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곰팡이는 주요 먹이인 유기물질(대부분의 탄소화합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잘 자라는 안이한 생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자연계의 특수한 환경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곰팡이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어 유기물질 중에서 좀처럼 분해가 되지 않는 목재만을 영양원으로 택하는 곰팡이가 있다.
흰개미 못지 않은 파괴 능력
고목이나 울타리의 나무기둥과 같이 오래된 야외의 목재구조물에 버섯이 피는 현상을 흔히 볼 수 있다. 이처럼 목재를 부패시키는 곰팡이를 '목재 부후균'(wood-rotting fungi)이라 부른다. 이 곰팡이 때문에 전신주나 건축재가 대개 몇년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다. 심지어 건물 내부를 구성하는 마른 목재조차 곰팡이 탓에 갈색의 썩은 나무로 변한다.
목재는 식물 세포벽의 주성분인 셀룰로오스와 세포막의 리그닌이라는 성분이 합해져 단단한 성질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곰팡이는 종류별로 둘 중 어느 하나를 분해할 수 있다.
셀룰로오스 성분만을 분해하는 경우 남아있는 리그닌 탓에 썩은 목재는 갈색을 띤다(갈색부후). 반대로 곰팡이가 리그닌만을 분해할 때 썩은 목재는 흰색의 잔해를 남긴다(백색부후). 대부분의 곰팡이가 여기에 속하는데, 우리 귀에 익은 느타리버섯균(Pleurotus ostreatus)이 대표적인 예다.
과거 해양강국이던 영국은 1700년대에 이미 범선(돛배)의 재료인 목재의 부패현상에 관심을 쏟았다. 균학자인 제임스 소우어비(1757-1822)는 목재를 부패시키는 곰팡이로부터 전함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해군이 자문을 구한 최초의 곰팡이학자였다.
오래 전부터 미국에서는 지은 지 수십년이 넘은 주택이나 대형 목재건물이 무너져 골치를 앓아왔다. 처음에는 건물이 붕괴된 것이 흰개미의 소행이라의 점이 밝혀졌다. 하지만 곰팡이가 흰개미에 못지 않는 비율로 목재를 부패시킨다는 점이 알려져 큰 층격을 던졌다.
흥미로운 점은 건조한 목재에 잘 기생하는 곰팡이의 일종(Serpula lacrimans)은 건물 외의 다른 곳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을 거쳐 인간의 문화에 잘 적응해 온 곰팡이인 셈이다.
곰팡이의 악영향은 비단 목재를 파괴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 현재 공업적으로 양질의 종이를 생산하기 위해 목재로부터 얻어진 펄프로부터 리그닌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한 공정이다.
이 공정의 대부분은 펄프를 강한 산이나 알칼리로 처리하는 일로 이루어지는데, 그 결과 발생한 막대한 폐수를 처리하는 일이 커다란 부담으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에는 생물학적 방법, 즉 리그닌만을 선별적으로 분해하는 곰팡이를 처리 과정에 도입시키는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송이버섯이 비싼 이유
한편 식물에 기생해서 일방적으로 영양분을 뺏어오는 대신 식물과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곰팡이도 있다. 워낙 값이 비싸 우리 서민들에게 '그림의 떡'과 같은 송이버섯(Tricholoma matsutake)이 대표적인 사례다.
느타리버섯이나 양송이, 그리고 표고버섯은 짚이나 톱밥을 재료로 사용함으로써 인공적으로 재배가 가능하다. 송이버섯도 이처럼 대량으로 재배할 수 있다면 값싸게 구입해서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송이버섯은 오로지 산에서 자연적으로 발생할 뿐이다. 왜 그럴까.
송이버섯은 살아있는 소나무와 공생관계를 이루어야 비로소 생존이 가능하다. 곰팡이가 다른 생물과 공생을 한다? 그렇다. 자연계에서 이런 관계는 드물지 않다.
많은 종류의 고등식물에서 뿌리 주위의 토양에 곰팡이의 균사(실모양의 곰팡이 본체)가 발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균사는 집단을 이뤄 뿌리 표면을 둘러싸거나, 뿌리 조직의 내부까지 뚫고 들어간다. 이처럼 고등식물의 뿌리와 공생관계를 이루는 균을 균근(菌根, mycorriza)이라고 부른다.
곰팡이는 흙 속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균사를 통해 무기질 영양소(인, 칼슘, 유황 등)를 흡수한 후 이를 식물의 뿌리에 전달한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생산한 탄수화물을 곰팡이에게 공급한다. 서로 필요한 영양분을 주고받는 공생관계를 형성한 것이다.
균근은 경우에 따라 식물의 생장에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한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균근성 곰팡이를 소나무에 접종한 결과 소나무의 곁뿌리생장이 2백배 이상 촉진됐다. 그 결과 어린 소나무의 생장 속도가 1백-2백배 이상 빨라졌다. 균근을 잘 활용하면 삼림생태계를 보존하는데 큰 힘을 얻을 수 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초식동물 소화작용 도와
고등동물과 공생하는 곰팡이도 있다. 사람을 비롯해 많은 동물들은 식물을 대량으로 섭취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고등동물은 식물의 주요 성분인 셀룰로오스를 분해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몸 속에 들어온 셀룰로오스가 소화되지 않은 채 그냥 외부로 배출되는 것일까. 이럴 경우 소와 같은 초식동물은 제대로 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해 '굶어죽을' 것이 뻔하다. 다행히도 초식동물의 위장에는 셀룰로오스를 분해하는 막대한 수의 곰팡이들이 존재한다.
소나 양처럼 되새김질을 하는 동물의 위는 3-4개로 구성되는데, 첫번째 위는 산소가 없는 상태다. 바로 이곳에 셀룰로오스를 강력하게 분해하는 곰팡이가 살고 있다. 수는 1g 당 1백여개 정도.
이 곰팡이는 셀룰로오스를 분해해 당분과 지방산, 그리고 아미노산과 같이 동물의 생장에 필요한 영양소로 전환시킨다. 또 이 과정에서 급속히 수가 늘어난 곰팡이의 일부는 동물의 소화효소에 의해 분해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동물에게 비타민과 아미노산을 공급한다. 이런 현상은 되새김질 동물 외에도 코끼리, 말, 토끼와 같은 수많은 초식동물에서 발견된다.
사람의 경우 위장에는 이런 분해효소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가 먹는 김치의 셀룰로오스 성분은 소화되지 않은 상태로 배설된다. 하지만 셀룰로오스는 물리적으로 장의 표면을 자극해 배변을 원활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