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꺽어진 70살을 넘도록 혼자 사는 친구가 있다. 그래서 그 친구집에는 늘 사람들이 북적된다. 때로는 미안한 생각도 드는데, 그럴 때는 "이제 홑살림은 청산해야지, 불편하잖아"라고 한마디 건네본다.

"혼자 사는 것이 불편하다고. 천만에. 없는 게 없는데 무슨 불편. 전자밥솥이 '아내의 정성'을 다해 밥해 놓지, 손빨래 세탁기가 와이셔츠 깃에 절은 묵은 때까지 쏙쏙 빼 놓지, 싱싱 냉장고는 야채를 사계절 보관해 주지, 리모컨 하나면 TV 봤다 비디오 봤다, 주말이면 안전제일 ABS와 에어백을 갖춘 승용차에 올라타고 야외로 튀면 되고,…. 혼자 살아봐야 그 맛을 안다니까."

"참, 세상 좋아졌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그 친구의 말을 들으면 더욱 실감이 난다. 이렇게 바뀐 것이 얼마나 됐을까.

비밀은 반도체칩

요즘의 가전제품들은 모든 것을 '알아서' 해 준다. 그 안에 작은 반도체 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개의 칩에 컴퓨터의 모든 기능(CPU, 롬, 램, 입출력장치)을 갖춘 마이컴이 라는 것이다. 마이컴은 마이크로컴퓨터(microcomputer)의 줄임말로, 일본과 우리나라에서 주로 쓰는 용어다. 반도체의 고향이라고 하는 미국에서는 마이크로컴퓨터 혹은 마이크로컨트 롤러(MCU; MicroController Unit)라고 부른다.

우리 생활을 잠시 둘러 보면 마이콤이 자리잡고 있지 않은 곳이 없다. TV, VTR, 리모콘, 전화기(전자식), 냉장고, 세탁기, 밥솥, 전자레인지, 선풍기, 청소기, 전자게임기 등 소위 '전자가전'에서는 모두 마이컴이 재주를 부린다.

엘리베이터가 작은 컴퓨터에 의해 움직인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적다. 올라가고자 하는 층을 누르는 곳은 컴퓨터 자판이고, 올라가고 있는 층수를 보여주는 곳은 모니터다. 물론 엘리베이터 안에는 마이컴이 들어있어 모든 동작을 조정한다. 휴대전화 팩스 등의 정보기기들은 마이컴이 없으면 전화번호를 기억할 수 없고, 정보를 보낼 수도 없다.

재미있는 사실은 컴퓨터 역시 '작은 컴퓨터'라고 하는 마이컴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키보드, 마우스, 모니터, 프린터는 컴퓨터 본체에 딸려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각각 하나의 컴퓨터다. 그 안에 들어앉은 마이컴은 끊임없이 본체에 있는 중앙처리장치와 정보를 주고 받는다.

그렇다면 마이컴과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컴퓨터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어떤 이는 그 차이를 한정식(韓定食)과 비빔밥에 비유한다. 밥(CPU)과 반찬(롬, 램, 입출력장치)이 각각의 그릇(칩)에 담겨 있는 것이 한정식이라면, 비빔밥(마이컴)은 이 모든 것을 한 그릇에 모아놓은 것이다. 마이컴이 필요했던 이유도 비빔밥과 비슷하다. 비빔밥처럼 간편하게 먹어보자(사용해보자)는 것이다. 결국 마이컴은 크기가 작고 전력소모가 적고 가격이 저렴하다는 장점을 안고 컴퓨터의 틈새시장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마이컴과 일반 컴퓨터의 질적인 차이는 파출부와 아내 만큼이나 크다. 마이컴은 시킨 일만 주로 하지만, 일반 컴퓨터는 스스로 일을 설계하고 때로는 남편이 할 수 없는 일 까지 처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은 일은 마이컴이, 큰 일은 컴퓨터가 분업하는 체계를 유 지하고 있다.

☞ 마이컴의 역사

반도체 역사는 1947년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12년 후 트랜지스터 등을 모아 놓은 집적회로(IC)가 텍사스인스트루먼트와 어차일드반도체 회사에서 각각 만들어졌 다. 다시 12년이 흐른 1971년 인텔은 한개의 칩에 여러개의 집적회로를 들어있는 4004 마이 크로프로세서를 개발했다.

이때 인텔은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 4001 롬, 4002 램 등을 활용한 마이크로컴퓨터 MCS-4를 처음 선보였는데, 이것이 마이크로컴퓨터(마이컴)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같은 해 텍사스인스트루먼트는 한개의 칩에 컴퓨터를 구성하는 모든 부품을 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마이크로프로세서가 급속하게 보급되고 발전하는데 비해, 마이컴의 발전은 매우 미미했다. 그런데 1970년대 말 석유파동이 일어나 자동차의 연료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사용 하는가가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다. 그래서 포드자동차는 연료와 공기의 배합율, 배터리의 효율성 등을 높이기 위해 인텔의 8061 마이크로컨트롤러(마이컴)을 도입했다. 이것은 엔진 의 전압, 온도, 습도, 속도 등의 변수에 따라 최적의 방법을 찾아주었다. 오늘날 자동차에 는 60여개의 마이컴이 들어 있어 엔진과 안전장치 등을 작동시키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서야 마이컴의 진가는 발휘되기 시작했다. 각종 휴대용 게임기가 나오 고, 생활가전에서 기능성 상품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 덕에 마이컴 시장은 램 시장 이 상으로 그 규모가 커졌다.

무늬는 인공지능, 내부는 마이컴

한때 카오스, 인공지능, 퍼지라는 말이 가전제품에서 유행한 적이 있다. 이것들은 마이컴에 입력한 프로그램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마이컴 칩 내에는 롬의 역할을 하는 부분이 있다. 이곳에 어떤 프로그램을 입력하느냐에 따라 마이컴의 기능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같은 세탁기라도 마이컴에 입력된 프로그램에 따라 카오스 세탁기가 되거나 퍼지 세탁기가 된다. 또 세탁기와 밥솥에 들어가는 마이컴의 프로그램 역시 다르다.

마이컴은 마이컴회사와 가전회사의 협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먼저 가전제품을 만들려고 하는 회사가 프로그램을 개발하면 마이컴회사에서는 그 프로그램을 받아 마이컴 내부에 입력한 후 생산해 다시 가전회사에 납품한다. 컴퓨터의 경우 램 용량을 늘리기 위해 아무 사 제품이나 사다가 끼워넣는데, 마이컴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런데 대부분 가전회사들은 프로그램 개발기술이 딸리기 때문에 마이컴회사의 프로그램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마이컴회사들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를 모듈이라고 함)을 갖춰놓고 가전회사들을 기다린다. 이때 얼마나 다양한 프로그램을 갖추고 있느냐가 시장 점유의 관건이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냉장고가 꼭 갖추어야 할 조건은 김치보관기능이다. 그래서 가전회사들은 냉장고를 만들 때 김치맛을 내고 익히는 기간을 조절하는 등 다양한 기능들을 개발 한다. 1994년 한 중소기업은 원적외선을 이용해 김치 특유의 상큼한 맛을 내는 젖산과 탄산 을 풍부하게 우러나게 하고, 김치의 신선도를 2-3개월 유지시켜 주는 등 다양한 기능을 보유한 냉장고를 선보인 바 있다. 이것은 마이컴에 입력된 프로그램의 개가였다.

지난해 보온밥솥 시장은 어느 해보다 불꽃 튀기는 경쟁이 벌어졌다. LG전자는 전자유도 가열기술을 이용해 전통 가마솥 밥맛을 재현하고, 백미 현미 잡곡 등 미곡의 상태에 따라 압력을 자동으로 조절해 주는 전자밥솥을 내놓았다. 동양매직은 뉴로퍼지센서를 장착해 밥 솥 내부의 수온 및 주위 온도를 감지하고 최적의 열량을 조절하는 인공지능밥솥을 선보였다. 또 현대그린에서는 보통, 진밥, 된밥, 누룽지 등 밥의 종류를 설정할 수 있는 밥솥을 들 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이처럼 마이컴의 무늬라고 할 수 있는 내장 프로그램은 마이컴의 생 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아직은 10위권 밖

마이컴은 4비트, 8비트, 16비트, 32비트 등 데이터를 주고 받는 방식('버스'라고 함)에 따라 나뉜다. 쉽게 말해 한번에 넘겨주는 정보 보따리 안에 4개의 비트(정보의 단위)를 담느냐, 8 개의 비트를 담느냐에 따라 구별한다. 숫자가 크면 정보처리속도가 그만큼 빠르다.

흔히 리모컨, 선풍기, 냉장고, 세탁기, 단순한 완구류, 텔레비전 특수기능 등 정보처리속도가 빠를 필요가 없는 것들은 4비트나 8비트 마이컴을 쓴다. 그리고 정보처리속도가 빠를수록 좋은 팩스나 휴대전화 같은 것은 16비트나 32비트 마이컴을 쓴다.

지난해 다마곳치라는 휴대용 게임기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여기에는 4비트 마이컴이 들어 있어 전세계적으로 4비트 마이컴은 바닥이 났다. 이때 삼성전자는 휘파람을 불렀다. 다마곳치에 들어가는 4비트 마이컴의 약 60%를 삼성전자에서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삼성전자가 일본에 납품한 4비트 마이컴은 월 1천만개. 그렇다면 일본은 얼마나 돈을 벌었을까.

1997년도 세계 반도체 시장의 규모(표1)는 약 1천4백억달러(약 1백82조원)에 달했다. 매출 1위는 반도체 분야의 지존(至尊)인 인텔로 매출의 15%(2백11억달러)를 거둬갔다. 우리나라 기업으로는 삼성이 7위(59억달러), LG반도체가 17위(24억달러), 현대가 20위(20억달러)를 차지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점은 D램과 같은 메모리분야에서는 삼성, LG, 현대가 나란히 10위권 에 들었는데, CPU로 대변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나 마이컴과 같은 비메모리 분야에서는 10 위권에 든 우리 기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우리의 반도체기술이 차지하고 있는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떤 이는 이를 두고 '설계기술이 없는 붕어빵 장사'라고 비하시켜 말하기도 했다. 또한 국내 한 반도체회사 직원은 "현재까지 우리나라는 메 모리 계열의 반도체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앞으로 그 전망은 불투명하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새롭게 노려야 할 시장은 어딜까. 그것은 마이컴 시장이라고 한다. 마이컴은 마이크로프로세서처럼 설계기술이 복잡하지 않고 응용분야가 넓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마이컴 개발사는 그리 길지 않다. 1994년 금성일렉트론이 가전용 4비트 마이컴을 개발한 것이 거의 효시. 이듬해 삼성전자는 컬러TV에 사용하는 8비트급 마이컴을 개발했다.

현재 세계시장은 4비트와 8비트 마이컴이 전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점차 16비트와 32비트 마이컴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삼성전자, LG 반도체는 32비트 마이컴을 국내에서 처음 개발함으로써 세계 기술과 그 격차를 좁혔다. 32비트 마이컴은 디지털스틸카메라나 셋톱박 스와 같은 디지털 신가전 시장과 이동통신 시장이 크게 발전하면서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전자밥솥


☞ 반도체 공룡기업 인텔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 무어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마운틴뷰에 인텔(Intel; INTegrated ELectronics)이라는 반도체회사를 세운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그들은 발음하기 쉬운 인텔 이라는 이름을 1만5천달러를 주고 당시 같은 이름을 쓰던 호텔로부터 샀다고 한다.

첫해 인텔의 매출은 2천7백62달러. 그런데 지난해 인텔의 매출은 250억7천만달러(한화로 약 32조6천억원)로 30년도 되지 않아 1천만배나 성장했다. 이러한 성공의 배경에는 반도체 역사를 홀로 써온 인텔의 기술력이 있다.

인텔은 1971년 4004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했다. 여기에는 2천3백개의 트랜지스터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1974년에 8비트 8088 마이크로프로세서, 1978년에 16비트 8086 마이크로 프로세서를 내놓았다. IBM이 인텔의 8088 마이크로프로세서를 이용해 개인용 컴퓨터(PC)를 처음 선보인 것은 1981년 8월의 일이었다. 이듬해 인텔은 흔히 286이라고 부르는 80286 마 이크로프로세서를 내놓았다. 이후 286은 6년 동안 1천5백만대의 개인용 컴퓨터에 장착됐다. 인텔이 27만5천개의 트랜지스터를 장착한 386(80386)을 내놓은 것은 1985년. 이후 인텔은 486(1989년), 펜티엄 프로세서(1993년), 7백50만개의 트랜지스터를 내장한 펜티엄 II 프로 세서(1997년)를 선보이면서 반도체 프로세서의 맹주로 군림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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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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