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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밍이 실험실에서 자신이 배양한 페니실리움 노타툼 접시를 들고 포즈를 취한 모습. 이 사진은 그가 페니실린을 발견한 1928년에서 25년이 지난 후에 연출한 장면이다.


플레밍의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지만, 실제로 자신이 한 일에 비해 과도한 찬사를 받았다는 주장이 있다. 프레밍이 페니실린에 대한 연구를 덮어둔 기간에 페니실린을 사람에게 적용시키는데 성공한 과학자는 프로리와 체인이었다. 하지만 언론을 통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인물은 플레밍이었다.

‘기적의 약’으로 불리는 페니실린을 처음 발견한 플레밍은 과학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동안 시간이 흐른 뒤 역사가와 전기작가들로부터 플레밍이 누린 영예는 사실이 아닌 신화라는 주장들이 제기됐다. 한 전기작가는 플레밍에 대한 열광은 일종의 ‘대중적 광란’ 증상이라고까지 썼다. 그렇다면 산뜻한 나비넥타이가 트레이드 마크였던 이 과학자에 대한 얘기는 무엇이 신화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인 걸까?

1928년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발견하고서는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페니실린을 얻기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페니실린은 무척이나 불안정한 물질이었고 정제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있었다. 또 플레밍은 페니실린을 건강한 동물에게 투여하여 독성여부만을 조사했을 뿐 감염된 동물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지 않았다. 그는 페니실린에 대한 더 이상의 탐구를 멈추고 그간의 결과를 정리하여 1929년에 논문으로 발표했다.

적극적인 언론 플레이

바로 이 부분이 ‘플레밍 신화’ 벗기기의 중심이 된다. 플레밍은 페니실린의 가능성만 제시했을 뿐이고 더 이상 한 게 없다는 내용이다. 즉 발견은 했지만 자신이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1870년대부터 몇몇 연구자들이 곰팡이가 세균에 위협요소가 된다는 비슷한 관찰들을 보고한 바가 있고 플레밍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다.

왜 플레밍이 페니실린에 대한 더 이상 연구를 진척시키지 않았는가에 대해 여러 가지 설명이 있다. 무엇보다 정제가 어렵다는 난점 때문에 치료효과에 대한 효율적인 시험이 힘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생화학자가 아니었기에 그의 화학지식으로는 페니실린의 분리 분석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이 문제에 전담할 인력을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또 그가 일하는 학과가 약제보다는 백신을 이용하는데 더 관심이 많았기에 약제로서 페니실린에 대한 흥미가 덜 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기적의 약은 10여년을 더 기다려야 했고, 이 운 좋은 관찰은 배양실험 때 귀찮게 나타나는 원하지 않는 세균을 제거하는 데만 사용됐다.

페니실린을 망각 속에서 찾아내 그 효능을 증명하여 인류 앞에 내놓고 항생물질의 시대를 연 사람은 옥스퍼드 대학의 병리학자 플로리와 생화학자 체인이었다. 이들은 라이소자임의 생화학적 특성에 대해 연구하다가 임상에는 그다지 효과가 없음을 확인하고 다른 물질을 찾기 위해 관련된 논문을 뒤지다가 플레밍의 1929년 논문을 발견했다. 마침 같은 학교의 다른 연구자가 플레밍에게 얻은 푸른곰팡이를 원치 않은 세균을 제거하는 데 사용하고 있어 쉽게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다.

여러해 동안 각고의 노력 끝에 페니실린의 분석과 정제에 성공한 그들은 1940년 봄 감염된 8마리의 쥐를 대상으로 의미 있는 실험을 실시하였다. 실험결과 충분한 양의 페니실린을 투여 받은 3마리만이 살아남았다. 이는 플로리의 표현대로 기적이었다.

한편 플레밍은 플로리팀이 1940년 페니실린에 관한 논문을 발표할 때까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플레밍이 연구성과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실을 방문하고 싶다는 뜻을 보내왔을 때 플로리는 “플레밍이라고? 맙소사, 난 그가 이미 죽은 줄 알았는데” 라며 놀라워했다. 자신이 제껴두었던 페니실린의 효력을 확인한 플레밍은 이후 페니실린의 위력을 알리는 전도사 역할을 자임했다.

이때부터 ‘페니실린 십자군’ 플레밍 신화가 본격적으로 형성됐다. 신화의 산파는 영국의 언론이었다. 영국의 한 신문이 기적의 약 페니실린은 플로리팀의 개가라는 내용을 톱기사로 내보냈는데, 이를 본 세인트메리병원의 책임자가 신문사에 서신을 보내 페니실린의 발견자가 플레밍임을 알렸다. 이를 안 언론사에서는 플레밍과 플로리의 실험실로 몰려가 취재경쟁을 벌였다. 이때 플레밍은 기꺼이 인터뷰에 응하고 사진기자를 위해 자신의 실험실에서 포즈도 취했다.

하지만 플로리와 체인은 이같은 떠들석한 광고를 좋아하지 않아 기자들이 들이닥치면 뒷문으로 빠져나가 피하곤 했다. 플로리는 연구활동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언론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고, 한편으로 페니실린 생산량에 비해 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을 염려하고 있었다. 이 덕분에 신문들은 플로리팀에 대해서는 쓸 수가 없었고 대신 플레밍을 페니실린 뒤에 우뚝 선 ‘유일한’ 천재로 묘사했다. 물론 플레밍은 연설 때마다 동료로서 플로리와 체인의 역할에 대한 칭찬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이 10여년간 자신의 발견에 대해 오리무중 상태였음은 말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플레밍에게는 자신도 믿기 어려운 정도의 갈채와 영예가 이어졌으며 처음에는 쭈뼛거리던 그도 곧 이를 즐기게 됐다. 그는 자신에 관한 신문보도를 스크랩한 노트에 ‘플레밍 신화’라는 제목을 붙였으며, 어떤 기사는 연구실의 게시판에 붙여놓기도 했다.

우연과 행운의 모자이크

2차대전이 끝난 후에 플레밍은 수년 동안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다니며 페니실린에 대해 강연했다. 사실 그는 과묵하고 너그러운 성품으로 모든 사람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았지만 지독히도 말주변이 없었고 전공강의를 못하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기자들과의 회견이나 대중강연에서는 수줍어하지 않고 이야기를 끌어나갔으며, 사람들도 꾸밈없는 그의 말투에 더 호감을 가졌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플레밍은 세계적인 학자로 발돋움했고, 모두 25개의 명예학위와 26개의 메달, 13개의 훈장을 받았으며 1944년에 귀족작위를 받았다.

1945년 노벨상선정위원회는 플레밍과 플로리, 체인을 생리의학상의 공동수상자로 발표했다. 이때도 플로리와 체인은 언론에 냉담하게 굴었는데, 한 모임에서 플로리는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1940년 페니실린에 대한 첫 관찰이 발표될 때까지 페니실린의 참모습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분명 플레밍은 그가 이룩한 것보다 더 많은 찬사를 받았고, 그의 연구에는 우연과 행운이 모자이크돼 있었다. 수십년 동안 많은 학자들이 플레밍의 우연한 페니실린 발견을 재현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플레밍의 행운을 웅변해준다. 하지만 그가 거둔 성공을 단순히 행운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의 표현대로 운명은 그에게 무척이나 친절했지만, 행운이 주어졌을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예리한 안목과, 끈질긴 호기심, 준비된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페니실린을 발명하지 않았습니다. 자연이 만들었죠. 난 단지 우연히 그것을 발견했을 뿐입니다. 내가 단 하나 남보다 나았던 점은 그 관찰을 흘려 보내지 않고 세균학자로서 대상을 추적한데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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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문만용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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