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족들만 향유할 수 있었던 염료. 합성염료의 개발이 세계의 민주주의를 앞당겼다면 과장일까. 라스코 동굴벽화에서 합성염료까지의 역사를 알아본다.
현대 생활에서 색깔은 매우 다양하게 쓰인다. 옷이나 건물은 그 디자인과 더불어 색깔 때문에 더욱 빛나고, 신호등이나 표지판의 색깔은 유용한 정보를 전해주는 동시에 위험도 막아준다. 심지어 우리가 먹는 음식물도 그 색깔에 따라 맛이 다르게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색깔은 그림이나 조각과 같은 예술품에서 없어서는 안되는 필수 요소다.
색깔을 이용한 역사는 아주 오래됐다. 프랑스의 라스코동굴에는 기원전 1만5천년 전에 빨강, 노랑, 갈색, 흑색 등으로 그려진 벽화가 아직까지도 그 선명한 색깔을 자랑하고 있다. 수천년 전에 만들어진 이집트의 피라미드에서도 아름답게 채색된 유품들이 발굴됐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고구려 시대의 고분 벽화를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가지고 있다.
인디아 잉크는 검댕
과거의 유물들에서 볼 수 있는 색깔들은 자연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천연 재료를 이용한 것이다. 그러던 것이 차츰 대량으로 합성된 물질을 사용하게 된다. 인디아 잉크 또는 중국 잉크라고 부르는 먹은 접착제에 뼈나 타르를 태운 검댕을 섞어서 만든 것으로 수천년 전부터 사용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도 짙은 색과 내구성을 가진 훌륭한 잉크로 사용된다. 탄산칼슘, 황산칼슘, 산화납, 고령토는 흰색 안료로, 산화철은 갈색 또는 황갈색의 안료로, 그리고 카드뮴이나 바나듐의 화합물도 여러 가지 색깔의 안료로 사용된다. 이산화티탄은 오래 전부터 쓰이던 산화납과는 달리 인체에 독성이 없어서 흰색 그림 물감은 물론 화장품의 원료로도 많이 사용됐다.
옷감이나 종이 또는 가죽을 물들이기 위해서 사용하는 염료(染料, dye)는 섬유와 염료의 분자 사이의 강한 화학결합을 이용하는데, 염료는 주로 유기물질로 만든다. 자연에서 채취한 재료를 이용한 염료의 역사는 4천년이 넘으며, 전세계의 어느 곳에서나 그런 염료를 사용했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천연 염료 대신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된 합성염료의 사용이 일반화됐지만 아직도 현대 문명의 손길이 닿지 않는 오지의 사람들은 천연염료를 많이 사용한다.
빨간색 염료는 토지세
제조 방법이 기록으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염료는 로마 시대에 티리안 퍼플 또는 로얄 퍼플 등으로 알려졌던 자주색 천연 염료다(그림1).
지중해에서 많이 자라는 뮤렉스 브란다리스라는 바다 달팽이의 내아가미샘에서 분비되는 맑은 체액을 원료로 만들었다. 달팽이의 분비액을 공기 중의 산소에 노출시키고 햇빛을 쪼여주면 몇 차례 색깔이 바뀌다가 마침내 모직물이나 견직물에 사용할 수 있는 청색이나 자주색의 염료가 만들어진다(그림2).
이밖에도 고대인도, 페르시아, 이집트에서는 꼭두서니라는 식물의 뿌리에서 알리자린이라는 빨간색 염료를 얻는 방법이 알려져 있었다. 이 염료는 10세기경에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또 열대 선인장에 기생하는 연지벌레 또는 깍지진디에서는 안트라퀴논 계통의 빨간색 염료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목서초(木犀草)의 씨앗, 줄기, 잎이나 북미산의 떡갈나무 껍질에서는 플라보노이드계의 노란색 염료가 만들어진다. 연지벌레에서 추출하는 코치닐이라는 염료는 멕시코인들이 오래 전부터 이용하던 것으로 스페인 사람들에 의해서 유럽에 알려졌고, 립스틱과 같은 화장품의 원료로 사용된다. 말린 깍지진디의 눈에서 얻는 케르메스라는 염료는 가장 오래 전부터 알려진 빨간색 염료로 로마의 승전 장군에게 주어지거나 중세의 지주들이 토지세로 받기도 했다.
1만2천 마리의 달팽이로 1.2g의 염료를
천연 염료는 대량으로 생산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희소가치가 높았다. 따라서 왕이나 귀족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거기다가 염색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염료 이외에도 백반과 같은 매염제(媒染劑)가 필요했기 때문에 염색 기술은 국가 비밀로 취급됐다. 예를 들어서 로마 시대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염료 공장 밖에서 로얄 퍼플을 만드는 사람은 사형에 처할 정도였으니 일반인에게 천연 염료는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정은 우리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유한 사람들은 쪽(남), 치자, 잇꽃, 오가피, 꼭두서니, 모과, 석류, 산수유 등으로 만든 천연 염료로 물들인 옷감을 입을 수 있었다. 왕이나 관료들은 비단길을 통해서 중국으로 수입된 비싼 염료로 염색한 화려한 옷으로 그 권위를 자랑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흰색의 무명옷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천연 염료는 환경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1만2천마리의 달팽이를 잡아서 만들 수 있는 티리안 퍼플의 양은 1.2g에 불과했고, 7만 마리의 연지벌레를 잡아서 뜨거운 물에 삶으면 4백50g의 코치닐을 얻을 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인도가 원산지인 인디고페라라는 종류의 향료 식물인 쪽(藍, 인디고)의 잎에서도 로얄 퍼플과 같은 종류의 염료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지중해 달팽이는 더 이상의 희생을 면할 수 있게 됐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아도 모자라는 식량 생산에 쓰여야 할 경작지가 일부 귀족들을 위한 쪽 재배에 쓰임으로써 일반인의 생활은 오히려 더 힘들어졌다.
말라리아 특효약에서 얻은 보라색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색깔의 옷을 입게 된 것은 19세기 말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합성염료 덕분이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면 석탄을 가공해서 만든 코크스가 산업용으로 중요하게 등장한다. 1t의 석탄을 처리해서 코크스를 만들면 30L의 콜타르라고 하는 검은색의 끈적끈적한 액체가 생긴다. 그 중 일부는 철도 침목을 만드는 목재 보호제나 도로 포장용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처리가 매우 어려운 산업 폐기물이었다.
유기화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리비히의 제자였던 아우그스트 호프만은 이런 산업폐기물에서 아닐린이나 벤젠과 같은 유용한 물질을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는 1845년부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초청으로 왕립화학대학에서 화학자를 양성하게 됐는데, 당시 그의 제자였던 18세의 윌리엄 퍼킨이 1856년에 말라리아의 특효약인 퀴닌을 합성하는 연구를 하던 중에 뜻밖에도 아름다운 보라색 액체를 얻었다. 퍼킨은 이 액체로 옷감을 염색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최초로 인공 염료를 합성한 업적을 남긴다. 퍼킨은 이 염료를 프랑스의 보라색 들꽃의 이름을 따라 ‘모브’(mouve)라고 불렀고, 그후에 빨간색의 알리자린 염료를 인공적으로 합성하는 방법도 개발해 영국의 섬유산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1865년에 다시 독일로 돌아간 호프만은 쓸모 없던 산업폐기물인 콜타르에서 50여 가지의 유용한 화학 물질을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독일의 합성염료 산업을 확고하게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1914년 독일이 세계 염료 시장의 90%를 점유하도록 만든 장본인이 호프만이다.
신분 차별 없앤 합성염료
이러한 성과는 19세기말부터 급격히 발전한 현대 화학 때문에 가능했다. 원자의 존재와 원자들의 화학결합으로 만들어지는 분자의 구조에 대한 지식이 축적됨에 따라서 달팽이와 쪽(藍)이 모두 ‘인디고’라는 똑같은 분자를 이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런 분자를 콜타르와 같은 값싼 원료로부터 공장에서 대량 생산했다. 합성 인디고와 합성 알리자린을 처음으로 개발했던 독일의 BASF는 지금까지도 전세계 화학 산업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제약회사로 유명한 독일의 바이엘이나 영국의 ICI도 모두 같은 시기에 염료 생산으로 유명했던 회사들이다.
합성염료의 개발은 누구나 원하는 색깔의 옷을 입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민주화된 사회를 이룩하는데 기여했다. 또 엄청난 양의 천연 자원이 소모되는 천연 염료를 대체하게 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환경 보호에도 큰 기여를 했다. 실제로 합성염료의 개발 때문에 인도의 인디고 재배는 사양 산업이 돼 버렸다.
합성염료 산업의 발전은 뜻하지 않은 새로운 소득을 안겨주기도 했다. 아스피린과 같은 의약품의 대량 생산이 바로 그것이다. 현대 화학이 발전하기 전까지는 의약품도 염료와 마찬가지로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천연 자원을 원료로 사용했다. 그러나 염료 합성에서 얻은 화학적 지식을 이용해 값싼 합성 의약품을 대량으로 생산하는 길이 열렸다. 그렇지만 이러한 발전은 환경 파괴라는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냈다. 현대의 화학은 이제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단순한 역할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자연과 인간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생활 방식을 제시하는 수단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미래의 청정화학(green chemistry)이 추구해야 할 목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