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는 전세계 100대 첨단기업 중 20%가 터를 잡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는 1주일에 하나의 기업이 공개되고, 하루에 60여명의 백만장자가 태어난다고 한다.
최초의 백만장자는 윌리엄 휴렛과 데이브 팩커드. 그들의 운명적인 만남으로 실리콘밸리는 탄생했고, 그 신화는 수많은 젊은이에 의해 계승되고 있다. 인텔, 애플, 오라클, 선마이크로시스템, 시스코 시스템, 넷스케이프 커뮤니케이션, 야후 등 쟁쟁한 기업들이 실리콘밸리에서 태어났으며, 이들은 매일 세계 언론을 도배하고 있다.
5백38달러의 기적
1535년 코르테스 일행이 캘리포니아 반도에 착륙했을 때 그들은 이곳에서 나는 진주를 보고 전설 속의 아마존섬이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진주와 금이 넘쳐나는 아름다운 아마존 섬을 다스렸던 칼리피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캘리포니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마존섬은 1년에 하루만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 남자를 허락하던 여인왕국이었다. 그러나 프란시스코에 의해 이곳이 섬이 아닌 반도라는 사실이 후에 밝혀졌다.
캘리포니아는 스페인 지배시대를 거쳐 서부 개척자들에게 넘어갔다. 그들은 이곳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 곳곳에서 금광이 발견되기도 했다. 이러한 물질적 기반 때문에 캘리포니아는 1850년 미국의 31번째 주가 되기 전까지 독립국가의 지위를 유지했다.
캘리포니아산 오렌지 주스는 아직도 전세계인을 즐겁게 한다. 이처럼 풍부한 과일을 생산하는 농업지역이 첨단산업단지로 거듭난 것은 스탠퍼드대학이라는 씨앗이 뿌려졌기 때문이 었다. 레런드 스탠퍼드 상원의원은 자신의 아들이 불의의 사고로 죽자 1885년 2천만달러와 팔로알토 지역의 광활한 목장을 대학 부지로 내놓았다. 그리고 MIT 출신의 프레드릭 터먼 교수가 부임해와 스탠퍼드대학을 키웠다.
1939년 터먼 교수의 지도를 받은 26살의 윌리엄 휴렛과 데이브 팩커드는 팔로알토의 한 차고에서 음파를 분석하는 음향발진기를 만들어냈다. 터먼 교수는 5백38달러를 빌려주고 은 행 대출을 알선하면서 그들에게 회사를 차릴 것을 권유했는데, 이것이 최초의 벤처기업이자 실리콘밸리의 신화를 만든 휴렛팩커드(HP)다.
휴렛팩커드는 월트 디즈니 영화사로부터 주문을 받기 시작해 3년 만에 연간 1백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성장했다. 전세계 젊은이들이 가장 근무하고 싶어하는 회사로 알려진 휴렛팩커드는 오늘날 컴퓨터, 계측기, 분석기기, 의료장비 등을 생산하는 대기업으로 성장했으며, 1998년에는 1백20억달러(약 17조원)의 매출을 올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리콘밸리의 출발점을 드포레스트에게서 찾는 사람들도 있다. AT&T에 근무하던 그는 1906년 동료들과 함께 진공관 증폭회로를 개발한 바 있다.
쇼클리사단
쇼클리 반도체연구소가 실리콘밸리의 역사에서 주목받는 이유는 벤처기업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이곳에는 유능한 젊은이들이 많이 모였는데, 그중에는 로버트 노이스 다 끼여 있었다.
그는 7명의 30대 미만의 젊은이들(쇼클리는 노이스와 이들을 8명의 배신자라고 불렀다)과 더불어 쇼클리 품안을 튀쳐나와 1957년 마운틴뷰에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를 만들었다. 돈욕심이 많고 가혹한 훈련으로 제자들에게 신망을 잃은 세계적인 물리학자 쇼클리가 파산하는 동안 노이스가 이끄는 페어차일드는 1959년 반도체 집적회로(IC)를 만들어냈다.
1968년 로버트 노이스는 고든 무어와 함께 페어차일드에서 빠져나와 산타클라라에 두번째 회사를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반도체 칩의 대명사가 된 인테그레이티드 일렉트로닉스 (Integrated electronics), 줄여서 인텔(Intel)이란 회사다. 노이스는 회사를 설립하기에 앞서 유능한 인재를 선발하기 위해 스탠퍼드대학을 방문했는데, 이때 운명적으로 만난 사람이 호프 박사다. 그는 1971년 페어차일드에서 옮겨온 피데리코 파진과 함께 인텔 4004라는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개발했다.
오늘날 인텔이 생산하는 반도체 칩은 매달 4천조개, 지구인 한사람당 50만개의 꼴이다. 인 텔의 마이크로 칩은 컴퓨터뿐 아니라 휴대전화, 현금자동지급기, 오디오, 비디오 등 현대생 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1997년 시사주간지 타임의 발표에 따르면 인텔의 재산 가치는 1천1백50억달러. 한해 영업이익은 51억달러로 세계 7번째로 돈을 잘 버는 회사가 됐 다.
쇼클리 제자들이 명성을 떨치기 전 실리콘밸리에는 테이프 레코더를 생산한 암펙스(1944 년, 산타클라라), 잉크젯 프린터와 광디스크를 개발한 스탠퍼드연구소(1946년, 팔로알토) 등이 세워졌다.
1951년 스탠퍼드대학은 벤처기업의 창업을 돕기 위해 팔로알토에 인더스트리 파크를 조성했고, 1952년 IBM은 산호세에 연구센터를 만들어 스탠퍼드대학과 버클리대학의 우수한 인재를 이용해 하드디스크 저장장치를 만들어냈다. 또 2차대전 중 군수산업으로 엄청난 돈을 번 록히드도 서니베일에 지사를 설립해 실리콘밸리의 인재들을 흡수했다.
루트 128이 실패한 이유
1970년대 미국에는 두개의 커다란 첨단산업단지가 있었다. 하나는 팔로알토에서 출발한 서부의 실리콘밸리이고, 다른 하나는 동부의 보스톤을 중심으로 한 '루트 128'이었다. 루트 128은 MIT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매사추세츠의 기적'을 일궜다.
그러나 1980년대에 들어서서 두 곳의 운명은 갈리기 시작했다. 당시 실리콘밸리는 일본의 반도체업체들로부터 공격을 받고 있었고, 루트 128의 중대형 컴퓨터업체들은 값싸고 작은 워크스테이션과 개인용 컴퓨터의 도전을 받았다. 이때 실리콘밸리는 선 마이크로시스템스와 같은 신생기업들이 탄생하고, 휴렛팩커드와 인텔과 같은 기업들이 옛명성을 되찾으면서 이를 극복했다. 하지만 루트 128은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디지털 이퀴프먼트(DEC), 데이터 제너럴, 프라임, 왕과 같은 컴퓨터 회사들이 침체해버렸다.
실리콘밸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들이 지역 네트워크와 인터넷 등을 활용해 상호 기술을 보완했고 자유로운 노동시장을 보유했기 때문이다. 또 투자여건을 개선해 벤처투자가들을 끌어들였다. 하지만 루트 128은 소수 대기업에 의해 지배되면서 융통성을 발휘하지 못했다. MIT는 미국 최고의 공과대학이다. 그러나 루트 128은 그곳의 뛰어난 인재를 활용 하기엔 너무 굳어 있었다. 결국 실리콘밸리는 동부의 MIT의 인재까지도 활용할 수 있었다.
20대 젊은이들의 도전
실리콘밸리라는 말이 탄생한 것은 1971년이다. 반도체산업 정보지인 '마이크로 일렉트로닉 스'의 편집장인 돈 호플러가 서해안 전자산업공단을 처음으로 실리콘밸리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때 이미 실리콘밸리는 20대들의 창업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972년 암펙스사를 그만둔 29살의 놀란 부시넬은 단돈 5백달러로 아타리(아타리는 바둑에 서 '단수'라는 뜻을 지닌 일본말)를 설립했다. 아타리에서는 TV 화면을 전자탁구대로 만들 어버린 최초의 비디오게임인 '퐁'(Pong)이 만들어졌다. 퐁은 이듬해 3백20만달러를 벌어들였 다. 아타리는 1976년 워너 커뮤니케이션에 매각될 때까지 몸값을 2천8백만달러로 올렸다.
휴렛팩커드에 이어 실리콘밸리를 유명하게 만든 두번째 신화는 쿠퍼티노의 한 차고에서 이뤄졌다. 1976년 21세의 스티브 좁스와 26세의 스티브 워즈니액이 여기서 애플이라는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좁스는 1955년 2월 24일 부모의 이름을 모르는 고아로 태어나 양부모인 좁스 부부 밑에서 자랐다. 13살 때 그는 5살 위인 워즈니악을 만나 장거리 전화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푸른 상자'를 만들어 팔기도 했다. 그러나 좁스의 운명은 순탄하지 못했다. 대학을 다녔지만 환각제에 빠졌고, 아타리에 입사해 농구게임을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가 헤어졌던 동네 형인 워즈니악을 다시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두 사람은 단 한개의 회로기판으로 이뤄진 컴퓨터를 개발했는데, 이것이 IBM을 제치고 PC 시장을 석권했던 애플 컴퓨터의 출발이다. 좁스는 1985년 존 스컬리에 의해 애플에서 축출된 후 인터넷과 기업 용 소프트웨어 전문업체인 넥스트를 설립했고, 1986년 설립한 픽사는 '토이 스토리'를 만들 어 그에게 아카데미상을 안겼다. 그리고 1996년 경영난에 시달린 애플에 다시 입성해 11년 만에 애플과의 재회를 만끽했다.
1977년 문을 연 오라클은 역시 20대의 로렌스 엘리슨이 산타클라라에서 창업한 회사다. 오라클은 관계형 데이터베이스로 전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고 있으며, 현재 네트워크 컴퓨 터(NC)를 주도하고 있다. 1997년 오라클의 매출은 56억달러. 유닉스(UNIX)로 유명한 선마 이크로시스템은 27살의 청년 4명이 1982년 멘로파크에 세운 회사로 전세계 중형컴퓨터 시장을 석권하고 있다.
스탠퍼드 대학원에 다니던 레오너드 보색과 샌디 러너는 1984년 시스코(CISCO)를 창업했다. 이 회사는 1990년대에 불기 시작한 인터넷 바람을 타고 매년 50%가 넘는 초고속 성장률을 보여 1996년에는 40억달러, 1997년에는 64억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순익은 10억달러에 이르렀다. 시스코 종업원 1만명 중 절반은 스톡옵션 때문에 백만장자가 됐다고 한다.
시스코는 인터넷망을 건설할 때 필수적인 라우터와 스위치를 개발하고 있으며, 전세계 라우터 시 장의 85%를 차지하고 있다. 지난해 시스코는 성장가능성이 높은 회사로 마이크로소프트, 인 텔, 모토롤러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1990년대의 신화
1990년대 실리콘밸리의 20대 신화는 넷스케이프를 만든 마크 앤드리센과 야후를 만든 제리 양이 창조했다. 앤드리센은 1995년 8월 넷스케이프 커뮤케이션의 상장으로 24살에 백만 장자가 됐다. 그의 수중에 들어온 돈은 5천2백만달러(한화로 약 730억원). 1993년 일리노이 주립대 4학년 때 네이게이터의 원조인 모자이크를 개발한 앤드리센은 이 프로그램을 무료로 배포하면서부터 유명세를 탔던 컴퓨터 천재다.
앤드리센에게 창업을 권유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스탠퍼드대학의 교수였던 클라크 박사로 1982년 6명의 제자와 함께 마운틴뷰에 실리콘 그래픽스(SGI)를 창업한 사람이다. 실리콘 그래픽스는 3차원 화상처리 워크스테인션을 개발해 자동차 및 항공기의 설계, 군사, 의약품 개발, 영화 등 영상기술이 필요한 곳에 제공해 왔다. 영화 '터미네이터 2'와 '쥬라기 공원'의 특수효과들은 실리콘 그래픽스의 작품이다. 1995년 실리콘 그래픽스의 연간매출은 약 2억달 러.
야후는 대표적인 인터넷 길잡이의 이름이다. 인터넷을 사용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야후 사이트(http://www.yahoo.com, 한국에선 http://www.yahoo.co.kr)다. 제리 양은 1994년 스탠퍼드대 전기공학과 박사과정에 재학 중 28살의 나이로 인터넷 검색도구인 야후 를 개발해 백만장자가 됐다.
양이 야후를 개발하는데는 일본 '소프트방크'의 회장인 재일동포 손정의씨의 뒷받침이 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손회장의 경제적 도움과 경영 자문으로 야후는 1996년 미국 장외시장(나스닥)에 상장했고 하루만에 1억3천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야후 주식은 상장 당 시에는 11달러였으나 97년 말에는 69달러로 6배 이상 상승했다. 이 덕분에 지난해 설립된 야후 코리아도 더불어 횡재했다. 야후 코리아 임직원들은 본사 주식을 3천-1만주씩 받았는 데 갑자기 주가가 치솟아 반년 만에 1인당 2억5천만원에서 8억4천만원의 소득을 앉아서 챙긴 것이다.
실리콘밸리에 뒤늦게 뛰어든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55세의 나이로 다이아몬드 멀티미디 어를 설립했던 이종문씨도 그 중의 한사람이다. 그는 1982년 서니베일에다 회사를 설립해 그래픽카드에 들어가는 메모리칩과 기판을 개발했다. 그리고 10년 후 그는 1억3천만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회사로 키웠다.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는 1994년 미국내 5백개 개인기업 중에서 성장속도가 빠른 기업 순위에서 18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