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카소의 그림에는 4차원의 시공간을 주창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들어있다. 몬드리앙과 칸딘스키는 사물을 점, 선, 면으로 단순화하고 순수한 조형세계를 구축했다. 이제 그림은 무엇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게 되면서 추상미술은 그림을 돼지저금통과 똑같은 하나의 물건으로 취급했다.
15세기 르네상스는 인간에 주목했다. 르네상스인들은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후 주변의 모든 것은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재해석됐다. 원근법이란 신의 눈이 아닌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해석하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내 눈과의 거리에 따른 크기의 대소에 따라 사물의 중요성이 결정되는 것이 원근법의 핵심이다. 이제 세상의 주인은 바로 나라는 인간이다.
이 인간 중심의 사고는 데카르트에 의해 더욱 심화된다. 근대 사회를 여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데카르트 철학의 핵심은 요소환원주의이다. 요소환원주의란 내가 알고자 하는 대상이 있으면 가장 작은 요소로 쪼개고 난 후 그것들을 다시 재조합하는 방법이다. 근대의 모든 학문이란 바로 이 데카르트의 철학에 기초를 하고 있다. “모든 것을 가장 작은 단위(unit)로 쪼개보면 알 수 있다”라는 사고의 배경에는 기계론적인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세계는 하나의 잘 짜여진 기계이고 그 기계의 구조를 알면 인간이나 자연, 심지어는 인간의 마음까지도 모두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 서양 근대인의 믿음이었다. 서양의 근현대예술 역시 이 데카르트의 요소환원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1. 피카소와 입체파 - 상대성이론이 캔버스에
피카소는 어릴 때부터 이미 완벽한 소묘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 피카소가 1907년 '아비뇽의 처녀들'(16)이라는 그림을 발표했다. 주변에서는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독설을 퍼부어 댔다. "피카소도 이제 갈 때까지 갔구나!" "그 따위로 그림을 그리려면 붓을 집어 던져라" 등등. 별별 소리가 다 들려왔다. 피카소는 왜 이렇게 그림을 그렸을까? 미켈란젤로만큼이나 소묘를 잘했던 화가가 말이다. 그 이유는 피카소의 조형사고 때문이었다.
피카소는 미술의 본질이 형태에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 ‘모나리자’가 있다고 하자. 피카소에게 모나리자라는 형태란 앞면, 뒷면, 윗면 등으로 구성된 입체덩어리였다. 피카소는 주장했다. “형태란 결국 면과 면들의 집합이다.” 모든 형태를 면(cube)으로 분석해 결합시킨 것이 바로 20세기초 입체파(Cubism)이다(17). 피카소는 형태를 입체덩어리로 단순화시킨 것만이 아니다. 그는 거기에서 한단계 더 나아갔다.
피카소가 입체파를 열었을 당시 서양사회는 아인슈타인이라는 물리학자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누구인가? 바로 시간의 상대성을 주창했던 사람 아닌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당시에는 가히 혁명적인 이론이었다. 시간만은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마저도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상대적인 존재였다니…. 서양사회는 일대 가치의 혼란을 겪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지식인들 사이에서 시간은 새로운 탐구의 대상이 됐다.
여러 방향의 모습을 한 화면에
지금 우리 앞에 '모나리자'가 있다고 하자. 우리는 한 순간에 모나리자의 한 측면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앞쪽에 있다면 앞면만을, 왼쪽에 있다면 왼쪽 면만을 볼 수 있다. 우린느 시간을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뒤로 돌아가서 모나리자의 뒷모습을 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는 뒤로 돌아가면 앞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피카소는 그림 안에서 이 시간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들은 한번에 사방 팔방에서 본 모나리자의 모습을 그리기를 원했다. 그래야만 모나리자를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는 인물에 대해 완전하게 알기 위해서는 모나리자의 앞모습, 뒷모습, 옆모습, 위에서 본 모습, 밑에서 본 모습을 한번에 모두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 입체파의 믿음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한 번에 한 면만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나리자에 대한 완전한 지식, 즉 앞, 뒤, 옆, 위, 아래에서 본 것은 우리의 머릿속에서나 종합될 수 있는 지식이다. 결국 모나리자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머리, 즉 이성에 의해서만 파악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온다.
피카소는 이 문제를 해결했다. 어떻게 해결했을까? 모나리자가 있다고 하자. 우선 그들은 입체파의 원리에 따라 형태를 면들로 단순화시켰다. 다음 순간 사방팔방에서 본 단순화된 모나리자를 해체해 펼쳐보였다. 그런 다음 각각의 조각들을 ‘볼라르의 초상’(18)과 같이 하나로 모아 짜 맞추었다. 우리는 한 번에 모나리자의 모든 모습을 다 보게 된 것이다. 이게 바로 입체파의 업적이었다. 결과를 보면 “에이! 그거 별거도 아니잖아!”하고 소리치지만 그것은 엄청난 노력과 고통의 결과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남이 한 결과를 보면 쉬워 보이지만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실현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형태를 각각의 면들로 하나하나 분석해 그렸다 해서 특히 이러한 그림들을 분석적 입체파라고 부른다.
삶의 정서는 어떻게 반영하나
피카소는 누구도 하지 못했던 시간, 즉 4차원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쭐했다. “드디어 우리는 완전한 형태를 그렸다!” 그런데 이들의 그림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게 무엇일까? 피카소의 그림은 매우 과학적이었다. 사방팔방에서 본 형태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거기에 시간까지도 하나로 결합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람들이 이러한 그림들을 보고 도대체 무엇을 그렸는지를 알아볼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작품의 제목을 보고 내용을 유추할 뿐이지 사람들은 그것들을 알아볼 수 없었다. 더 큰 고민은 눈, 코, 입 등 입체파가 그린 형태들은 모두 조각 조각으로 분해가 돼 그 형태들에다 삶의 정서를 반영할 수 없게 됐다. 그림은 전개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림은 과학적 업적을 반영한다. 그러나 그림은 과학이 아니다. 입체파의 고민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그림을 알아보지도 못할 뿐더러 기쁨이나 슬픔, 분노 등 생활에서 느끼는 삶의 정서를 표현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입체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낸다. 어떻게 해결했을까? 피카소의 위대함은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한 데 있었다. ‘울고 있는 여인’(19)을 보자. 도대체 이러한 그림이 왜 유명한지 혼란스러운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내 동생도 이 정도는 그리겠다”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살펴보자. 우선 피카소는 물체 본연의 형태를 유지했다. 형태가 깨지게 되면 감성을 전달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울고 있는 여인’은 ‘볼라르의 초상’과는 달리 여자의 형태를 유지하고 그 형태 속에서 분석적인 방법을 도입했다. 피카소는 여자의 얼굴을 유지하면서도 그 속에 양 측면에서 본 얼굴과 정면에서 본 얼굴을 하나로 결합했다. 얼굴의 형태가 유지됨으로써 피카소는 기쁨이나 슬픔, 분노 등을 표현해낼 수가 있었다. 피카소의 이러한 방법을 종합적 입체파라 부른다. 피카소의 그 유명한 ‘게르니카’(20)라는 작품이 분석적인 입체파 기법으로 그려졌다면 어떻게 선량한 게르니카 시민들을 폭격해 죽게 한 나치의 만행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아마 분석적 입체파의 방법으로 ‘게르니카’를 그렸다면 형태가 모두 깨어져버려 분노의 표현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분석적 입체파의 방법은 매우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우리는 무엇을 증명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주변의 삶을 반영하고 표현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2. 몬드리앙과 칸딘스키 - 나누고 나누면 점, 선, 면 뿐
마네로부터 시작된 현대미술은 세잔, 피카소를 거치면서 점점 형태를 단순화해 나아갔다. 세잔은 형태를 구(球)나 원통, 원뿔로서 단순화시켰고 피카소는 그 원통을 더욱더 단순화해 면들의 집합물로 만들었다. 입체파의 조형사고를 한단계 더 밀고 나아간 사람은 칸딘스키와 몬드리앙이었다.
피카소가 단순화시켜놓은 입체덩어리가 있다고 하자. 이 입체를 한 번 발로 밟아보자. 그러면 하나의 단순한 면이 될 것이다. 이제 그림은 입체에서 단순한 하나의 면, 즉 평면이 된 것이다. 이게 바로 현대의 기하학적 추상미술이다. 좀 거칠게 표현했지만 현대 추상미술의 원리는 바로 이것이었다.
몬드리앙이 추상미술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자(21).
왜 몬드리앙은 이렇게 형태를 단순화시켰을까? 몬드리앙이 나무를 단순화시킨 이유는 나무라는 형태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가 어떻게 이루어져 있는가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처음에는 커다란 줄기들로 나무를 단순화하더니 점차 그의 그림에는 간단한 선들만 남는다. 그리고 종국에 나무는 수평선과 수직선만 남았다. 마지막의 단계에서 나무는 수직선 하나로 표현될 뿐이다. 이 수평선과 수직선을 조형적 미감에 따라 배치한 것이 우리가 흔히 보는 ‘적 황 청과 흑의 컴포지션’(22)과 같은 그림이다.
나무도 사람도 직선 하나
우리는 이러한 그림을 보면서 당황한다. 도대체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림을 보면서 열심히 그 내용을 찾으려고 고민하다가 이내 낙담하고 만다. “어휴! 나는 미술에 소질이 없나봐”라든가 “현대미술은 너무 어려워” 라고 푸념한다. 다시 피카소로 돌아가보자. 피카소의 분석적인 그림을 보고 사람들은 그 그림이 도대체 무엇을 그렸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카소는 종합적 입체파라는 절충적인 방법을 선택했다. 몬드리앙의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몬드리앙은 나무를 하나의 선으로 표현했다. 우리는 나무를 단순화시켜 하나의 수직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하나의 수직선이 모든 나무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을 하나의 면으로 단순화시키는 몬드리앙에게는 나무도 하나의 수직선이고 사람도, 집들도 하나의 수직선이다. 물론 사람과 집을 하나의 수직선으로 단순화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의 수직선이 나무나 집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다.
몬드리앙과 같은 그림에 이르면 이제 그림은 더 이상 외부의 사물이나 정서를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몬드리앙의 그림은 자연이나 인간의 삶, 그리고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몬드리앙의 그림은 점이나 선, 면, 색과 같은 순수한 조형으로 그려진 미술의 세계인 것이다. 몬드리앙의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선과 선, 색과 면, 선과 면의 조화이다. 몬드리앙에게 중요한 것은 왁자지껄한 그림 밖의 인간 세계가 아니다. 이제 미술은 화면 밖의 세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졌다. 그림 안에서는 이제 원근법도, 중력도, 심리학도 해부학도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그림의 세계는 선과 면, 색들로만 이루어진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제 미술은 순수 조형세계라는 별개의 세계가 된 것이다.
보지 않고 그리는 그림
자연의 형태가 없어지다 보니 그림은 현실과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된다. 현대미술가들은 그림에서 형태나 이야기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제 화가들은 실물을 보지 않고도 그림을 그리게 됐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실물을 안보고 그리다니. 사람이나 나무, 동물 등을 안 그리고도 그림이 되다니. 이제 화가들은 대상이 없이도 아무 문제없이 그림을 그리게 됐다. 현대미술은 순수 조형요소만을 가지고 미술의 세계를 구축하게 됐다. 우리가 잘 아는 칸딘스키의 ‘점, 선, 면’의 이론은 바로 절대조형세계의 구축에 있었던 것이다(23).
몬드리앙이나 칸딘스키의 그림도 이 데카르트의 철학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데카르트와 같이 몬드리앙은 우선 “형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무엇인가?”하고 회의했다. 형태에 대해 완전한 지식을 갖기 위해 형태를 단순화하기 시작했다. ‘모나리자’가 있다고 하자. 형태의 본질, 즉 변화하지 않는 성질을 형태에서 찾았던 세잔은 모나리자를 원통이라는 형태로 보았다. 피카소는 그 원통을 각진 면들로 단순화했다.
몬드리앙과 칸딘스키는 한 단계 더 나아가 형태의 본질을 형태의 가장 기본적인 구성 요소에서 찾았다. 그들이 찾은 것은 점, 선, 면이었다. 형태는 면들의 집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면은 선의 연장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선은 점들의 연장으로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세포로서 분해되듯 모든 형태는 점으로서 분해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의 믿음이었다. 몬드리앙과 칸딘스키의 작품세계는 바로 형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점, 선, 면의 구성(Composition)으로 이루어진 세계였던 것이다(24).
3. 현대의 미술가들 - 그림은 삶이 아니라 물질이다
20세기초 현대미술가들은 그림이 거짓말이라고 주장하고 그림에서 이야기를 지워버렸다. 한번 생각을 해봐라. 측면에서 보면 1mm 밖에 안 되는 이 원의 캔버스 위에 수백m나 되는 깊이를 내고 입체를 표현하는 일은 어떤 속임수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원근법이나 명암법이란 우리 눈을 속이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이 현대미술가들의 생각이다.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화면 위에다 그린 이야기는 결국 다 거짓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현대미술은 사실적으로 묘사된 그림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는데 매진했다. 그들은 마침내 혁명적인 결론에 도달했다. “그림은 삶의 이야기를 옮겨다 놓은 장소가 아니라 그림은 단지 그림일 뿐이다!”라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었다.
“그림은 그림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 아닌가? 그러나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한 현대미술가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이 “그림은 그림이다”라고 주장한 의미는 그림은 더 이상 어떤 형태를 표현하는 장소가 아니라 “그림이란 캔버스라는 천 위에 물감이라는 안료가 얹혀 있는 것이다”라는 극단적인 물질론적 사고에 도달한 것이다.
순수 조형 세계
인상파 미술 이후 전개된 그림이 점점 평면이 돼갔던 이유는 현대미술가들에게 명암에 의한 입체표현은 거짓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림으로 무엇을 그린다는 것이 의미가 없어진 현대미술가들은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순수조형의 세계를 그려나갔다. 점, 선, 면으로 이루어진 순수조형의 세계에서는 현실에서 유추할 수 있는 어떠한 자연도 없다. 사람도 없고, 나무도 없고, 강도 없고, 산도 없다. 그러니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가 없다. 순수 조형세계에서 표현할 수 있는 이야기란 선과 색의 조화나 그것들로 만들어진 화면의 구성과 같은 것들 뿐이다. 누가 이러한 그림을 보고 ‘삶의 처절한 고통’이니 ‘우주의 신비’니 하는 말을 한다면 괴이치 마라. 그것은 그저 그 사람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그렇다고 추상미술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미술사적으로 보면 혁명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칸딘스키나 몬드리앙 이전의 모든 화가들은 자연에 있는 사물이든 상상 속에 있는 물체이든 무엇을 보고 그렸다. 그런데 몬드리앙이나 칸딘스키는 아무 것도 보지 않고 그림을 그렸다. 여기에 현대미술의 혁명적 업적이 있는 것이다. 칸딘스키나 몬드리앙, 말레비치와 같은 추상미술가들이 미술사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25).
구석기 원시인들이 동굴 속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이후 화가들은 초상화를 그리든, 정물화를 그리든, 역사화를 그리든 반드시 어떤 대상을 보고 그렸다. 그러나 현대미술가들은 아무 대상이 없이도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과거 미술가들은 그림을 배우기 위해 대가의 아틀리에나 아카데미에서 데생과 채색법을 배웠다. 그런데 현대미술에 오면 그런 것들이 아무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무엇을 보고 그릴 필요가 없으니 어떻게 그릴 것인가를 배울 필요도 없게 된 것이다. 이제 그림이란 무엇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 어떻게 구성하느냐가 더 중요한 일이 됐다.
화가의 그림과 과학자의 실험도구
몬드리앙 이후 현대미술은 더욱 대담하게 나아갔다. 그들은 단순화의 단계를 넘어 그림을 물질적으로 실험하는 단계에 다다른다. 이제 그림이란 화면이라는 캔버스 천 위에 물감이라는 안료가 얹어진 것이라고 현대미술가들은 생각했다. 사실 물질적으로 보면 그림이란 천에 물감이 뒷면으로 스며들지 못하도록 아교를 바르고 그 위에 색이 잘 우러나오도록 기본칠을 하고 그 위에 여러 겹의 물감 층이 칠해진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몬드리앙이나 칸딘스키 이후의 미술가들은 그림의 이러한 물질적 구조에 주목했다. 화가들은 조형적 실험의 단계를 넘어 물질을 가지고 실험을 시도했다. 로스코의 ‘오렌지색과 노란색’(26)과 같은 색면회화가 등장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로스코의 주장은 바로 이러한 것이다. “그림이란 캔버스 위에 빨간 물감이 올라와 있는 것이다.” 캔버스는 물감이 올라가 있는 것만이 아니다. 화선지와 같이 물감이 스며들기도 한다. 루이스의 ‘베스 알레프’(27)는 캔버스에 물감이 어떻게 스며드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그림이다. 이쯤 되면 화가는 실험실에서 작업하는 과학자와 거의 차이가 없다. 그림은 물질이 됐다. 그림도 사과나 장난감과 같은 하나의 물질이 된 것이다.
스텔라의 ‘인도의 왕후’(28)를 보자.
이전에 보던 사각형의 그림이 아니다. 그림이 휘어지기도 하고 꺾어지기도 하고 별의별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스텔라의 이런 그림을 세이프드 회화(Shaped Painting)라고 부른다. 스텔라는 왜 이러한 그림을 그렸을까? 사실 그의 그림은 그린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림은 전체가 하나의 물건이다. 그에게는 더 이상 화면에 그림을 그리는 일이 의미가 없어졌다. 그에게 캔버스는 하나의 물건, 즉 장난감이나 돼지저금통과 같은 물건이 된 것이다. 또 폰타나와 같은 화가는 화면이 2차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칼로 화면을 찢기도 한다(29).
현대미술가들에게 그림은 그 위에 무엇을 그리는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물체가 된 것이다. 이게 바로 20세기 후반 현대미술이 걸어온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