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핵 주입법’의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들은 오랫동안 이 방법을 이용해 형질전환동물을 만드는데 노력해 왔다. 단지 품질 좋은 가축을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적절한 유전자를 삽입시키면 난치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긴요한 물질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 물질은 소량으로도 엄청난 부가 가치를 내기 때문에 과학자들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아왔다. 그래서 형질전환동물의 또다른 이름은 ‘살아있는 약공장’이다.
사람에게 질병이 생긴다는 것은 어떤 생리 물질의 기능이 상실됐음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혈우병 환자의 경우 피를 응고시키는 성분을 몸에서 생성하지 못한 탓에 한번 피를 흘리면 멈출줄 모른다. 이때 수혈을 통해 혈액 성분을 직접 주입받아야 하는데, 이는 적지 않은 위험이 따르는 일이다. 자신도 모르게 혈액을 통해 치명적인 병균이 침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프랑스에서 에이즈에 오염된 혈액에 의해 다수의 혈우병 환자가 감염되는 사건이 있었다. 그렇다면 혈액응고성분만을 주입받으면 보다 안전한 치료가 되지 않을까.
보람이와 새롬이, 그리고 메디
최근까지 과학자들은 대장균과 같은 미생물에 인간의 혈액응고성분을 만드는 유전자를 주입해 대량생산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는 수많은 환자을 치료하기에는 양이 많이 모자랐다.
여기서 바로 형질전환동물이 진가를 발휘한다. 예를 들어 혈액응고성분을 만드는 인간의 유전자를 젖소 수정란에 성공적으로 이식한다면, 그 젖소로부터 분비된 젖에 혈액응고성분이 대량으로 섞여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미생물에 비해 최고 1천배 많은 양에 해당한다. 미국에서는 이미 이런 방식을 통해 혈우병 치료제가 상품화되기 직전 단계에 이르렀다.
이 분야에 관해 한국은 외국과 비슷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인간의 모유를 닮은 우유, 빈혈치료제, 그리고 백혈병치료제를 만들어내는 보람이(젖소)와 새롬이(돼지), 메디(흑염소)가 그 주인공이다.
1996년 11월 국내 최초로 인간의 유전자를 가진 숫소 보람이가 태어났다. 생명공학연구소와 (주)두산개발의 연구팀이 젖소의 수정란에 한 서양 여성의 락토페린 형성 유전자를 주입한 결과다. 락토페린은 인체에서 모유에 많이 포함돼 있는데, 아기의 면역력을 키우고 세포증식을 촉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물질이다.
락토페린의 응용 가능성은 방대하다. 모유가 모자라거나 직장생활에 쫓기는 산모들을 위한 고품질 유아용 조제분유가 나와 산모들의 걱정을 크게 덜어줄 것이다. 또 면역력 증강을 비롯한 생리기능을 높이는 목적으로 각종 식품과 의약품에 포함돼 건강증진과 질환치료에 큰 도움을 줄 것이다. 한 조사에 따르면 2000년도 락토페린의 세계시장은 약 34조원 규모로 형성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보람이는 락토페린이 함유된 젖을 직접 생산하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보람이가 숫소이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1998년 보람이의 정자를 채취해 다른 젖소의 난자와 시험관에서 인공적으로 수정시킨 뒤 1백20마리의 암소에 수정란을 주입했다. 보람이의 진가가 발휘되려면 새로 태어난 젖소 가운데 암소의 젖에서 락토페린이 발견돼야 한다. 현재 연구팀은 새끼 암소들이 락토페린 유전자를 보유한다는 점을 확인한 상태다. 이들이 임신과 출산의 과정을 거쳐 젖이 나오기 시작할 때 비로소 락토페린이 얼마나 생산될지가 드러난다. 연구팀의 예상대로라면 이 암소들은 1L 당 1.0g 이상의 락토페린을 함유할 것이다. 모유에 들어있는 함유량인 1L당 1.4g정도에 가까운 수치다.
1999년 5월 탄생한 돼지 새롬이 역시 수컷이다. 농촌진흥청 축산기술연구소의 작품인 새롬이는 사람의 신장에서 만들어져 혈액의 형성을 촉진하는 호르몬 생성 유전자(EPO)를 가진 돼지다. 만일 새롬이가 암퇘지와 교배해 새끼 암퇘지를 낳으면, 돼지젖에서 천연의 빈혈치료제가 대량으로 생성되는 길이 열린다. 연구팀은 앞으로 2년 내 새롬이의 젖에서 나온 EPO를 정제해 상품화시킬 계획이라고 밝혔다.
새롬이에 비해 1년 정도 늦게 태어났지만 이미 젖에서 유용한 물질을 분비하기 시작해 주목을 받고 있는 동물이 있다. 1998년 4월 한국과학기술원, 생명공학연구소, 충남대학교, (주)한미약품의 합작품으로 태어난 메디다. 인간의 백혈구를 증식시키는 단백질(G-CSF) 유전자를 가진 토종 흑염소로서, 보람이나 새롬이와 달리 암컷이기 때문에 젖에 포함된 물질을 확인하는 시간이 짧았다. 최근 확인한 바에 따르면 메디가 분비한 젖에서 1L당 0.1g 정도의 G-CSF가 포함됐다는 점이 확인됐다.
G-CSF는 인체 면역세포의 하나인 백혈구가 잘 생성되도록 촉진하는 단백질이다. 이를 이용해 만든 의약품은, 백혈병이나 빈혈과 같은 질병이 생기거나 골수이식·화학요법 과정에서 백혈구가 부족할 때 필수적으로 쓰이고 있다. 1g에 무려 9억원에 달하는 고가품이다.
메디가 G-SCF를 분비하는 것으로 알려진 이상 남은 문제는 불순물을 제거하고 임상시험을 거치는 일이다. 현재의 추세라면 2001년 초 메디의 G-SCF는 임상시험에 들어가게 된다.
소변에서 약품 생산
보람이, 새롬이, 메디 모두 젖에서 인체 물질을 얻기 위해 만들어진 형질전환동물이다. 그런데 젖이 나오기 위해서는 임신과 출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전의 방식에 비해 대량으로 고가 의약품을 얻을 수는 있지만 젖이 나올 때까지 1-2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또 가축이 평생 젖을 분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더욱이 젖에는 다수의 생체물질들이 존재하므로 여기서 필요한 성분만을 추출하는 것은 상당한 노력과 경비가 소요된다.
만일 이런 제약 없이, 태어나서부터 평생 동안 필요한 물질을 생산하는 형질전환동물이 있다면 어떨까. 최근 국내에서 개발된 형질전환 쥐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
1999년 6월 가톨릭의대 연구팀은 혈액의 성장을 돕는 인자(hGM-CSF)를 생산하는 형질전환 쥐를 개발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인자가 소변에서 생산된다는 점이다. 연구팀은 기존의 형질전환 동물이 젖을 통해 인체에 유용한 물질을 만들어낸 탓에 시간의 제약이 따른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암수 구별 없이 일단 태어나기만 하면 평생 생체 물질을 분비하는 방법을 고안한 것이다.
연구팀이 개발한 쥐는 소변 1L당 hGM-CSF를 0.2mg 생성한다. 만일 이 기술이 많은 양의 소변을 보는 가축에게 성공적으로 적용된다면 현재의 형질전환 동물에 비해 획기적으로 경제적인 생체 물질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