩 등장한다. 미국 로스알라모스 연구소 제임스 싸일러 박사와 그 동료들은 뇌파와 유사한 주파수대를 가진 신호는 소음이라 하더라도 5-6개의 차원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였다. 또 뇌파와 똑같은 주파수 분포를 가지면서 순서를 마구 뒤섞어놓은 신호를 임의로 만든 후 뇌파와 비교해 보았더니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는 논문도 나왔다.

미국의 물리학자들로부터 반격을 받은 유럽의 의학자들은 미국 물리학자들의 주장은 뇌파처럼 높은 차원의 실제 데이터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고 반격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1998년 여름 독일의 의사들은 간질 환자의 뇌파를 카오스 분석하면 환자가 간질 발작을 일으키기 전에 미리 예측 가능하다는 사실을 저명한 물리학 저널에 발표했다. 유럽 의사들의 재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아직도 이 문제는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지만 유럽 의사들은 뇌파를 분석하고 모델링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한편 좀더 실제적이면서 구체적인 방식으로 ‘가제트 프로젝트’를 연구하는 공학자들도 있다. 독일 튀빙겐 대학의 닐스 비르바우머 교수팀과 스탠포드 대학의 러스티드 교수팀은 뇌파를 이용해 컴퓨터 모니터에서 커서를 이동시키는 장치를 개발하고 있다. 그들은 전신마비 증세를 앓고 있는 환자들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뇌파로 조종되는 컴퓨터 키보드를 개발하고 있는 것이다.

뇌파로 글 쓰기, 80초에 한 글자


전신마비 환자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도록 뇌파로 조종되는 컴퓨터 키보드를 개발하고 있다.


3명의 환자들에 대한 실험 결과, 오랜 연습 끝에 자신의 뇌파를 조종하는 능력을 익혔다고 한다. 지금은 한 글자를 치는데 평균 80초 정도의 시간이 걸려서, 짧은 문장을 치는 데만도 30분 가까이 걸리지만, 앞으로는 처음 2-3자만으로 나머지 부분을 예측하는 시스템으로 이들의 불편을 덜어줄 계획이다. 이 같은 장치들은 가제트 형사의 화려한 개인기에 비하면 아직은 걸음마 수준이지만, 전신마비 환자들에게 유용한 의사소통 수단을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눈을 감고 가만히 누워만 있어도 쉴새없이 복잡한 파형을 그려대는 뇌파. 과연 그 정체는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가장 복잡하다는 뇌가 만들어내는 뇌파는 21세기가 시작돼도 여전히 미스터리의 영역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카오스’ 현상은 과학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줬다. 너무 복잡해서 도저히 어떤 법칙이라고는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신호도 알고 보면 간단한 법칙으로 기술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복잡다단한 자연현상들은 종종 과학자들을 힘 빠지게 하지만, 그런 현상들이 만들어지는 원리마저 복잡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많은 물리학자들이 이미 뇌파를 연구하는 일에서 손을 뗐다. 10차원도 넘는 뇌파를 다루는 일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자연계의 실제 시스템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지금 고차원 시스템을 다루는 수학적인 방법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이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가제트 형사는 언제까지나 악당 앞에서 허둥대며 엉뚱한 방향으로 미사일을 날릴지 모른다. 그러나 아직 뇌파 연구에 몰두하고 있는 물리학자들은 믿고 있다. 뇌파가 아무리 복잡한 신호라 하더라도 이해 못 할 정도로 복잡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용어설명-

주파수 분석법 : 복잡하고 불규칙하게 보이는 뇌파를 여러 개의 간단한 파로 구성해 이를 분석하는 방법. 이에 따르면 뇌파는 1Hz에서 50Hz 이상의 넓은 주파수 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그 분포는 뇌의 상태가 달라질 때마다 변한다고 알려져 있다.

비선형 항 : 비선형 항이란 y=ax 와는 달리 x², x³혹은 1/x 등이 포함되어 있는 항을 말한다.
이 경우 y값은 x값의 변화에 비례해서 변하지 않고, 복잡한 양상을 띨 수 있다. 예를 들면 y=1/x²이라는 방정식에서 x=0.1일 때 y값은 100이지만, x=0.11일 때 y값은 82.64이다. 만약 x값을 소수 둘째 자리에서 반올림했다면 y값이 무려 17.35나 달라지게 된다. 이런 일이 여러 번 계속된다면 y값은 전혀 다른 값을 갖게 된다. 이처럼 비선형 항에 의해 변수 값의 작은 변화가 결과 값에 큰 변화를 미치는 효과를 ‘나비 효과’ (북경에서 나비가 펄럭이면 뉴욕에 폭풍이 몰아친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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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정재승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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