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생명공학연구소의 한 동물실험실. 몸에 ‘털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누드쥐가 살고 있는 방을 살펴보면 웬만한 1급 호텔보다 더 깨끗하게 청소된 느낌을 받는다. 하찮은 미물로 여겨지는 쥐가 왜 이런 특사 대우를 받는 것일까. 인간의 질병을 일으키는 중요한 유전적 원인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누드쥐의 면역 기능은 제로에 가깝다. 따라서 미미한 병균이 침입해도 금새 사망한다. 마치 에이즈 환자가 감기 같은 가벼운 질병에 걸려도 회복하지 못하고 사망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누드쥐가 사는 방이 어떤 병균도 침입할 수 없도록 청결을 유지하는 이유다. 면역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어떤 병균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병을 일으키는지 알아내는데 좋은 조건을 갖췄다. 이처럼 유전적으로 특정한 질환을 앓게 만들어진 동물을 가리켜 질환모델이라 부른다.
넣는 기술에서 빼는 기술로
현재 세계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질환모델 동물은 단연 쥐다. 인간의 유전자 질환을 파악하려면 아무래도 인간과 가장 유전자 구조가 비슷한 동물이 낫다. 고릴라나 침팬지 같은 유인원류다.
하지만 이 동물들은 다루기도 어렵고 새끼의 수도 적다. 또 비용면에서 한마리의 가격이 수천만원에 달하며, 한 세대의 길이가 너무 길어 유전과 관련된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 더욱이 동물보호론자들의 강력한 반대가 만만치 않다. 그래서 질환모델 실험용으로 사용하기에 여간 까다로운게 아니다.
과학자들이 찾은 차선책은 쥐였다. 나름대로 적절한 조건들을 두루 갖췄기 때문이다.
쥐는 인간과 유전적으로 85% 정도가 비슷하다. 또 면역체계나 몸 속 장기 구조가 인간과 유사하다. 그래서 인간에게 나타나는 고혈압, 암, 비만, 당뇨와 같은 질병이 쥐에서도 거의 발견된다. 더욱이 쥐는 번식력이 막강하다. 보통 태어난 지 한달이면 성체가 되고, 3주마다 10여마리씩 새끼를 낳는다.
사실 질환모델용으로 사용될 수 있는 쥐는 1960년대에 우연히 발견됐다. 면역력이 결핍된 누드쥐나 당뇨병을 앓고 있는 뚱보쥐가 대표적인 예다. 당시 과학자들은 이들을 자연교배시켜 그 혈통을 보존해 왔다.
하지만 1980년대 원하는 유전자를 수정란에 도입할 수 있는 형질전환기술이 개발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과학자들은 유방암이나 알츠하이머 치매와 같은 인간이 앓고 있는 각종 난치성 질병을 일으키는 듯한 유전자를 쥐의 난자에 집어넣었다. 이 ‘질환 보유’ 난자에 정자를 인공적으로 수정시켜 천성적으로 질병을 앓는 새로운 쥐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질환모델로서의 쥐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1980년대 말 획기적으로 새로운 형질전환기술이 개발됐다. 그런데 이 기술은 현재까지 쥐 외의 동물에서는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기존의 ‘전핵 주입법’은 외래 유전자를 정자핵이나 난자핵에 집어넣음으로써 새로운 형질을 추가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에 비해 새로운 형질전환기술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유전자의 기능을 정지시키는게 목적이다. 특정 유전자와 비슷하게 생긴 가짜 유전자를 주입해 가짜가 진짜처럼 슬쩍 끼어들어가도록 만든다. 그러면 본래 유전자의 기능은 정지한다. 이때 어떤 질환이 발생하는지 지켜보면 본래 유전자의 기능을 알 수 있다.
이 기술은 특정 부위를 정확히 찾아가 기능을 억제시킨다는 면에서 ‘유전자 적중술’(gene targeting)이라 불린다. 이제 유전자의 기능을 넣는 일 외에도 ‘빼는’ 길이 열린 셈이다.
키메라 등장
그렇다면 ‘유전자 적중술’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대상은 어디일까. 수정란이 발달하는 초기 단계의 세포다. 수정란은 2세포, 4세포를 거쳐 분열을 거듭하다 1백여개로 분열된 포배기 상태에 이른다. 포배기의 수정란은 몸의 어느 부위로 발달할지 정해지지 않은 단계의 세포 덩어리다. 즉 신경이나 근육 어느 부위로 분화될지 정해지지 않은 상태다.
이 세포의 일부를 떼어내 배양한 것을 ‘배간(胚幹) 세포’(embryonic stem cells)라 부른다. 배간 세포는 시험관에서 끊임없이 분열을 거듭한다. 이 세포에 ‘유전자 적중술’을 이용해 적절한 유전자 기능을 상실시킨다(물론 필요한 외래 유전자를 집어넣을 수도 있다).
여기서 배간 세포의 장점이 드러난다. ‘유전자 적중술’이 제대로 됐는지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전핵 주입법’의 경우 수정란이 분열하기 직전 정자핵이나 난자핵에 원하는 유전자를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 유전자가 능력을 발휘하는지 알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보람이나 메디처럼 완전한 개체가 탄생한 다음에야 형질이 전환됐는지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배간 세포를 사용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여러 배간 세포에 유전자 조작을 가한 후 시험관에서 배양시키면 다수의 ‘후보’ 세포가 발생한다. 이 가운데 제대로 유전자가 변형된 것을 적절한 검색기술을 통해 골라낼 수 있다.
다음 순서는 골라낸 세포를 다시 포배기 수정란에 되돌려 집어넣는 일이다. 그렇다면 수정란 전체 세포에서 일부의 세포만 유전자가 변형된 셈이다. 그 결과 수정란이 분화돼 하나의 개체가 형성되면 ‘부분적으로’ 유전형질이 변형된 동물 ‘키메라’(chimera)가 탄생한다.
이 키메라를 어디에 쓸 수 있을까. 과학자들이 노리는 것은 변형된 유전형질이 키메라의 생식세포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 생식세포를 통해 태어난 동물은 100% 형질이 전환될 수 있다. 즉 배간 세포를 이용한 ‘완전한’ 형질전환동물이 만들어지려면 적어도 1세대를 지나야 한다.
누드양이 없는 이유
현재까지 이 방법이 적용된 사례는 쥐 하나뿐이다. 가축의 경우 배간 세포를 시험관에서 배양하는데 실패해 왔기 때문이다. 면역기능을 나타내는 유전자를 없애 누드쥐를 만들 수는 있어도 누드양이나 누드염소는 아직 생산할 수 없다는 의미다.
지난 5월 일본과 영국의 공동 연구팀은 시궁쥐(rat)의 유전자 지도를 완성했다고 밝혔다. 시궁쥐는 당뇨병이나 고혈압을 연구하는 중요한 실험동물로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시궁쥐의 유전자 지도는 이 질병들과 깊은 관계를 가지는 유전자를 밝히는데 중요한 기초자료로 활용될 전망이다.
현재 한국에 수입되는 질환모델 쥐는 한마리에 보통 10만-20만원대에 이르는데, 특수한 유전자가 도입된 경우 1백만원을 호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