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를 대표하는 문명의 이기 자동차. 2백년이 조금 넘는 짧은 역사 속에서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으로 자리잡은 자동차의 어제와 오늘을 살펴보자.
자동차의 역사는 과거에 대한 끊임 없는 보완작업을 통해 이루어져왔다. 문헌에 따르면 자동차를 최초로 구상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였다. 다 빈치는 1480년경 시계에 쓰이는 태엽을 동력으로 하는 자동차를 구상했다. 하지만 이는 말 그대로 구상에 그쳤고, 헬리콥터 등 허다한 다빈치의 다른 구상과 마찬가지로 수백년 뒤에나 실용화됐다.
실제 제작된 자동차 1호는 1765년 프랑스의 공병대위 니콜라 퀴뇨가 대포를 이동시키기 위해 만든 세바퀴 수레였다. 4년 전 영국의 제임스 와트가 발명한 증기기관을 이용한 퀴뇨의 세바퀴 수레는 시속 3km, 당시로서는 엄청난 속도로 달릴 수 있는 어엿한 자동차였다. 하지만 불행히도 방향전환을 손쉽게 할 수 있는 장치를 갖추지 않아 첫 시험운행에서 사고를 낸 뒤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말았다.
마차에 증기기관을 붙이고
퀴뇨의 실패 이후 별 발전이 없던 증기자동차는 화물 수송용이 아니라 승용차로 개발되기 시작했다. 1801년 영국에서 마차의 뒷바퀴에 증기보일러를 연결한 후륜구동방식의 세바퀴 마차 자동차가 등장했다. 퀴뇨의 증기기관차가 앞바퀴에 동력을 연결시켜 무게 중심이 맞지 않아 방향전환에 어려움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이 자동차는 앞바퀴에 현재의 자전거와 같은 형식을 취하고 동력장치들을 뒷쪽으로 이동시킴으로써 무게균형을 맞출 수 있었다. 말이 앞에서 끌어온 마차에서, 기관이 뒷쪽에서 밀어주는 증기 자동차가 등장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발전을 거듭한 증기자동차는 시속 약 40km까지 내며 교통수단의 일대 혁신을 가져왔다. 1820년경부터는 여러 발명가들이 증기기관을 이용한 버스를 제작해 대량 여객 운송수단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증기자동차는 이후 1백년 뒤 휘발유자동차에게 주도권을 내줄 때까지 명실공히 ‘도로의 왕자’였다.
증기자동차는 휘발유(가솔린)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물론 아직도 증기기관을 이용한 자동차가 산업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곳이 지구상에 있다. 북한에서는 아직도 목탄을 이용한 증기자동차가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일본 최대 자동차 제조사인 도요다에서는 박물관 전시용으로 이 증기기관 자동차를 들여오기 위해 북한당국과 협의중이란다.
초창기 휘발유자동차는 독일에서 경쟁적으로 등장했다. 1884년 고틀리프 다임러가 휘발유를 이용한 내연기관을 발명한 2년 후에 휘발유자동차를 개발했다. 같은 해 칼 벤츠도 휘발유자동차를 만들어냈다. 휘발유자동차의 등장으로 자동차의 크기와 무게가 현저히 줄어드는 등 자동차는 급속한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증기기관은 보일러에 물을 끓여 증기를 이용해 터빈을 돌리는, 이른바 ‘기관 밖에서 연소시키는’ 외연기관으로 부피가 큰 반면, 가솔린(휘발유)기관은 실린더 내부에서 직접 연료가 연소되며 나오는 폭발력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증기기관에서 가장 큰 부피와 중량을 차지하던 보일러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가솔린기관과 더불어 현재 가장 많이 사용되는 디젤기관은 1890년 독일인 루돌프 디젤에 의해 발명됐다. 디젤은 휘발유기관이 기관 내부에 불꽃을 튀겨서 힘을 얻는 것을 보고 인위적으로 불을 붙이지 않고도 기관을 움직이는 방법을 찾다가, 공기와 연료를 고압으로 압축시키면 자연착화된다는 것을 응용해 디젤기관을 발명했다. 디젤기관은 휘발유자동차보다는 상당시간 뒤인 1922년 벤츠가 트럭에 처음으로 실용화했다(승용차는 1936년).
초기 주도권 전기자동차가 장악
증기기관 이외에 다른 기관들의 탄생역사를 알아보면 깜작 놀랄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전기자동차의 역사다. 차세대 무공해자동차로 이제 막 실용화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잘못 알려진 전기자동차의 역사는 오히려 휘발유자동차보다 앞선다.
1873년 영국의 로버트 데이비드존은 이미 전기자동차 제작회사를 차렸다. 또한 증기기관자동차가 주종을 이루고 이제 막 휘발유자동차가 모습을 드러낸 1900년 전후에 가장 빠른 자동차는 바로 전기자동차였다. 1899년 프랑스 파리 근교에서 펼쳐진 자동차 경주에서 영국인 사세로프 루바가 직접 설계하고 제작한 전기자동차가 당시 시속 40km정도인 자동차들을 제치고 시속 1백3km의 속도로 우승했다.
당시 전기자동차는 납축전지를 이용한 모터를 마차에 장착했는데, 휘발유자동차에 비해 전지가 무겁고 또한 충전이 쉽지 않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놀라운 성능에도 불구하고 전기자동차는 휘발유자동차보다 현실적 편의성이 떨어져 자동차 역사 경쟁에서 밀리게 됐다.
축전지의 성능과 충전편의성은 요즘 개발되고 있는 전기자동차들에게도 여전히 걸림돌이다. 현재는 기존의 납축전지 이외에 에너지밀도가 높고 수명이 긴 니켈-카드뮴(Ni-Cd)이나 니켈-수소화물(Ni-MH)전지를 이용한 전기자동차 개발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충전시간이 가장 짧은 것으로는 미국의 제너럴 모터스에서 개발한 3시간 충전에 1백45km를 달릴 수 있는 자동차가 있다. 제너널 모터스는 납축전지를 이용한 이 자동차를 올해 시판모델로 내놓고 있다. 일본의 혼다는 니켈수소전지를 이용해 8시간 충전에 2백10km를 달릴 수 있는 자동차를 개발해놓았다. 국내 자동차 제조사들도 시판 전단계까지 개발을 끝내놓고 있는 상태.
그러나 전기자동차 실용화의 문제는 1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왜냐하면 어디에나 널려있는 주유소에서 수분내에 주유를 하고 3백km 이상 달릴 수 있으며 값싼 휘발유자동차 대신, 평균 8시간 충전에 1백-2백km밖에 가지 못하는 전기자동차를 소비자들이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전기자동차는 힘이 약해 가파른 길을 올라가는 등판능력이 많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전기자동차의 실용화가 반드시 환경적으로 우수한 것은 아니라는 의견을 제기한다. 물론 대기오염의 80%가 가솔린자동차나 디젤자동차 배기가스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전기자동차 운행에 필요한 전력을 만들어내기 위한 시설과, 대부분 환경에 해로운 전지 성분의 대규모 생산·폐기가 빚을 해악이 기존 자동차 공해에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알코올자동차의 역사도 상당히 길다. 자동차왕이라는 별명을 지니고 있는 미국의 헨리 포드는 1908년 포드-T를 내놓으면서 알코올을 이용한 모델을 시판했다. 엄격히 말하면 알코올엔진이란 독자적인 기관이 있는 것은 아니고, 가솔린기관의 변형으로 볼 수 있다.
현재 알코올자동차가 가장 많이 있는 곳은 브라질이다. 알코올을 만들 수 있는 사탕수수가 많이 재배되고 있다는 장점을 최대한 살린 결과다. 현재 브라질 승용차의 60% 이상이 알코올로 달리는 자동차들이다.
알코올과 마찬가지로 액화석유가스(LPG)를 사용하는 자동차도 휘발유엔진의 변형이다. 휘발유와 공기를 혼합시켜주는 카뷰레터나 인젝션 대신 액화가스를 기화시켜주는 기화기(vaporizer)를 설치해준 것 뿐이다.
이밖에 태양전지를 이용한 일명 솔라카는 1970년대 오일쇼크 이후 개발돼 왔는데, 전기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축전지기술의 발달이 미흡해 실용화되기엔 아직 시기상조로 볼 수 있다. 현재 실용화된 것은 스위스, 네덜란드 등지에서 단거리용 특수목적으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전자산업 응용으로 날개 달아
초기의 자동차들은 모두 기존의 마차 차체에 엔진을 얹은 ‘말 없는 마차’였다. 당시의 자동차 설계는 모두 마차를 제작하던 코치빌더(coach builder)들 몫이었다. 마차의 모습에서 벗어나 차체가 낮은 현대적 의미의 자동차 모습을 갖춘 것은 1901년 독일 다임러사의 빌헤름 마이바흐가 만든 메르세데스라는 차였다. 이후 다임러사는 벤츠사와 1926년 합병, 메르세데스 벤츠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자동차 메이커가 된다.
한번 마차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동차 디자인은 이후 선박 설계자들이 배를 만드는 설계방식을 응용해 풍부한 볼륨을 주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마차와 같은 사각형에서 유선형의 보디라인을 갖는 방식으로 발전하게 됐다.
스타일도 마차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지만, 초기 자동차는 마차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경제적 여유를 가진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1900년에 유럽과 미국에서 생산된 자동차 대수는 겨우 9천5백4대에 불과하다. 이보다 10년 뒤인 1910년에는 세계 자동차 생산대수가 25만대를 기록했지만, 아직도 수공업에 의존하는 마차 제작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대량생산이라는 신기원을 가져온 사람은 미국인 헨리 포드였다. 1914년 헨리 포드는 한대 한대 장인들이 달라붙어 수공업으로 제작하던 자동차산업에 컨베이어 시스템을 도입, 대량생산의 길을 열었다. 컨베이어 시스템의 도움으로 등장한 포드-T 모델은 처음 수공업으로 만들 때 7백달러였던 가격을 2백90달러까지 내려놓았다.
포드-T모델은 무려 1천5백만대나 제작돼 대량 생산체제를 갖춘 자동차공업이 설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물론 이전의 자동차들은 같은 모델이라도 만드는 사람에 따라 부품의 규격이 틀려 고장이 나면 새로 제작해야 했다. 하지만 포드-T가 나오면서부터 부품의 호환이 가능하도록 규격화되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첫 등장은 유럽이었지만 자동차 산업의 역사는 이처럼 미국에서 시작됐다. 아직도 유럽에서는 과거의 수공업적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대량생산도 하지만 세계 유명 슈퍼카들은 대부분 소규모 작업장에서 수공업으로 제작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람보르기니나 페라리 등의 스포츠카가 바로 이런 유형이다. 지난해부터 기아에서 제작, 판매하는 엘란도 마찬가지다. 엘란은 영국 로터스사에서 개발한 정통 스포츠카로 하루에 3,4대 정도만 수공업방식으로 조립된다.
마차에서 시작한 자동차가 현재의 자동차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자동차의 핵심인 기관의 발전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필요성에 의해 장착된 보조물의 발전도 큰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는 타이어. 고무를 이용한 공기 주입 타이어는 영국 수의사 던롭이 1888년 발명했다. 자전거에 처음 이 공기 타이어를 달고 특허를 냈던 것이다. 이 타이어를 자동차에 처음 적용시킨 사람은 프랑스의 앙드레 미쉘린이었다. 이들 개척자들은 모두 자기 이름을 딴 타이어회사를 설립, 세계적인 회사로 성장했다. 이밖에 튜브없는 최초의 타이어는 1903년 미국의 굿이어사가, 바닥에 무늬를 넣어 접지력을 향상시킨 타이어는 1908년 미국의 화이어스톤사에 의해 개발됐다.
자동차산업의 역사에서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은 전자산업의 응용이다. 1970년대 이후 전자산업의 발달로 이전에는 기계적 방식으로만 제어돼온 엔진에 각종 센서를 부착한 조절장치가 부착되면서 성능과 연비 등에 급격한 발전을 가져왔다.
다임러가 만든 최초의 휘발유기관은 2백50cc에 0.5마력의 출력을 지녔지만, 요즘 일본의 혼다자동차가 자동차경주에 사용하는 1천5백cc짜리 엔진은 무려 1천2백마력의 괴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처럼 놀라운 발전은 엔진소재의 내구성이 밑받침됐지만 그보다는 최적의 조건으로 조절해주는 전자설비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밖에 에어백이나 ABS 등도 이미 전자기술이 응용된 것이며, 우리나라에서도 곧 실용화될 위성을 통한 교통안내시스템도 자동차와 전자기술이 만들어낸 멋진 합작품이다.