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99년 영광의 수상자 : 생리·의학상-군터 블로벨

단백질도 우편번호 따라 배달된다

매년 이맘때쯤 전세계의 뛰어난 의학과 생물분야의 과학자들을 들뜨게 만드는 것이 바로 노벨생리·의학상이다. 1999년 10월 11일 노벨 위원회는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이 독일계 미국 세포분자생물학자인 올해 63세의 군터 블로벨(Gunter Blobel) 박사에게 돌아갔음을 전세계에 알렸다.

블로벨 박사는 1967년 미국 위스콘신대학 반 포터 박사의 지도 하에 암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69년 록펠러대학의 조지 팔아드 박사(1974년 노벨생리·의학상 공동 수상자)의 연구실에서 박사후 연구과정을 마쳤다. 이후 현재까지 동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수많은 주요 학술상을 수상해 왔다.


군터 블로벨^1935년 독일 출생. 현재 미국 록펠러대학 생물학과 교수.


그는 자신이 받을 상금(약 11억원) 전액을 선뜻 옛동독의 도시 드레스덴의 성모교회 복구사업에 내놓겠다고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문화유적지 드레스덴 부근에서 태어난 블로벨 박사는 2차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2월 연합군의 공습으로 드레스덴이 파괴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그는 “드레스덴에 대한 좋은 추억을 되살리기 위해 상금을 기부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10억개 단백질의 이동 경로

블로벨 박사는 한마디로 ‘단백질의 운명’에 관해 설득력있는 가설을 제시했다. 그는 세포 내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단백질은, 자신이 어디로 갈 것인지를 결정해주는 신호를 스스로 가지고 있다는 ‘신호 가설’(signal hypothesis)을 확립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수많은 세포는 각각 소포체, 리보솜, 핵, 미토콘드리아, 페록시좀, 골지체 등의 다양한 소기관들을 가지고 있다. 이 소기관들이 제각기의 역할을 적절히 수행해야 생명의 기본 단위인 세포가 활발하게 활동을 벌일 수 있다. 이때 각종 소기관들이 제기능을 발휘하는데 필수적인 성분이 단백질이다.

하나의 세포에는 대략 10억개의 단백질들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이 많은 단백질이 어떻게 ‘알아서’ 특정 소기관으로 옮겨갈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블로벨 박사다.

1971년 블로벨 박사는 단백질이 소포체로 이동하는 과정을 연구하던 중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새로이 합성된 단백질 끝에 대략 10개 정도의 아미노산으로 이루어진 ‘신호 펩티드’(signal peptide)가 반드시 존재했다. 이 신호 펩티드가 먼저 소포체 안으로 들어오고, 여기에 붙은 단백질이 함께 딸려들어오는 방식이었다. 즉 신호 펩티드는 특정 단백질을 소포체로 이끄는 안내자 역할을 수행하는 주인공이었다. 무사히 단백질이 소포체 안에 들어오면 신호 펩티드는 잘려나간다.

1975년 블로벨 박사는 이 사실을 바탕으로 단백질의 이동 과정에 대한 ‘신호 가설’을 정립했다. ‘소포체로 이동하는 단백질은 특정한 신호 펩티드를 가진다’는 내용이다. 이 가설은 현재 수많은 생화학·세포학 교과서들에서 중요하게 언급되고 있다(그림).


(그림) 단백질의 이동 과정^소포체에 필요한 단백질이 만들어지려면 단백질 제조 공장인 리보솜이 소포체까지 도달해야 한다. 이때의 안내자가 신호펩티드다. 신호펩티드가 소포체 안에 들어오면 아미노산 사슬이 뒤쫓아 오며 합성되고 결국 소포체 안에서 '성숙한' 단백질이 만들어진다.


‘신호 가설’을 제창한 이후 블로벨 박사는 지난 20여년 동안 단백질 이동에 대한 연구를 지속적으로 수행해 왔다. 그 결과 그는 소포체 외의 다른 소기관들로 이동하는 단백질의 경우 제각기 독특한 신호 펩티드를 가진다는 점을 알아냈다. 즉 신호 펩티드가 어떤 아미노산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느냐에 따라 특정 단백질이 세포막에 존재할지, 세포 밖으로 분비될지, 또는 세포의 어느 소기관으로 옮겨질지가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런 연구에 힙입어 최근에는 상당히 많은 단백질의 신호 펩티드가 어떤 구조로 이뤄졌는지 속속 밝혀지고 있다.

신호 펩티드는 단백질들이 올바른 위치로 이동시켜주는 지표라는 의미에서 ‘주소가 기재된 꼬리표’(address tags) 또는 ‘우편번호’(zip code)라고 불리기도 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이 ‘꼬리표’는 단백질 양쪽 끝의 어느 한 부위뿐 아니라 단백질 중간에 존재하기도 한다.

블로벨 박사가 제창한 단백질 이동에 관한 가설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무엇이 이 가설을 노벨상 수상에까지 이르게 한 것일까.

인간게놈프로젝트에 응용

블로벨 박사의 연구업적은 세포 내에서 일어나는 가장 중요한 생명 현상의 하나인 단백질 이동의 신비를 밝혔다는 점에 그치지 않는다. 우선 그가 제창한 신호 가설이 여러 대상에게 확산돼 적용될 수 있었다. 블로벨 박사가 출발점으로 삼은 대상은 소포체로 이동하는 단백질이었다. 하지만 이 가설에 힙입어 다른 소기관들로 이동하는 단백질에 대한 연구가 급속히 진행될 수 있었다. 또 이 가설이 사람뿐 아니라 효모, 식물, 그리고 다른 동물세포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는 점이 밝혀졌다.

한편 블로벨 박사의 연구는 각종 질병의 원인을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신장 결석, 에이즈, 알츠하이머병과 같은 난치병들의 주요 원인은 바로 단백질이 특정 부위로 이동하는 기능에 이상이 생긴 탓이라고 한다. 따라서 블로벨 박사의 연구 내용은 이런 질병들의 진단과 치료제 개발에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블로벨 박사의 신호 가설은 사람 유전자지도의 완성을 목표로 진행되고 있는 인간게놈프로젝트와 연관돼 있다. 수많은 유전자가 어떤 단백질을 만들어내는지 알아내는 일이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주요 임무다.

단백질 하나는 수십-수백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돼 있다. 이에 비해 신호 펩티드는 단지 10여개의 아미노산으로 구성된다. 만일 신호 펩티드를 만들어내는 유전자의 구조를 알고 있다면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작업이 훨씬 수월해진다. 신호 펩티드 유전자의 존재만 확인하면 그 주위의 유전자가 어떤 단백질을 만들어내는지 금방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노벨생리·의학상은 단편적으로 얻어진 결과보다는 인류의 과학기술과 의학에 중요한 파급효과를 미친 연구를 중시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과학자들이 연구발표 당시보다는 세월이 많이 흐른 뒤 그 중요성을 더욱 인정받아 노벨상을 수상하는 경우를 종종 목격할 수 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9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진로 추천

    • 생명과학·생명공학
    • 의학
    • 화학·화학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