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이집트 피라미드의 역사

계단형에서 출발, 미라보존이 목적

일반적으로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거론할 때 대부분 기자에 있는 세개의 대피라미드를 연상한다. 이들은 이집트의 제4왕조(기원전 2613-2494년)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나 이 피라미드만이 이집트에서 건설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피라미드에 대한 신비를 해석하는데 중요하다. 이집트에는 1백40여개의 대소 피라미드가 건설됐으며, 현재 그 위치가 확인된 것만도 80여개가 된다.

이집트 피라미드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이집트의 특이한 기후의 산물인 미라와 고대 이집트 인들의 내세관을 알아야 한다. 고대 초기 이집트에서 사망한 사람을 매장하는 일은 매우 간단했다. 사막 경계 지역에서 시체를 약간 깊은 구덩이에 넣고 모래로 덮었을 뿐이다.

건조한 공기와 더운 모래의 접촉을 받은 시신에서 급속한 탈수 현상이 일어났다. 이때 수의가 ››기 전에 자연적인 방법으로 미라가 만들어지곤 했다. 이집트인들은 우연히 육신이 보존된 미라를 발견하고 내세에서 생을 영위하기 위해 미라처럼 시신이 보존돼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구덩이가 커다란 무덤으로 변하고 관이 사용되자 시신은 모래와 직접 접촉하기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집트인들은 인공적으로 미라를 만드는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편 공들여 미라를 만들어도 끊임 없이 불어 닥치는 사막의 바람이 무덤을 흩날려 버리고 재칼과 같은 동물이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훼손하곤 했다. 그러므로 무덤을 안전하게 지키는 방법도 동시에 생각해야 했다.
 

(그림)피라미드 구조의 변천^진흙 벽돌로 만든 직사각형의 묘(마스타바)가 피라미드의 원조다.(①). 이후 계단형의 '피라미드 복합건축물'이 만들어졌고(②), 제4왕조에 이르러 오늘날 남아 있는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③). 파라오의 권위가 약해지면서 피라미드 건축도 사라져갔다.


대피라미드가 비어있는 이유

왕조 시대로 들어서자 이집트인들은 진흙 벽돌로 상부가 편평하고 옆이 경사진 무덤 '마스타바'를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피라미드의 기원이다. '마스타바'는 사자(죽은 사람)가 환생할 때까지 영원한 삶을 누리는 직사각형의 묘다.

마스타바의 지상부나 지하부에 몇개의 방이 있는데, 한 방에는 죽은 사람의 미라를 안치하고 다른 방에는 사자를 위한 물건들을 넣었다.

세계 최초로 돌을 가공해 만든 피라미드는 사카라 제3왕조(기원전 2천6백년경) 죠세르 왕 시대에 이루어졌다(그림 2). 이 웅대한 건축물을 '피라미드 복합 건축물'이라고 부른다. 묘지는 물론 신전이나 부속 건물을 비롯해 장례와 생활에 관련된 모든 것이 갖춰져 있는 구조다.

제4왕조에 이르면 피라미드는 오늘날과 같은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계단식 피라미드의 건축술을 숙지한 건축가들은 가장 단순하면서 순수한 형태로 하늘을 직접 향한 모습의 피라미드를 현실화시킨다. 기자의 대피라미드는 바로 이런 노력의 산물이다.

피라미드 건설은 4-5 왕조에 절정을 이루고 13 왕조까지 지속된다. 피라미드의 건설 시기는 이집트가 정치적·경제적으로 절정기에 달할 때였다. 파라오는 스스로를 신으로 칭하면서 지배력을 유지했고 중앙집권체제에서 사회는 안정돼 있었다.

이 시대가 5백년 쯤 계속되다 실질적인 지배자가 파라오에서 지방 제후로 바뀌기 시작했다. 파라오의 권위는 약해지고 피라미드는 약탈당하고 파괴된다. 심지어 자신이 건설하는 무덤의 부장품을 확보하기 위해 파라오 스스로가 선대 피라미드를 공개적으로 파헤치기도 했다.

쿠프왕의 대피라미드도 당시(기원전 2천년 이전) 약탈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폐단을 잘 알고 있는 후대의 파라오들은 이후 대피라미드와 같은 웅장한 건축물을 만들지 않았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97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이종호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문화인류학
  • 미술사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